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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1383522 |
|---|---|
| 쪽수 | 268쪽 |
| 크기 | A5(148mm X 210mm, 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수필
AI추천 이유

탄핵의 추억
“2017년도 달력의 마지막 장인 12월 달력의 ‘20일’에 빨간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 선거 때문에 임시 공휴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일, 즉 공휴일이 되지 못했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항쟁’과 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탄핵·파면 때문이다. 실제 19대 대선 투표는 따뜻한 봄날인 이듬해 5월 9일 실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저 달력 자체가 역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다. 촛불항쟁과 대통령 탄핵·파면이라는 격동의 역사를 달력은 조용히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143쪽)
박근혜 대통령 탄핵·판면으로 ‘역사의 오류’를 담게 된 2017년도 달력, 미스터리한 백두산 정계 지도 <임진목호정계시소모>, 고등학교의 교훈비로 변신한 황국신민서사비, 스스로 자기를 노비로 파는 문서 속 소녀 순심의 손도장, 3·1운동 당시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 등, 모두 글쓴이 박건호가 모은 역사 자료다. 박건호는 자료를 수집해 그 속에서 역사를 찾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대한민국 1호 ‘역사 컬렉터’다. 역사 컬렉터는 사전에 없는 낱말로 ‘골동품 수집가’가 불편해서 그가 새로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수집하는 물건을 골동품으로 정의하기가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에서 거시적 관점의 통사 못지않게 역사 속 개개인의 삶을 살펴보는 미시 생활사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30년 동안 역사 자료를 수집해 왔다. 수집품들은 수많은 역사를 담은 거대한 저수지다. 그는 집요함과 예리함, 그리고 따뜻한 시각으로 이 저수지에서 역사를 길어 올린다. 《역사 컬렉터가 사는 법》은 역사가 묻고 수집이 답하는, 또는 수집이 묻고 역사가 답하는 둘의 아름다운 대화를 담았다. 이를 통해 역사와 수집이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미스터리한 백두산 정계 지도
조선과 청은 1712년 국경 답사 후 세운 백두산정계비에 새긴 “西爲鴨綠 東爲土門(서위압록 동위토문)” 중 ‘토문(강)’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청은 중원을 차지한 뒤에도 본거지인 만주 지방을 그들의 발상지라 여겨 성역화했다. 그런데 조선인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고 사냥을 하거나, 심지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등 청과 종종 갈등했다. 청은 양국 국경을 명확히 하자고 제안했고, 숙종 38년인 1712년 조선 대표 박권(朴權)과 청 대표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운다. 그런데 정계비가 세워지고 한동안 별문제 없다가 170년 정도가 지난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간도가 양국 간 분쟁 지역이 되었고,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가 소환되었다.
저자는 2016년 4월 하순 어느 경매에서 이와 관련한 지도 <임진목호정계시소모(壬辰穆胡定界時所模)>(컬렉터정계지도)를 낙찰받는다. 진품일까? 이게 진품이라면 백두산 정계 당시 여정을 그린 지도 최초 발견이 된다. 그는 탐구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지도 2장을 더 찾아낸다. 하나는 1890년 프랑스 공사관 통역서기관으로 조선을 방문한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당시 수집해 간 우리나라 고서 가운데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라는 지도책에 실려 있는 <임진목호정계시소모>(모리스쿠랑정계지도)다. 다른 하나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여지도(輿地圖)》라는 지도책 속에 있는 <임진목호정계시소모>(규장각정계지도)다.
비슷하지만 이 지도들은 크기, 지명 표기, 묘사 등에 차이가 있다. 특히 진품 여부를 가를 ‘토문강’ 표기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컬렉터정계지도가 토문강은 “圡门江”이라고 정확히 표기한 반면, 규장각정계지도는 “玉門(옥문)”, 모리스쿠랑지도는 “玉關(옥관)”으로 표기했다. 후대에 베껴 그리면서 ‘토’를 ‘옥’으로, ‘문’을 ‘관’으로 잘못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도들이 만들어진 순서는 컬렉터정계지도-규장각정계지도-모리스쿠랑정계지도가 될 것이다. 그림과 글씨 수준 역시 컬렉터정계지도가 가장 뛰어나다. 컬렉터정계지도는 그림이나 글씨가 가장 세밀한 편으로, 백두산 천지 표현만 보더라도 먹으로 대충 칠한 다른 지도들과 달리 천지의 일렁이는 물결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컬렉터정계지도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에 그려진 것이 맞을까? 저자는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최근에 발견된 역사 기록에 부합하지 않는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 어느 역사 컬렉터의 좌충우돌 기록이다. 저자는 이 좌충우돌의 역사 자료 수집기를 통해 모르는 역사를 새롭게 공부할 수 있었고, 인생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술집에서 만세를 부르는 남자들
2015년 광복절을 약 두 달 앞둔 6월에 저자는 온라인 경매에 올라온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남자 십여 명이 태극기 두 장을 배경으로 술집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사진인데,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마치 “조선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것 같다.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경매에 참여해 5만 원에 낙찰받았다. 며칠 뒤 우편으로 도착한 사진을 확인하니, 국민복을 입은 남성이 여럿인 걸로 보아 태평양전쟁 이후, 즉 1940년대에 촬영한 게 분명했다. 남성들 중간중간에 있는 여성들은 복장으로 보아 일본 여성 같은데, 이 술집에서 일하는 접대 여성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뒤에 걸려 있는 태극기가 뭔가 이상했다.
아뿔싸! 분명 컴퓨터 화면으로 보았을 때는 태극기였는데, 실물을 보니 사진 위에 손으로 선 몇 개를 그어 그린 태극기였다. 즉, 사진 속 태극기가 아니라 사진 바깥에서 누군가가 가필해서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것이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저렇게 그려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로써 내가 했던 모든 추측은 다 뒤집혔다.
이게 원래 일장기라면, 1940년대 당시 전시 상황에서 이렇게 환하게 축하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생일이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였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표정이 너무 격하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나 필리핀을 함락했다는 뉴스를 듣고 환호하는 것은 아닐까? 단 몇 개의 선으로 사진이 담고 있는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일장기일 때는 일본군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진이 될 수 있고, 몇 개의 선을 쓱쓱 그려 넣어 태극기를 만들면 일본의 패망과 해방의 기쁨을 상징하는 사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매의 눈으로 날카롭고 정교하게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
수집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안목을 기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벼려야 하고, 늘 인내해야 하며, 기회가 왔을 때 주저없이 결단해야 한다. 이 책은 이 세 기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한 역사 컬렉터의 고군분투기이기도 하다.
책 자체가 하나의 컬렉션
박건호의 전작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2020)와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2023)가 수집보다 역사에 중심을 두었다면 이 책은 거꾸로 역사보다 수집에 중심을 두었다. 강연이나 독자와의 만남에서 수집에 관한 질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 책에는 그가 모은 60여 점의 역사 자료가 컬러 사진으로 실려 있다. 책 자체가 하나의 컬렉션인 셈이다.
책에 실린 컬렉션을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듯이 박건호가 모으는 자료는 색다르다. 오래되고 유서 깊은 서화와 각종 기물로서 희소적·미술적 가치를 지닌 물품인 ‘골동품’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무엇을 수집하는가?’라는 질문에 역사적 의미와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은 자료, 역사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자료, 벼락같이 ‘발굴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자료, 프로파간다를 통해 사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자료들을 수집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수집품에서 역사를 끝까지 추적해 들리지 않았던, 묻혀졌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끝내 수면 위로 끌어올린 힘은 여기에서 출발한다”(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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