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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72070687 |
|---|---|
| 쪽수 | 11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최준 시집 『닭』. 최준의 세계에는 전망이 없다. 전망이 어둡다. 그리하여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사회적 고통의 부정적 진실을 충실히 드러낼 뿐이다. 시집 『닭』은 ‘우리의 삶에는 전망도 역전도 없다’며 헛된 희망으로 절망을 포장하지 않고, 어둠을 외면하지도 않으려는 자의 기록이다.
전망도 역전도 없는 삶에 보이는 건 오직 적막한 발자국뿐
- 최준 시집 『닭』
정선 출신 최준 시인이 신작 시집 『닭』을 펴냈다. 달아실시선 98번으로 나왔다.
이 시집은 한마디로, 전망이 없는 세계에 관한 기록이다. 닭이라는 존재를 빌려 인간의 조건을 비추고, 닭장 같은 어둠 그대로를 드러낸다. 희망을 말하지 않는 대신 세계의 진실을 직시한다.
최준의 세계에는 전망이 없다. 전망이 어둡다. 그리하여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사회적 고통의 부정적 진실을 충실히 드러낼 뿐이다.
어두운 쪽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살았어
어두운 쪽은 늘 어두운 쪽이었는데
어두운 쪽을 밝은 쪽으로 바꿔보려 했었어
그건 햇빛을 거둬들이는 일
몇 날 며칠 햇살 끝을 끌어다가
어두운 쪽에 쟁여놓아도 어두운 쪽은
어두운 쪽이었을 뿐
내 세상 한 곳이 어두워 있었어
그게 늘 불만이었는데
이따금 세상의 모래톱에 몸을 묻었어
여름의 뜨거운 모래톱에 몸을 묻으면
아뜩한 현기증 속으로 세상은 한동안씩
흐름 멎어버리곤 했어
봄부터 예견했던 우기가 오고
비만 내렸어 내 집과 모래톱이
하룻밤 새 쓸려 내려갔지
오래됐지만 기억하고 있어
어두운 쪽은 늘 그렇게
어두운 쪽이었던
가끔 세상을 조깅하거나
날아오르려 기 쓰고 날개 퍼덕거릴 때에도
어두운 쪽은
언제나 어두운 쪽으로
- 「어두운 쪽은 어두운 쪽으로」 전문
빛을 끌어와도 어둠은 변하지 않는다. 이 단호한 결론은 시집 『닭』 전체를 지배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개인적 정서가 아니라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세계가 이처럼 어둡게 규정된다면, 그 구조는 바뀔 수 있는가. 시인은 이 물음에도 간단히 답한다. “역전은 없다”.
불불에 구워진다
물에 잠겨 삶아진다
빈 뱃속에
찹쌀과 대추와 밤이
여섯 해 그 모둠발로 땅의 힘 움킨
인삼이 채워지고
무명실로 꿰매어진다
파 마늘과 소금을
식탁 앞에 늘어놓고
그대는 기다리고 있다
즐거운 포식의 시간이 어서 오기를
포식자인 그대와
피식자인 나
먹이사슬의 질서 유지를 위해
기 쓰고 현 위치 사수한다
나는 역전을 꿈꾸지 않는다 안다
생은 끝끝내 내게
역전은 없다
- 「역전을 꿈꾸지 않는다」 전문
닭이 식탁 위에서 소비되듯, 관계 혹은 질서는 철저히 고정되어 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다시 확인되는 것은 역전의 부재, 그리고 전망의 부재다.
그렇다면 전망도 없고, 역전도 없는 삶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여기서 삶을 버티는 흔적에 주목한다.
더러운 곳에서 산다는 생각도 없이 살아간다
가두는 손 있으면 가두어지고
주면 주는 대로
굶기면 굶는 대로
그렇게 살다 가면 그뿐
버팀으로 무리 이루어
동시대를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들 곁에서 사라진 나를
발견하리라
오래 걸어 부르트고 굳은살 박인
불구의 발바닥 내려다보면서
지난 세월을 울리라
눈물 마른 가슴을 쪼며
- 「불구의 발바닥」 전문
발바닥에 남은 굳은살만이 삶의 흔적을 증명한다.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몸에 남겨진 흔적이 삶이 지속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반복되는 고단함은 다른 시들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날은
현실이 지나치게 꼬여 있다는
내부가 얽히고설켜
도저히 풀 길 없다는 생각
도막도막 끊어내어
다시 조립하고 싶다는,
(중략)
남는 건 절망과
부정뿐이라는,
- 「일상들」 부분
가슴 헤집는 칼날이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 고통의 실체
어떤 이름으로 불러줘야 할지
어쩌다 고통 없는 날일 때,
고통과 고통의 사이 드넓어질 때, 고통이
언제 다시 올지
도통 알 길 없을 때,
마음은 폭풍경보 내려진
해안마을처럼
초조하다 차라리
오고야 말 고통이 기다려진다
- 「부대낌 없이」 부분
『닭』의 세계에서 일상은 얽히고 꼬여 풀리지 않고,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을 흔든다. 그러나 끝내 남는 것은 울음을 삼키는 반복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통을 기다리며 감내하는 태도다.
시집 『닭』은 ‘우리의 삶에는 전망도 역전도 없다’며 헛된 희망으로 절망을 포장하지 않고, 어둠을 외면하지도 않으려는 자의 기록이다.
독자들은 이 시집에서 위로나 탈출구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차갑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읽어내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최준은 희망을 덧붙이지 않는 문장과 반복되는 고단함 속에서 묻고 있는 것이리라. 이 냉혹한 현실을, 당신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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