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들어가며. 우리는 왜 좁은 길 앞에서 망설이는가
Part 1. 이 시대가 열광하는 넓은 길을 떠나다
― 사방이 은혜로 둘러싸인 좁은 길의 실체
1. 허망한 길에서 멈춰 서는 용기
2. 환상으로 버무려진 ‘행복’의 진짜 의미를 찾아서
3. 의로움을 뽐내고 싶은 욕망의 사슬을 끊다
막간. 기도 없이는 한 발도 뗄 수 없는 길
Part 2. 좁지만 생명 충만한 예수의 길 걸어가기
― 일상에서 피어나는 진짜 제자도
4. 소금과 빛으로 세상 한복판에 스며들다
5. 내 분노의 뿌리를 성령께 내드리다
6. 거짓의 유혹 넘어 진실한 삶과 말을 지켜 내다
7. 성(性), 욕망의 소비가 아닌 언약적 사랑으로 누리다
8. 불안으로 움킨 손을 펴 돈의 신전에서 벗어나다
9. 염려의 짐 내려놓고, 채우시는 아버지 손을 붙잡다
10. 판단의 칼날을 거두고 내 마음을 살피다
11. 하나님의 뜻, 친밀함 속에서 분별하고 행하다
12. 사랑하기 힘든 이들, 예수의 긍휼로 사랑하다
나오며. 흔들림 없이 끝까지 나아가는 비결, 순종
감사의 글
주
[본 문]
<30쪽 중에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은 잔인하다기보다 명확하신 것이다. 그분은 의사 결정의 피로함으로 옴짝달싹 못 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대부분의 사람은 좁은 길과 넓은 길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읽을 때, 선한 도덕과 나쁜 도덕의 대립, 혹은 내세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좁은 길은 ‘선한’ 이들이 택하는 길이고, 넓은 길은 ‘악한’ 죄인들이 선호하는 길이다. 좁은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지만, 넓은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은 그런 관점이 아니다. 물론 지금 당신이 선택하는 그 길은 영원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빚으시길 원하신다. 그럼으로써 그분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삶의 본질적 특성을 증언하게 하신다. 넓은 길은 예수님의 법칙과 길 바깥에 있는 삶이고, 좁은 길은 예수님과 세상의 통념을 뒤엎는 그분의 지혜 앞에 엎드리는 삶이다.
<34-35쪽 중에서>
예수님은 절대 행동만 교정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에 관심을 두신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영성은 거부하신다. 내면 성찰이 없는 행동 교정은 (긍정적인 방향일지라도) 우리를 노예로 만들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온갖 옳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이유나 방법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할 수 있다.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단지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으려고 도와주는 게 어떤 건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나는 하나님이 시키셔서가 아니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당할까 두려워 진실을 말하는 상황에 익숙하다.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기에 온갖 초대에 “예”라고 말하는 데 능숙해졌다.
넓은 길은 ‘옳은’ 것을 믿고 ‘옳은’ 일을 하는 데 만족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면 자신의 동기를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105쪽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두운 곳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기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그곳에 우리의 빛을 비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어둠에서 분리되고 단절된 채로 예수님의 빛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실상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분리되어 살고 있다.
우리의 거리 두기 이면에는 대개 두려움이 숨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오염되고 싶지 않다. 개인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일부 교회 전통에서는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것을 위협으로 여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전통 중 상당수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답답한 이분법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초대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친구가 아니라 전도 대상일 뿐이다.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보라.
<126쪽 중에서>
보통 화를 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분노가 우리를 파괴하고 집어삼키게 내버려둘 당연한 이유란 없다. 나는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말로 표현하는) 애통이라는 실천법이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는 우리 마음 문을 닫고, 애통은 그 문을 열어 준다. 애통은 불쾌함을 무시하는 대신 마음속에 자리를 만들어서 성령이 우리 마음을 돌이키고 분노의 근원에 이를 수 있게 한다. 분노의 뿌리가 대부분 슬픔이라는 사실에 당신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기 예배와 믿을 만한 친구들과의 대화에 반드시 애통하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한다. 애통과 짝을 이룬 분노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능력에 이르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분노를 정직하게(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대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법, 곧 사랑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163쪽 중에서>
누군가를 매력적으로 느끼거나 성적인 친밀감을 원한다고 해서 정욕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그런 상태가 되려 하지 않았다면 성적 흥분도 정욕이 아니다. 유혹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욕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정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다.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면 경계심은 편집증으로 변하고, 억압하는 행위는 결국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고 만다. 수치심에 기반한 성 신학을 가진 많은 사람의 목표는 성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성욕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성 윤리는 억압이 아니라 새롭게 질서가 잡힌 성 윤리다. 예수님은 우리가 갈망을 있는 그대로(평범한 인간의 욕망으로) 보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욕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따라 움직이기를 요구하신다. 우리 삶을 이런 방식으로 내드릴 때 은혜가 임한다.
<231-232쪽 중에서>
성찰 기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돌아보는 데 도움을 주는 영성 실천이다. 어떤 전통에서는 정오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멈추어 반성하는 이 시간을 갖는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에 두는 영성 접근법으로, 꾸준히 고백하고 회개하는(판단주의에 대항하는 두 가지 실천)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은, 특히 우리가 성급하거나 일관성이 없을 때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은혜와 다가올 날에 대한 힘을 얻을 기회를 준다. 나는 성찰 기도를 할 때 다음 네 가지 질문을 활용한다.
* 나는 오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았는가?
* 내 불안한 생각을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앞에 가져왔는가?
*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집중했는가?
*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죄가 있는가?
간단한 이 기도를 실천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살피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찾을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깨달았다. 판단을 보류하는 것은 예수님의 좁은 길의 일부지만, 이 길을 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길은 궁극적인 심판자가 따로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자기 성찰을 선택할 때 우리가 하나님처럼 볼 수 없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그분께 겸손하게 우리의 판결을 넘겨드려야 한다.
<262-263쪽 중에서>
독자들 중에는 원수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여기서 잠깐 멈춰서 명확히 해 두는 편이 좋겠다. 당신에게 원수가 있는 건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인가? 예를 들면, 내가 새 신자였던 시절 첫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동료들과 논쟁을 벌이고 종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모욕하고 수동 공격적 행동을 보였다. 당연히 적이 생겼다. 그 결과 그들이 나를 비꼬거나 내 신앙을 조롱했을 때, 나는 내가 예수님께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다음 세 가지 간단한 실수로 일어난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례하게 행동한다.
2.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주목한다.
3.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주장한다(걸핏하면 종교 박해라고 거세게 항의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것과 같은 종류의 원수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있는 적들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지 아닌지를 드러낸다. (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올바른 종류의 원수란 우리가 힘없는 이들에게 이 세상 것이 아닌 사랑과 관심을 쏟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잘못된 종류의’ 원수를 종종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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