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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58966553 |
|---|---|
| 쪽수 | 136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 해설 엿보기
한영미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에는 “기시감이 다중우주처럼 차원을 달리해 펼쳐지다가/낯선 풍경으로 지워지길 여러 차례”(「잠의 세계」) 한다는 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술사는 마술이 이루어지는 모든 변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지만, 처음과 끝은 어차피 마술사의 손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마술사는 처음과 끝을 쥐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는 자다. 시인도 마술사와 유사하지만 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인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지 않고, 보이는 것 즉 “내가 아닌 물고기가/내가 되어버리는”(「시인의 말」) 과정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나이 여든에 임한 한 인터뷰에서, “나는 두 개의 끝 부분을 봅니다. 그 끝 부분은 시나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이에요. 그게 다예요. 나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을 지어내야 합니다. 만들어내야 해요. 그게 나에게 남겨진 일이죠. …… 길을 잘못 들어설 수도 있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할지도 몰라요. 다른 어떤 것을 지어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언제나 처음과 끝을 알고 있어요.”(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서창렬 옮김, 「보르헤스의 말」, 마음산책, 2015, 36쪽)라고 하였다. 이는 시인이 처음과 끝을 분명히 알지만,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기록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처음과 끝이란 ‘섬’이 물과 뭍을 아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하게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피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이란 욕망과 언어의 산물이 아니던가. 한영미의 시는 어떤 주제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찾기 위하여 거리를 걸을 뿐인 이의 움직임을 기록한 결실이다.
무대 한가운데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가 내부를 열고 빈속을 관객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를 지목해 그 안에 넣습니다 상자를 닫는 동안 한 번 더 객석을 돌아봅니다 몸을 구부려 넣는 사이 자물쇠가 잠깁니다 인사가 장내를 향해 경쾌하게 퍼집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긴 칼 꺼내 듭니다 구멍이 숭숭 사방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나씩 칼이 꽂힙니다 정면이기도 측면이기도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자를 회전시키고 뒤집습니다 비밀 따윈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마침내 소리 없는 비명이 잘려나갑니다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라고 주문을 욉니다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갑니다 실체도 없이 거대한 그가 나를 어디에나 있게 하고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칼은 탄식을 재단합니다 마술이 끝나면 나는 상자에서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닙니다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 합니다
- 「마술의 실재」 전문
이 시편은 시인이 쥐고 있는 처음이자 끝이요 그가 추구하는 시적 세계를 담고 있다. 시인은 시의 실재를 마술의 실재로, 시인의 삶을 마술사의 삶으로 보여주면서 시인의 욕망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상자 속 여자는 시인일 수도,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질료나 시어일 수도 있다. 마술사가 꽂는 칼에 잘려나가는 과정처럼 시는 자신의 것을 도려내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놓이도록 한다. 화자는 상자에 들어간 여자가 “이제 내가” 아니므로 우리는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자기 생각을 비워내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움’이 생겨나게끔 하는 과정을 함축한다. 루이스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모든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첫 번째 요구하는 것이 ‘항복’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 지식과 선입견에서 놓여날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을 사용하여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C. S. 루이스, 홍종락 옮김, 「오독」, 홍성사, 2017, 29쪽). 마술사는 여자를 상자에 넣고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라고 주문을” 외우면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가 결국 “실체도 없이 거대한 그가 나를 어디에나 있게 하고 어디에도 없게” 만들어낸다. 우리는 마술사가 헌신하는 현란한 말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하는 동시에 원래 지니고 있던 의미와 그것을 중첩해 나간다. 이처럼 시인의 역할은 마술사처럼 일상적인 것들과 관계 맺고 있는 말들을 뽑아내어 획일화된 세계와 결별시켜 새로운 의미로 생성시키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고 ‘나’는 마술사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나’가 된다. 여자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가며 무수히 많은 다른 기표들의 연속체가 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사물을 개념화할 때 그 불안정함을 이항대립에 근거하여 보충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물론 그는 이에 따른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하고자 했다. ‘선’을 설명하기 위해 ‘악’이라는 차이가 필요하고 ‘따뜻함’을 위해 ‘차가움’을 존재하게 하는 사유방식이 옳은가를 되물은 것처럼 시인도 “한 권의 책 속엔/가로로 이등분된 두 개의 시공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든 책 속엔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와/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세계의 발견」)만 들어 있을 뿐이라며 이러한 이항대립의 세계는 시인들에 의해 해체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 염선옥(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밤이 번지는 느낌은
어항이 놓아주는 물고기 같아요.
궁리할 겨를도 없이
팔딱 스며드는,
어디까지 번질까요.
내가 아닌 물고기가
내가 되어버리는
이제 그만 보내줄 때가 되었어요.
잘 가렴.
2024년 7월
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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