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추천사
들어가는 글
1장. 보통 사람을 위한 조직신학_조직신학 서론
목사도 교수도 아닌데 왜 내가 신학을 알아야 하나?
조직신학이 뭐길래?
조직신학은 순서가 있는가? 아니면 순서 없이 막 공부해도 되는가?
신학적 도미노
조직신학은 이성으로 하는가? 믿음으로 하는가?
조직신학은 삶의 변화의 시작이다
2장. 알파와 오메가_성경론
조직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기록된 성경 말씀이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지만, 모든 원리는 다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썼으므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오류는 있지 않을까?
팥빵의 팥
꿈과 환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3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_신론
유신론 vs. 무신론
무한성 vs. 유한성
초월성 vs. 내재성
통일성 vs. 다양성
계획성 vs. 무계획성
자유 보장 vs. 자유 침해
4장.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_인간론
인간만 압도적으로 특별하다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행할 수 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죄인이라고 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하더라
5장. 정말로 다행이다_기독론
정말로 다행이다
정말로 최악이다
정말로 찝찝하다
정말로 압도적이다
정말로 은혜다
정말로 기대된다
6장. 은혜 위에 은혜러라_구원론
은혜와 공로
부르신다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믿게 하신다
의롭다 칭하신다
거룩하게 살게 하신다
끝까지 책임지신다
7장.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_교회론
교회는 몸이다
교회는 상처다
교회는 예배다
교회는 말씀이다
교회는 성례다
교회는 교제다
8장.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_종말론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
왕의 귀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새 하늘과 새 땅
창조와 재창조
나가는 글
[본 문]
이 책은 조직신학 책입니다. 조직신학은 곧 교리입니다. 교리는 신앙의 ‘뼈대’ 역할을 감당하지요. 뼈대가 흔들리면 사람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뼈대가 휘청휘청하는데 그 누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비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요령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뼈대가 튼튼해야 합니다. 조직신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 책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신앙의 뼈대만큼은 ‘보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탁월해지길 소망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이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앙의 뼈대가 굳건히 잡히고 신앙의 골격이 점진적으로 튼튼해질 줄 믿습니다. 바른 조직신학은 이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_‘들어가는 글’, p. 12
신학을 하는 이유는 삶을 세우기 위함이다. 삶을 세우는 게 도대체 뭘까? 바로 ‘변화’다.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학을 ‘하기 전’과 신학을 ‘한 후’는 반드시 달라야 한다. 다름이 핵심이다. 삶의 다름이 있어야 한다. _‘1장. 보통 사람을 위한 조직신학’, p. 39
성경은 그 어떤 첨예한 현대적 이슈들이라도 그 각각의 이슈들에 대해 능히 파훼법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이슈가 되었든 각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조망할 수 있는 원리를 능히 제공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언제나 본질의 핵심을 건드리는 궁극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현대적 사안과 이슈를 분별하는 기준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이다. 본문에 나타난 또 다른 표현으로 이를 묘사하자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랴”이다. _‘2장. 알파와 오메가’, pp. 55-56
인간이라면 다 유신론자다. 하나님을 본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신론자다. 관건은 어떤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느냐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종교성이 충만한 존재다. 그러므로 최소 인간이라면 무슨 신이든 반드시 신을 섬기고 살아야만 한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 자체를 신으로 섬기고 산다. 알코올 의존자는 알코올을 신으로 섬기고 산다.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신으로 섬기고 산다. (…) 핵심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종교인’이라는 뜻이며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예배자’라는 뜻이다. 참된 하나님께 예배하든, 아니면 다른 헛된 신에게 예배하든 사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예배하며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유신론자다. _‘3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p. 84
말세의 고통에 대해 논하는 이유는 비관주의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다. 패배주의에 빠지자는 말도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말세의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모든 인류가 간절히 찾을 그 하나의 온전한 소망이 더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말세로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 큰 소망이요, 큰 위로며, 큰 평안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이다. _‘5장. 정말로 다행이다’, pp. 152-153
어떤 사람은 복음은 불신자나 초신자 정도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큰일 난다. 절대 아니다. 복음은 구원을 받을 때도 필요하며,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필요하며,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의 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_‘6장. 은혜 위에 은혜러라’, p. 197
참된 신자라면 이제 힘들어도 산에 올라가야 한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다 보면 신앙의 근육이 생기고 신앙의 심폐지구력이 강화된다.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산을 능숙하게 탈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기고 험산 준령의 지리까지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의 실력이 쌓이다 보면 지는 습관이 이기는 습관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_‘6장. 은혜 위에 은혜러라’, pp. 225-226
생각해 보자. 서로 다른 눈금과 각도와 준을 가지고 있는 나침반을 저마다 각각 가지고 있다면, 과연 최종 목적지까지 같이 갈 수 있을까? 각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가지고 출발하면 반드시 서로 다른 목적지로 향해 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신학이 중요하다. 신학을 체득화해서 입술과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 ‘신앙 고백’이다. 그러므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만 교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고백하지 않는 한 절대 ‘한 몸’이 될 수 없다. _‘7장.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p. 237
기독교의 종말론은 ‘절망’의 순간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복스러운 소망’에 대한 한없이 복스러운 논의다. ‘복스러운’이라는 번역의 헬라어 단어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인데 그 뜻은 ‘행복한’(happy), ‘복된’(blessed), ‘행운의’(fortunate) 등으로 밝은 이미지를 한껏 가지고 있는 단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어두컴컴하지 않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밝다. 행복하다. 복되다. 기다려진다. _‘8장.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p. 272
사실 신학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감성적으로는 부딪혀도, 감성적으로는 따라가기 싫어도, 감성적으로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성경이 말하면 겸비한 자세와 태도로 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좋은 신학이다. _‘8장.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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