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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3001202 |
|---|---|
| 쪽수 | 11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척박한 세속의 문양을 넘어서는 종교적 상상력
한정옥 시인은 성서적 인유引喩나 신앙적 고백을 담은 언어를 시집 곳곳에 전면화함으로써 종교적 상상력의 한 범례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이 점이 그의 독특한 특성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대인의 영혼에 짙게 드리운 내면 진공 상태를 치유하려는 대안적 사유 방식으로써 그가 구축하는 종교적 상상력은 우뚝하게 다가온다. 또한 그가 노래하는 종교적 경험이란 우리의 마음을 원초적으로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반응으로써, 지정의知情意를 통합한 인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점에서 신성을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진 근대의 이성중심주의는 시인에게 깃들일 여지가 전혀 없다. 이러한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한정옥 시인은 그 특유의 상상력을 펼쳐간다.
사람이 있는 풍경의 아름다움
한정옥의 시는 상실과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한 시간들을 넘어 새로운 생성과 도약의 순간을 구축해 가는 명품이다.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던 순간을 훌쩍 넘어서면서, 그 시간들로 하여금 세계 내적 원리를 긍정과 소망으로 바꾸어 가게끔 한다. 우리 시대가 기쁨과 평화보다는 우울과 불모성을 드러내는 정도가 강해져 갈 때, 한정옥의 시는 삶의 역설을 통한 종교적 긍정으로 훤칠하게 나아간다. 이러한 그만의 시 세계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기억에 토대를 두면서도, 시인이 그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견지한다. 그 긍정의 밑바닥에 바로 ‘무릎’이라는 핵심 이미지가 가로놓인다.
참으로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여러 날 뒤척이던 생각으로도
출렁거리는 시간 잡지 못하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가는 줄 몰랐습니다
무거운 생각들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소설小雪 지나 묵은 솔방울 떨어지고
새 이름 풀 이름 불러오던 일 접자
사람이 찾아오네요
사람이 있는 풍경
입이 열렸습니다
―「새벽 무릎」 전문
‘새벽 무릎’은 아마도 오랜 기도의 시간을 은유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새벽 제단을 쌓아온 그에게 그동안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는 뒤척이던 생각으로도 시간을 잡지 못하고 무거운 생각들에 늘 짓눌려 있었지만, 새벽 무릎의 공력으로 “소설小雪 지나 묵은 솔방울 떨어지고/새 이름 풀 이름 불러오던 일”을 마치자 “사람이 있는 풍경”을 맞은 것이다. 그 시간을 생각해 보면 “내 몸에 가시/무한은혜”(「부르시는 그날까지」)였으며 “몇 발자국 뒤로/마음에서 물러나자/비로소 가난해지는 마음”(「그가 네 길을 ─칼더를 생각하며」)을 통해 “마음 잘 풀어가는 사람들”(「감히 고백하건대」)을 만나게 된 과정이었다. 사람살이의 가능성이 새벽처럼 환하게 열린 것이다.
한정옥 시인은 무릎으로 가닿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가장 신성하고 근원적인 차원을 상상하게끔 해준다. 모든 근대적 징후들이 절정이자 황혼을 맞고 있는 이때, 시인은 종교적 사유와 실천을 통해 고통을 치유하고 예술로 승화해 가는 도정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 대한 찬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구체적 외경과 긍정에서 가능했던 것일 터이다.
계시의 순간을 가져다주는 침묵의 의미
나아가 한정옥의 시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그 안에서 힘겨운 실존을 구성하는 자신에 대한 격정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운명에 대한 응시와 성찰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시의 표면에는 그의 몸속 깊이 새겨져 있을 상처의 흔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것을 다스리며 치유해 가려는 주체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관류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 속에서 자신이 겪은 실존적 경험들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깊이를 쓰는 시인이다. 그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시 쓰기의 결실이 어떤 ‘계시啓示’로 다가오는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잎 지자 시냇물 서둘러 내려가고 골짝 더욱 깊어졌습니다. 적적함을 품어 안으니 모든 것이 한갓집니다. 적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긴 바람 골짝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면 소식이 한 묶음입니다.
이들이들한 사철 잎 쇠어져 싯푸른데,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것들이 더 뻣뻣합니다. 싸리 울타리 없다면 바람 한 발 물러서겠습니까. 에둘리면 각지지 않습니다.
산에 들어 서로 위한다는 말 하도 지극해서 아래 위 가장자리 중심 따로 없으니 돌올한 아름다움만 은은합니다. 두런거리다 보면 금세 새벽달 지니 바람 사나워도 입동산立冬山을 탑니다. 산간의 접빈다례接賓茶禮, 산에선 만나는 이가 누구든 마음에 환한 창 하나 뜨지 않을까요.
― 「침묵을 우려내다 4」 전문
침묵을 오래도록 우려내면서 시인은 스스로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잎이 지고 난 후의 깊어진 골짜기에는 ‘적적함’과 ‘한갓짐’이 이미 하나다. 시인은 소식 한 묶음을 안고 다시 올라오면 산에 들어 서로 위한다는 지극한 말을 침묵 속에서 듣는다. 중심과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침묵을 품어 안고 산간은 아름다운 돌올함으로 은은하기만 하다. 그 고요한 산간에서 손님을 맞고 차를 나누는 것은 “만나는 이가 누구든 마음에 환한 창 하나” 뜨게 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의 뼈 마디마디/흰 가시로 빛날”(「침묵을 우려내다 1」) 조건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침묵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침묵이 계시와 존재론적으로 등가가 되는 순간이다.
형이상학적 열망을 이어가려는 소중한 의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것처럼, 한정옥의 시는 깊은 인생론적 사색과 신앙적 자아의 내면적 고백이 어우러진 결실이었다. 특별히 이성과 신앙이 충돌하고 의식과 무의식이 끝없이 교차하면서 그의 서정적 주체는 표층과 심층, 빛과 어둠, 현상과 본질, 문면文面과 행간을 함께 읽어가는 역동성을 양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절망 뒤에 피어나는 은혜의 심연을 느끼게 되고, 비극성 너머 있는 초월 의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독법讀法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긴장된 이중 독법을 그의 시에서 완성해 내는 것 또한 독자들이 수행해 가야 할 작업일 것이다.
이처럼 한정옥의 작품 안에는 다양한 정서적, 인지적 형질이 자연스럽게 얽혀 있다. 이때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비극성은 희망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치를 투시함으로써 그 현실과 친화하려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그의 낭만적 의지 또한 도피의 산물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지상의 삶을 견디고 감당하고 극복하려는 상상적 고투인 셈이다. 초월적 지위에서 모든 텍스트의 권위를 보장하던 ‘성스러운 말씀Word’의 권위가 부정되고 모든 것이 속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에, 이처럼 종교적 상상력을 통한 형이상학적 열망을 이어가는 한정옥 시인의 의지는 매우 귀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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