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현재 우리가 지닌 <킹제임스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며, 어떤 오류도 섞이지 않고 보존된 말씀이라는 “주관적 편견”으로 시작된다. 다른 주석서 서문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편견”은 이 세대의 95%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가진 편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중략)...
잠언에 관한 문헌은 실로 방대하다. 잠언을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은 오리겐인데, 그는 능력이 닿는 한 최대로 성경 본문을 공격했다. 바실과 비드(Basil and Bede, 672)도 주석을 썼고, 델리취(Delitzsch, 1878), 클라크(Clarke, 1878), 플럼터(Plumptre), 워즈워드(Wordsworth), 미카엘리스(Michaelis, 1720), 멜랑히톤(Melancthon), 로웬슈타인(Lowenstein, 1838), 버토우(Bertheau, 1847), 힛직(Hitzig, 1858), 조클러(Zockler, 1867), 에왈드(Ewald, 1837), 엘리콧(Ellicott, 1889) 등도 잠언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썼다. 교훈적인 면에서 이들 주석에서 얻을 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통찰력이나 정확한 교리적 해석, 예언적 적용, 성경 본문에 대한 믿음에 관해서는 상당히 부족하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계시록> 서문 참조).
...(중략)...
잠언은 31장, 915절, 15,043단어로 되어 있다. “잠언”(proverb, 히브리어로는 “마샬”)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비슷하게 만들다
2. 지배하다
3. 비유와 직유
4. 함께 놓다, 나란히 두다
이것은 호세아 12:10(『내가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내가 환상들을 많이 늘렸으며,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를 사용했노라.』)이 지혜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며, “원어”를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as”나 “like”(-처럼, -같이) 같은 사소한 말들이 더 많은 진리를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잠언은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일들로 비교함으로써(고전 2:13) 지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에 사용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논할 때 성경이 말하는 그 단어의 정의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는”(막 7:13)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성경을 비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방법을 쓰고 있으며, 오늘날 미국의 믿을 만한 신학교들도 바로 그 방법대로 가르친다.
오리겐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Proverbs”(“잠언,” 히브리어로 “마샬림”)이 비교, 즉 “진리를 병행하여 제시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는지, 오리겐은 성경을 인용한 뒤 인용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생각을 열거했다. “현대” (불가지론의) 신학도 오리겐과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주석가나 신학자가 성경 본문의 뜻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꿈으로써 현대의 사사로운 신학 해석이 나온 것이며, 이러한 20세기 신학의 성향은 다음의 사항들과 일치한다.
1. 세계 평화
2. 완전 통합
3. 인간 지혜의 고양
4.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파괴시킴
5. 로마 카톨릭 교회 전통의 장려
그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을 종교 정치가들의 교과서로 전락시키며, 결과적으로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번역자나 발행인의 주관적 기준만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모든 단어, 상징, 예표, 활동의 정의를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잠언 연구에 들어간다. 그 정의들이 교회 공의회, 주석가, 신학자, 종교 정치가들의 정의와 상치될 때에도 우리는 성경이 내린 정의를 절대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공회나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을 <킹제임스성경>의 절대 무오한 권위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잠언을 주해하면서 1881, 1901년 성경 개정 위원회가 만든 수많은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할 뿐 아니라, 학자들이 “원문의 뜻을 살린다”는 등의 위선적인 변명을 해 가며 히브리어를 들먹거리면서 본문에 변개를 가해 놓은 부분들도 지적할 것이다.
학자들은 잠언이 대구(對句), 삼행절, 사행절, 오행절, 육행절, 칠행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기를 이미 거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길고 어려운 단어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잠언의 구절들을 “동의어 나열형,” “대구형,” “합성형,” “통합형,” “발전형,” “비유형,” “수(數)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참으로 똑똑하며, 몇 년 동안 비싼 강의료를 내면서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참으로 멋진 일임을 과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언 5:4; 6:13; 7:10; 8:9; 11:30; 12:4; 18:1,2; 20:26; 25:7,27; 26:27; 27:24; 30:5,6,14, 16,20,30,31; 31:4,8,9을 명확하게 주해하지 못했다. 긴 단어(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헛된 말들 - 벧후 2:18, 유 16)가 신실한 가르침, 믿음으로 하는 성경 공부, 영들을 분별함, 사실의 명확한 제시, 신실한 주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즉 언어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많은 전리품(시 119:162)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한 영과 참회하는 마음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중략)...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다(잠 25:1). 솔로몬은 자신의 글에 르무엘과 아굴의 잠언도 덧붙였는데(잠 30:1; 31:1), 이 사실 때문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잠언이 여러 사람의 글들을 모아 솔로몬의 이름만 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익히 들어 온 바다.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아닌 장로 요한이 썼다고 한 유세비우스, 이사야를 두 사람이 썼다고 한 교황 요한 23세.) 솔로몬이 잠언의 저자이다(잠 1:1). 이것은 신명기 34장과 창세기 14:14에서(주석 참조) 제기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강단 주석>은 한 사람이 잠언을 썼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문체로 써야 하며,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론적인 발상보다 상식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지혜를 가르친다는 저자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할 때마다 똑같은 표현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중요한 주제를 반복해서 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잠언이 솔로몬이 죽고 나서 200-300년 후에(또는 그보다 더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추정은 B.C. 200-600년경의 헬라 철학자들의 주가가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게 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인 솔로몬의 글이 헬라 철학이 자랑하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기록되었다면, 헬라의 “과학과 철학”은 진리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제임스, 듀이, 러셀, 키에르케고르, 아인슈타인 등이 남긴 말은 그 어떤 것도 <킹제임스성경>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대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뭔가 “독창적인” 말을 남기기에는 이미 200-400년이나 늦어 버렸다. 솔로몬이 이미 다 말해 놓았기 때문이다(전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비 지식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에서도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인 잠언을 공부할 준비가 된 셈이다.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지혜는 그나마 이 책(욥기와 전도서를 포함해서)에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서른 한 장 안에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격언과 경구, 잠언, 훈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을 공부해 나가면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욥기는 생의 중요한 문제, 즉 고난, 악, 죽음, 응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세력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반면, 잠언은 일들의 원인, 결과, 선하거나 악한 가치관을 제시하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절대 무오의 법을 정립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주(잠 2장)를 대적해서 연합하는 것을 막고 있다. 잠언의 내용은 “차든지 덥든지” “위 아니면 아래” “의 아니면 악” “공의 아니면 불의” “하늘 나라 아니면 지옥”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제롬이 변개시킨 로마 카톨릭 성경, 누가복음 2:14, 잠언 1:11 주석 참조)를 가져오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주제들이다.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는 점을 명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우상의 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겔 14:1-7). 우상이 완전히 제거된 머리와 마음으로 계시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 접근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전통이나 교회, 종교, 학위, 언어학적 재능, “과학,” 교육, 철학, 문학의 우상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판사들이 소송 사건을 다루듯이 <킹제임스성경>을 다룰 것이다. “피의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죄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 우리는 로마의 종교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성경을 다룰 것이다.
잠언은 철학가들의 철학서요, 교육가들의 교육 지침서이다. 솔로몬이 기록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신약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히브리어나 헬라어 학자들의 도움 없이 28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잠언은 독자들에게 “조상들의 지혜”와 “잃어버린 동방의 지혜”와 “말씀의 숨겨진 지혜”를 제공한다. 이 지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아퀴나스, 오리겐, 마르시온, 스피노자, 칸트, 티벳인들, 장미 십자회, 무당들, 틸리히, 유가(瑜加) 수행자들이 결코 얻지 못한 지혜이다.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19,25,27,29).
서문
이 책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현재 우리가 지닌 <킹제임스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며, 어떤 오류도 섞이지 않고 보존된 말씀이라는 “주관적 편견”으로 시작된다. 다른 주석서 서문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편견”은 이 세대의 95%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가진 편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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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에 관한 문헌은 실로 방대하다. 잠언을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은 오리겐인데, 그는 능력이 닿는 한 최대로 성경 본문을 공격했다. 바실과 비드(Basil and Bede, 672)도 주석을 썼고, 델리취(Delitzsch, 1878), 클라크(Clarke, 1878), 플럼터(Plumptre), 워즈워드(Wordsworth), 미카엘리스(Michaelis, 1720), 멜랑히톤(Melancthon), 로웬슈타인(Lowenstein, 1838), 버토우(Bertheau, 1847), 힛직(Hitzig, 1858), 조클러(Zockler, 1867), 에왈드(Ewald, 1837), 엘리콧(Ellicott, 1889) 등도 잠언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썼다. 교훈적인 면에서 이들 주석에서 얻을 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통찰력이나 정확한 교리적 해석, 예언적 적용, 성경 본문에 대한 믿음에 관해서는 상당히 부족하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계시록> 서문 참조).
...(중략)...
잠언은 31장, 915절, 15,043단어로 되어 있다. “잠언”(proverb, 히브리어로는 “마샬”)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비슷하게 만들다
2. 지배하다
3. 비유와 직유
4. 함께 놓다, 나란히 두다
이것은 호세아 12:10(『내가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내가 환상들을 많이 늘렸으며,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를 사용했노라.』)이 지혜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며, “원어”를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as”나 “like”(-처럼, -같이) 같은 사소한 말들이 더 많은 진리를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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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은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일들로 비교함으로써(고전 2:13) 지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에 사용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논할 때 성경이 말하는 그 단어의 정의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는”(막 7:13)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성경을 비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방법을 쓰고 있으며, 오늘날 미국의 믿을 만한 신학교들도 바로 그 방법대로 가르친다.
오리겐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Proverbs”(“잠언,” 히브리어로 “마샬림”)이 비교, 즉 “진리를 병행하여 제시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는지, 오리겐은 성경을 인용한 뒤 인용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생각을 열거했다. “현대” (불가지론의) 신학도 오리겐과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주석가나 신학자가 성경 본문의 뜻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꿈으로써 현대의 사사로운 신학 해석이 나온 것이며, 이러한 20세기 신학의 성향은 다음의 사항들과 일치한다.
1. 세계 평화
2. 완전 통합
3. 인간 지혜의 고양
4.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파괴시킴
5. 로마 카톨릭 교회 전통의 장려
그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을 종교 정치가들의 교과서로 전락시키며, 결과적으로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번역자나 발행인의 주관적 기준만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모든 단어, 상징, 예표, 활동의 정의를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잠언 연구에 들어간다. 그 정의들이 교회 공의회, 주석가, 신학자, 종교 정치가들의 정의와 상치될 때에도 우리는 성경이 내린 정의를 절대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공회나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을 <킹제임스성경>의 절대 무오한 권위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잠언을 주해하면서 1881, 1901년 성경 개정 위원회가 만든 수많은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할 뿐 아니라, 학자들이 “원문의 뜻을 살린다”는 등의 위선적인 변명을 해 가며 히브리어를 들먹거리면서 본문에 변개를 가해 놓은 부분들도 지적할 것이다.
학자들은 잠언이 대구(對句), 삼행절, 사행절, 오행절, 육행절, 칠행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기를 이미 거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길고 어려운 단어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잠언의 구절들을 “동의어 나열형,” “대구형,” “합성형,” “통합형,” “발전형,” “비유형,” “수(數)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참으로 똑똑하며, 몇 년 동안 비싼 강의료를 내면서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참으로 멋진 일임을 과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언 5:4; 6:13; 7:10; 8:9; 11:30; 12:4; 18:1,2; 20:26; 25:7,27; 26:27; 27:24; 30:5,6,14, 16,20,30,31; 31:4,8,9을 명확하게 주해하지 못했다. 긴 단어(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헛된 말들 - 벧후 2:18, 유 16)가 신실한 가르침, 믿음으로 하는 성경 공부, 영들을 분별함, 사실의 명확한 제시, 신실한 주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즉 언어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많은 전리품(시 119:162)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한 영과 참회하는 마음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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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다(잠 25:1). 솔로몬은 자신의 글에 르무엘과 아굴의 잠언도 덧붙였는데(잠 30:1; 31:1), 이 사실 때문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잠언이 여러 사람의 글들을 모아 솔로몬의 이름만 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익히 들어 온 바다.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아닌 장로 요한이 썼다고 한 유세비우스, 이사야를 두 사람이 썼다고 한 교황 요한 23세.) 솔로몬이 잠언의 저자이다(잠 1:1). 이것은 신명기 34장과 창세기 14:14에서(주석 참조) 제기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강단 주석>은 한 사람이 잠언을 썼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문체로 써야 하며,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론적인 발상보다 상식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지혜를 가르친다는 저자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할 때마다 똑같은 표현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중요한 주제를 반복해서 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잠언이 솔로몬이 죽고 나서 200-300년 후에(또는 그보다 더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추정은 B.C. 200-600년경의 헬라 철학자들의 주가가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게 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인 솔로몬의 글이 헬라 철학이 자랑하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기록되었다면, 헬라의 “과학과 철학”은 진리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제임스, 듀이, 러셀, 키에르케고르, 아인슈타인 등이 남긴 말은 그 어떤 것도 <킹제임스성경>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대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뭔가 “독창적인” 말을 남기기에는 이미 200-400년이나 늦어 버렸다. 솔로몬이 이미 다 말해 놓았기 때문이다(전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비 지식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에서도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인 잠언을 공부할 준비가 된 셈이다.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지혜는 그나마 이 책(욥기와 전도서를 포함해서)에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서른 한 장 안에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격언과 경구, 잠언, 훈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을 공부해 나가면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욥기는 생의 중요한 문제, 즉 고난, 악, 죽음, 응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세력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반면, 잠언은 일들의 원인, 결과, 선하거나 악한 가치관을 제시하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절대 무오의 법을 정립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주(잠 2장)를 대적해서 연합하는 것을 막고 있다. 잠언의 내용은 “차든지 덥든지” “위 아니면 아래” “의 아니면 악” “공의 아니면 불의” “하늘 나라 아니면 지옥”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제롬이 변개시킨 로마 카톨릭 성경, 누가복음 2:14, 잠언 1:11 주석 참조)를 가져오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주제들이다.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는 점을 명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우상의 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겔 14:1-7). 우상이 완전히 제거된 머리와 마음으로 계시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 접근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전통이나 교회, 종교, 학위, 언어학적 재능, “과학,” 교육, 철학, 문학의 우상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판사들이 소송 사건을 다루듯이 <킹제임스성경>을 다룰 것이다. “피의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죄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 우리는 로마의 종교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성경을 다룰 것이다.
잠언은 철학가들의 철학서요, 교육가들의 교육 지침서이다. 솔로몬이 기록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신약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히브리어나 헬라어 학자들의 도움 없이 28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잠언은 독자들에게 “조상들의 지혜”와 “잃어버린 동방의 지혜”와 “말씀의 숨겨진 지혜”를 제공한다. 이 지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아퀴나스, 오리겐, 마르시온, 스피노자, 칸트, 티벳인들, 장미 십자회, 무당들, 틸리히, 유가(瑜加) 수행자들이 결코 얻지 못한 지혜이다.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19,25,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