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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7021602 |
|---|---|
| 쪽수 | 300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수필
AI추천 이유
스마트폰이 없이 떠난 마지막 여행
그들이 여행을 떠난 것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직전인 2008년이다. 구글맵도, 트립어드바이저도, 호텔스닷컴도 없던 시절. 그들은 공중전화로 호텔을 예약해야 했고, 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야 했다. 미로 같은 골목들이 즐비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고, 날씨도 정확히 알기 어려워 비를 맞고 다녀야 했다. 이탈리아의 기차들은 “시간표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싶을 때” 떠났을 뿐 아니라 예고도 없이 툭하면 취소되곤 했다. 이탈리아어를 몰라 ‘Soppresso(취소)’를 ‘Espresso(특급)’로 착각해 플랫폼에서 취소된 기차를 한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섬으로 넘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이 고생스러운 여정 속에서도 “시칠리아가 바다 건너 섬이라는 것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그것도 몸으로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대신 여행자는 자신의 감각과 직관에 의존해 낯선 곳에서의 삶을 헤쳐나간다. 책의 갈피갈피마다 작가가 충만한 감각으로 만난 시칠리아의 맛, 풍광, 촉감, 냄새로 가득하다.
아침 여덟시 반이면 동네의 빵집으로 빵을 사러 나간다. 빵집은 일분 거리에 있고 빵집으로 가는 길에는 한집안 형제자매들이 하는 과일가게가 있다. 늘 빵을 사러 떠나지만 올 때는 과일까지 사서 돌아오게 된다. 아내와 내가 먹는 빵은 아무리 비싸도 1유로를 넘지 않는데 유명한 시칠리아의 밀로 만들어서인지 대단히 맛이 있다. 햇볕으로 단련된 과육들이 농익은 냄새를 풍기는 과일가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곳의 과일가게들은 색의 배열에 상당히 섬세하게 신경을 쓰는 눈치다. 붉고 노란 오렌지, 연두색과 자주색의 포도, 붉은 딸기 같은 것들이 길바닥에 나와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아침은 빵 몇 개와 커피, 과일로 끝내고 다시 일을 하거나 산책을 나간다.
중요한 모든 것은 비토리오에마누엘레 거리에 있다. 주로 이탈리아어로 쓰인 책을 팔지만 간혹 영어판 도서와 외국신문도 파는 서점, 작은 슈퍼마켓, 우체국과 은행지점, 과일과 야채 가게, 카페와 레스토랑, 빵집과 옷가게, 안경점과 교회가 이 거리에 있다. 이 모든 게 걸어서 오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모여 있었다.
_본문 75쪽
노토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_본문 247쪽
장엄한 유적을 따라 걷는 인문학적 사유의 여정
책의 서두는 즉흥적인 작가와 걱정 많은 아내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으며 예기치 않은 방향을 향해가는 모험담으로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김영하 특유의 흡인력 있는 문체와 활달한 통찰이 더해지면서 인간의 운명과 문명에 대한 깊은 사유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아르키메데스와 플라톤, 메두사의 땅 시칠리아를 주유하며 작가는 섬 곳곳에 깃든 역사와 신화, 전설의 세계로 현대의 독자들을 안내한다. 천공의 성을 닮은 에리체에서는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전설을 들려주며, 이들의 이야기를 현대에 자행되는 테러리즘에 관한 생각으로 확장하는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타오르미나에서는 영화 <대부>를 떠올리며 촉발된 ‘복수의 연쇄’라는 주제를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부터 이스마일 카다레, 살만 루슈디로 이어나간다.
10년 만에 재출간을 준비하면서 작가는 “여행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여행을 계획하고 상상하면서 한 번, 실제로 여행을 해나가면서 또 한 번, 그리고 그 여행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완성된다. 나는 10년 전에 이 책을 출간하면서 그 세 번의 여행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교정쇄를 받아 원고를 더하거나 빼고, 사진들을 뒤적이면서 그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여행이 끝나고 10년이 흐른 뒤에야 작가는 모든 여행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 후 10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모두 알고 난 후에 다시 읽게 되는 여행기는 작가 개인에게도 물론 각별하겠지만 그의 문체와 통찰력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인생은 길지 않다. 과거에 쓴 책을 보면 더욱 그렇다. 쓸 때의 느낌은 아직 생생한데 판권면을 들춰보면 그게 벌써 십 년 전이고 십오 년 전이다. 그런 책들은 마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로 보내온 메시지 같다. 운이 좋아서 나는 아직도 작가고 글을 쓰며 먹고살고 있지만 이 책을 쓰던 때는 모든 게 불확실했다. 편집자로부터 받은 교정쇄 속의 나는 아내와 함께 먼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칠리아를 여행한 우리는 이 년 반쯤의 해외체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게 되지만 그때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밴쿠버와 뉴욕에 가서 살게 될 것도, 심지어 귀국 후 부산에서 또 삼 년을 살게 될 것도. 이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웃으며 회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쓰인 십 년 전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책이 나오던 해에 아이폰이 우리나라에서 출시된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구글맵도, 트립어드바이저도, 호텔스닷컴도 없던 시절. 우리는 현지에 도착해 그날 밤에 묵을 호텔을 공중전화로 예약했다. 렌터카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다. 우리는 종종 이상한 길로 접어들어 헤맸고 일정에도 없던 곳에 가서 머물렀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된 지 십 년, 이제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예약하고, 유튜브로 미리 살피고, 다른 여행자의 리뷰를 꼼꼼히 본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들어가 놀라운 발견을 거듭하던 그 시절의 여행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젊었다, 그리고(아니 그래서), 겁이 없었다. 몇 년 전 절판된 이후, 꾸준히 이 책을 찾는 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장정과 편집으로 새롭게 펴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 여행 이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땅을 떠나 오래 사는 첫 경험을 했고, 요리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배수의 진을 친다는 느낌으로 결행한 여행이었지만 막상 떠나보니 여행 그 자체가 좋았다. 그때의 느낌을 새로운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개정판에는 원래의 판본에서 마지막 순간에 누락시켰던 한 꼭지, 즉 시칠리아에서 어설프게 해먹었던 현지음식 요리법 같은 꼭지를 추가했다.
원고를 고치고 다듬다 어떤 문구에 눈길이 머물렀다. 10년 전에는 심상하게 지나쳤던 부분이었다. EBS 여행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나를 찾아와 어디로 여행하고 싶으냐고 묻고 나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하는 장면. 생각해보면 내 많은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 한동안 잊어버린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곳에 가 있다. 그런 여행은 마치 예정된 운명의 실현처럼 느껴진다. 개정판의 제목이 바로 이 문구에서 나왔다.
내게는 ‘과거의 내가 보내온 편지’ 같은 책이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 같은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언젠가 시칠리아로 떠나게 될 것이고, 장담하건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020년 4월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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