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체육 시간
한배가 띄워졌네
‘큰 아이’가 되는 길
촉바람과 오늬바람을 잡아라
경성연합소
기습 경보
잇고도 할 줄 모르는 자랑
좌궁수는 불길하다
궁술(弓術)이 궁도(弓道)가 되어도
만월(滿月)
만작(滿酌)
해설
질곡의 운명을 떨치고 주체적 삶으로 잇는 날 선 활쏘기
—김홍정(소설가)
작가의 말
[본 문]
“좌궁수는 불길해!”
오른손으로 줌통을 잡아 태산을 밀듯 앞으로 버티고, 왼손으로 호랑이 꼬리처럼 펴서 시위를 잡아 끌어당겼다. 밀고 당기는 힘이 거의 같았을 때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며 지사(遲射)했다. 깍짓손을 놓을 때 들이마셨던 숨을 내쉬면 화살은 과녁에 닿을 수 있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이지만 집중해야 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몸이 바로 알아채 화살은 과녁을 빗나가게 된다.
―「체육 시간」, 9쪽
만월과 국화는 비슷한 또래였다. 키도 비슷하고 옷차림도 비슷하고, 말할 때 습관적으로 사람을 위아래로 훑는 버릇까지 비슷했다. 국화는 안으로 들어가 두례를 불렀다. 두례는 낯선 사람의 방문에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작업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헛기침을 하면서 옷감 속으로 손을 넣으며 손님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두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경계한다는 뜻이다. 국화는 만월을 안으로 안내하는 척하면서 일이 생기면 부엌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 제일 위쪽 서랍에 숨겨 둔 걸 꺼낼 일이 없길 바랐다. 국화와 두례는 만약을 위해 집 안 곳곳에 흉기를 숨겨 두었다.
―「체육 시간」, 24~25쪽
치사했으나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꼴찌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것도 해 보면 여러 번 해 본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중략…) 아쉬운 게 있을 때는 비굴해도 참아야 한다는 게 만월의 원칙이었다.
“이보게, 프렌드.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 내가 일주일 동안 화장실 청소할게. 아니면 기숙사 청소를 대신 해 줄까?”
“일주일이 아니라 이 주일.”
“그러면 거래가 성사된 거야. 딴소리하지 마. 나도 이 주일 동안은 참아 볼게.”
그렇게 만월과 여경의 거래가 오갔으나 활을 배우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겨우 활시위를 당겼을 때는 상사점도 몰라 대충 당기면서 쏘았다. 화살은 과녁을 아예 빗나가 뒤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한참 과녁에 못 미쳐 연전길 근처에 떨어졌다. 만월은 화살을 주우러 갈 때마다 분노의 대상자를 찾아 씩씩거렸다.
―「한배가 띄워졌네」, 37~38쪽
“여경, 봤지? 아니 들었지? 관중한 거 말이야.”
“운무 때문에 잘 모르겠어.”
“이보게, 프렌드. 프렌드를 믿은 나를 배신할 셈인가?”
“무슨 소리야? 운무가 이렇게 끼었는데 어떻게 알아?”
“희미한 안개 속에서 들리는 용의 울음소리를 외면하는 프렌드라? 상당히 의심스러워.”
만월이 여경의 주변을 맴돌며 자꾸 되물었으나 여경은 끝까지 만월을 외면했다. 여경은 분명 화살이 과녁에 맞는 소리를 들었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모른 척했다. 본 걸 말해도 보지 않은 게 되는 세상이었다.
―「‘큰 아이’가 되는 길」, 61~62쪽
“어머니, 학교에서도 재봉 시간이 늘었어요. 국화도 군복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요.”
“국화는 안 된다. 만주에 가도 소용없어.”
두례는 마지막 말에 멈칫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재봉질했다.
(…중략…)
“군복을 만들지 않으면 재봉틀을 공출해 간다고 한단다. 그러니 네가 와도 일을 멈출 수 없단다.”
드르륵, 드르륵.
“그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러고 쉬시면 되잖아요.”
드르륵, 드르륵.
두례의 편을 들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만월도 민망했다. 편을 들지 않으면 두례가 재봉틀 안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학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기류가 달라지고 있었다. 일본은 재봉틀까지 빼앗아 전쟁터로 보내고 있었다.
―「촉바람과 오늬바람을 잡아라」, 83~84쪽
국화가 사라졌다. 내재봉소에도 오지 않았다. 두례는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듯 사라진 국화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국화가 사라진 뒤로는 만월도 자꾸만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기습 경보」, 143쪽
기숙사 안에서는 큰 아이부터 다른 학생들까지 국화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월은 그들이 내뿜는 불길한 숨소리에서 국화가 스스로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디론가 끌려갔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기습 경보」, 144쪽
만월은 집을 떠나올 때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다. 절대로 원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고향에서는 아주 먼 이야기였다. 고향에 경성의 일들이 내려앉을 때쯤이면 세상이 변하고 또 변해 있었다.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느끼려면 경성에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오로지 빵을 굽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처럼 만월도 꿈을 위해 이곳에 남아야 했다.
―「잇고도 할 줄 모르는 자랑」, 156~157쪽
“사범이 왜 죽었을 것 같은가? 일본이 아닌 사랑을 선택해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운명이 달라졌단 말이야. 만월, 잘 생각해. 여기는 교장 선생님과 나, 너. 셋만 있어. 너는 이미 살인범으로 용의선상에 있어서 네 선택에 따라 미래가 달라져. 조선? 국궁? 포기하면 돼! 어차피 일본 대제국이 조선의 전통 따위에 굴복하겠는가?”
“궁술이 궁도가 된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실 따위를 따지는 건가? 그딴 것은 없어!”
(…중략…)
아카시와 교장은 살모사의 눈빛이었다. 절대 바뀌지 않을 살기를 내뿜는 살모사였다.
“응하지 않으면 만월을 없애야지. 무슨 뜻인 줄 아는가?”
“모릅니다.”
“고향에 있는 빵집을 없앤다거나 지금 여기에 있는 만월을 전쟁터로 끌고 가면 돼. 우리에게는 특권이란 게 있지. 이래도 반항할 텐가?”
―「만작(滿酌)」, 291~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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