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머리말
[1] 냉면이란 무엇인가
[2] 냉면의 전사前史
⚫ 신라의 냉면-진흥왕의 전설
⚫ 고려의 냉면
《고려도경》의 국수|사원의 국수| 이색의 도엽냉도
[3] 조선 전기의 국수
⚫ 15세기의 국수 조리법, 《산가요록》의 국수
메밀로 만든 음식들|면법, 일곱 가지 종류의 국수 조리법| 세면과 창면|
국수 7종의 재료와 제조 방식| 《산가요록》 국수의 전승
⚫ 이문건이 먹었던 국수와 뜻밖의 ‘차가운 국수’
《묵재일기》의 국수|국수의 재료, 밀가루와 메밀가루| 뜻밖의 차가운 국수
[4] 국수에서 일어난 변화와 국수틀의 출현
⚫ 《음식디미방》 등 조리서에 나타난 국수의 변화
《음식디미방》 속 국수| 《요록》과 《주방문》에 담긴 국수|세면과 창면, 차가운 국수의 탄생| 〈자줏빛 장물에 말아낸 냉면〉
⚫ 국수틀과 새로운 제면 방법
국수 만드는 방식의 변화|국수 재료, 메밀가루로 단일화되다|
메밀국수는 국수틀에 눌러 뽑아야 맛이 좋다| 국수틀은 이런 모양이었다|
서울식 국수틀과 평양식 국수틀| 국수틀, 출현하다|국수틀, 확산되다
[5] 냉면의 시작
⚫ 평안도에서 시작된 동치밋국 냉면
메밀국수, 동치밋국에 들어가다| 18세기 중반, 평안도에서 냉면은 유명했다
⚫ 황윤석이 서울에서 먹었던 냉면
《이재난고》에 기록된 냉면|국수가게도 있었다| 여름철에 냉면을 어떻게 먹을 수 있었을까
[6] 냉면의 확산
⚫ 정약용의 냉면
‘눌러 뽑은 국수는 붉은 실이 차갑고’| ‘눌러 뽑은 냉면에 배추김치 푸르네’
⚫ 19세기 각 지방의 냉면
냉면, 전국으로|평안도, 냉면은 평안도 지방의 특미|
함경도, 함경도 냉면도 동치밋국에 말아 먹는 메밀국수|
강원도, 냉면이 널리 퍼져 팔리고 있더라| 황해도, 평양 못지않게 냉면이 맛있는 지역|
서울, 평안도와 황해도의 냉면이 흘러들어오다| 남쪽 지방으로의 확산
⚫ 국수틀의 보급
값비싼 기구도, 갖추기 어려운 도구도 아니었다| 남쪽 지방에서 국수틀은 흔치 않은 도구
⚫ 냉면의 상업화
냉면가게, 냉면 상업화의 방증|냉면장수, 시장에서 냉면을 팔다| 국수의 건면화와 상품화
⚫ 조리법의 변화
냉면, 경화세족 가문에 침투하다| 고조리서에 담긴 조선시대 냉면 재료와 조리법
[7] 근대 이후, 냉면의 시대
⚫ 근대와 외식업
외식업의 본격적 출현|근대 외식업은 19세기 음식점의 연장|
냉면, 시정에서 가장 선호하던 음식 중 하나
⚫ 냉면점의 성황 176
서울, 냉면의 대중화|평양과 평안도, 대표적인 냉면 지역|
황해도, 평양냉면 못지않은 진미|함경도, 그럴듯한 냉면을 뽐내다|
강원도, 막국수 지역이지만 냉면점도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냉면점이 극히 드물지만 없지는 않았다|
해외 진출, 한국인 따라 냉면도 흩어져(러시아, 중국, 하와이)| 민족의 음식 냉면
⚫ 근대식 도구의 조력, 자전거와 전화 그리고 냉면기계
전화와 자전거의 도입|냉면기계의 발명
⚫ 냉면에 일어난 변화
겨울냉면과 여름냉면|생치냉면과 가정냉면| 가성소다와 아지노모도
⚫ 냉면 식중독
중독의 양상과 원인|예방과 치료|식중독 사례
⚫ 냉면값
냉면 가격, 물가와 재료값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총독부, 가격과 양을 정하다
⚫ 면옥 노동자와 면옥노동조합
면옥 노동자와 냉면배달부| 면옥노동조합의 활동
[8] 8·15 해방 이후의 냉면
⚫ 각지의 냉면점
해방 후 음식점의 폭발적 증가|서울의 냉면점|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의 냉면점| 전라도, 제주도의 냉면점|경상도의 냉면점
⚫ 냉면기계 판매
냉면기계 제작·판매 광고의 등장| 서울의 냉면기계 제작소
⚫ 냉면 식중독과 단속
⚫ 냉면의 분화
⚫ 끝맺음
⚫ 후기
⚫ 주석
⚫ 찾아보기
[본 문]
신라 진흥왕이 어느 여름날 북부 국경 지대로 순찰을 나갔다. 무더위에 가지고 갔던 궁중 음식이 모두 상해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이 산속에 사는 화전민의 음식인 메밀국수에 얼음 두어 개를 띄워 진흥왕에게 올렸다. 이것이 냉면의 시초라는 이야기다.(22쪽)
고려시대에 만두를 먹었다는 기록은 몇 있지만, 국수를 먹었다는 기록은 아주 드물다. 앞서 말한 송의 사신 서긍 이후 고려 말 이색에게 와서 비로소 국수를 먹었다는 말이 보인다. 그는〈점심[午飧]〉이라는 시에서 “흰 국수는 향기로운 국물에서 매끄러운데, 쇠한 창자에는 냉기가 서렸구나”라고 했다. 흰 국수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점심으로 ‘차가운’ 국수를 먹은 것은 분명하다.(27쪽)
15세기 조리서에서 국수를 만드는 재료는 밀가루가 압도적이었다.…메밀가루는 밀가루가 대체할 수 있었고(육면, 만이창면), 메밀은 기장이 대체할 수 있었다(진주면)…만드는 방법은 칼국수 방식, 곧 절면법切麵法이 일반적이다.…적어도《 산가요록》이 쓰인 1450년까지는 국수틀을 이용해 국수를 길게 내려 뽑는 제면 방식은 없었다.(30쪽)
《묵재일기》 1558년 4월 20일 조에 “낮잠을 자다 깨어 곧 ‘냉면’을 먹었더니 발바닥이 차가와졌다”는 말이 나온다.…‘냉면’이라는 낱말이 한국 음식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이다.…다만 차게 해서 먹는 국수는 《산가요록》에 이미 등장했다. 수라화, 만이창면, 토장은 모두 국수를 찬물에 여러 번 헹구는 등 아주 차게 만들어 초장이나 참깨즙, 들깨즙에 말아 먹는 국수였다.(63쪽)
《음식디미방》의 세면은 얼음물에 담가 둔 국수를 오미자 차에 만 차가운 국수였고, 창면은 오미자차에 얼음을 둘러서 먹는 국수였다.…오미자 물은 붉으나 옅은 자줏빛에 가깝다.…장유가 〈자줏빛 장물에 말아 낸 냉면〉을 쓸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국수는 세면이었다고 하겠다.(76쪽)
메밀국수를 만드는 데 세판을 도입한 것은, 국수 재료인 곡물가루가 메밀가루로 단일화하는 길을 걸었기 때문인 듯싶다.…이 찰기 없는 재료로 보다 편리한 방법으로 국수를 뽑고, 보다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겼을 것이다. 이 압박으로 인해 세면을 만드는 ‘면본’ 혹은 ‘가는 분판’을 도입하게 된 것일 터다.(87쪽)
평안도 같은 데는 여름보다 겨울냉면을 더 맛이 있고 운치 있는 것으로 알지마는, 서울에서는 여름철에 냉면을 많이 먹는다. 아니 평안도에서도 실제 많이 먹기는 여름이다.…국수의 누르는 방법도 평양식과 서울식이 다르다. 서울에서는 ‘분紛 굉이’ 위에 여러 사람이 타고 앉아서 내리누르지마는, 평양에서는 새다리[梯子] 같은 것을 놓고 한 사람이 ‘분紛 공이’ 위에다 등을 대고 거꾸로 매달려서 그 새다리를 한 칸 한 칸씩 발로 뻗디디며 누른다.(93쪽)
북경을 가고 오는 동안 국수틀로 국수를 뽑기도 한다는 점과 밀가루 국수보다 맛있는 메밀국수가 있다는 점은 조선 사신단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추측건대 평안도식 국수틀은 중국에서 본 국수틀을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평안도 지방, 특히 평양에서 냉면이 시작된 이유일 듯하다.(98쪽)
차가운 동치밋국에 만 냉면은 평안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냉면의 구체적 모습을 묘사한 자료는 홍경모洪錫謨(1781~1857)가 남긴 시가 처음이다.…홍경모는 김경서의 혼을 부르는 장편시 〈의초擬招〉를 썼는데, 그 시에서 사용한 ‘박탁餺飥’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나라 풍속에 국수를 ‘동저凍菹’ 국물에 말아 박탁을 만드는데, 서주西州에서 유명하다”라는 주석을 달았다.(105쪽)
1769년 7월 8일 서울에서 국수를 사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황윤석은 전날 있었던 절일제節日製에서 2등으로 뽑혔다. 왕은 장원과 2·3등 모두를 직접 만나겠다고 했다. 이에 황윤석은 대궐 아래 숙배청으로 가서 1등과 3등으로 뽑힌 이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하인에게 국수를 사 오게 해서 요기를 한다.(112쪽)
18세기 중반 이후 평안도와 황해도에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국수, 곧 냉면이 널리 퍼져 있었음은 분명하다.…냉면은 서울의 경화세족인 홍경모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혹은 서울 정약용의 집에서도 냉면을 먹었다. 냉면은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다시 경기도 혹은 서울로 확산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121쪽)
진찰이 끝나고 영부사領府事 정원용과 철종이 대화를 나눈다.…“삼가 듣건대 지난 칠석날 냉면과 전복을 너무 많이 드시어, 급체 증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수저를 한 번 들 때마다, 잠자리에 한 번 들 때마다 반드시 조심하고 신중하게 하신다면, 어찌 질병이 찾아올 리가 있겠습니까?”(138쪽)
이광수는 1930년에 쓴 〈남유잡감南遊雜感〉에서 “충청도 이남으로 가면 술에는 막걸리가 많고 소주가 적으며 국수라 하면 밀국수를 의미하고 서북에서 보는 모밀국수(메밀국수)는 전무하다. 서북 지방에는 술이라면 소주요, 국수라면 모밀국수인 것과 견줘 보면 미상불 재미있는 일이다”라고 했다. 1930년대에도 남부 지방에는 밀국수가, 서북 지방에는 메밀국수가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144쪽)
냉면은 상업화하기에 좋은 음식이었다.…국수틀로 뽑은 메밀국수는 맛이 월등하게 좋았다. 또한 국수틀로 노동력을 절감하고 균질적인 국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국수를 동치밋국에 말아서 내면 됐기 때문에 따로 국물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152쪽)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의 장시場市에서 ‘국수를 누르고 닭을 잡고 돼지를 잡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국수를 누른다는 것은 국수틀로 메밀국수를 눌러 뽑는다는 뜻이다. 이 메밀국수를 더운 국물에 말아 내면 온면, 찬 국물, 즉 동치밋국에 말아 내면 냉면이 된다.(154쪽)
20세기 초 서울 시내에 음식점이 대거 출현하면서 조선시대에 이미 상업화한 냉면과 비빔밥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등장했고,…이는 냉면이 19세기에 이미 서울과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북부 일대에서 ‘사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어 있던 결과로 보인다. 상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냉면은 20세기 근대화·도시화에 가장 빨리 반응하면서 ‘직장인의 점심’이 되었던 것이다.(175쪽)
서울 냉면점은 갈개발을 늘어뜨린 ‘냉면점 깃발’을 내걸었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0일 자 기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냉면점의 광고하는 갈개발이 벌써 춘풍에 펄펄 날리운다. 풍설風雪에 손을 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더워, 더워’ 할 여름 소식이 전한다.…”(180쪽)
냉면은 설렁탕과 함께 대표적인 배달 음식이었다. 가정 혹은 직장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었으니, 배달은 냉면 소비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배달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근대적 도구 곧 전화와 자전거였다.(218쪽)
박병천의 제면기는 특허국에 특허 신청서를 접수시켰지만,…그의 기계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에는 박병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30년 9월…평안북도 선천의 최응도崔應道는 다수의 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조선의 냉면 제조에 대해 개탄한 나머지 새로운 제면기를 발명한다. 이 새 제면기 역시 박병천의 제면기와 마찬가지로 ‘인력과 시간의 경제와 위생, 기타 개량에 실로 합리한 것’이었다.(226쪽)
예조 산하에 빙고를 두고 음력 12월과 1월에 인력을 동원하여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한 후 저장했다. 이것을 6월 초부터 9월 말까지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주었다.…관빙官氷이다.…15세기 후반 권세가들에 의해 건설된 사빙고私氷庫는 민간 장빙업藏氷業이 성행하는 18세기 이후 대폭 확산되었다. 정조 재위 기간에는 한강 연안에 사빙고가 30여 곳이나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빙고가 없어졌다.(236쪽)
얼음이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이후였다. 1909년에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부산항 근처에 제빙소를 만들었다.(237쪽)
서도 지방 명물의 하나인 냉면은 근래 사업자들이 제조의 신속을 도모하기 위하여 냉면 원료인 메밀가루를 물로 반죽할 때 약품인 세탁용 속칭 ‘떡잿물’이란 것을 섞어 넣는 일이 많다. 그렇게 하면 냉면의 분량이 많아지고 또 신속해지기 때문이나, 그것은 냉면의 원래 맛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잿물을 혼용함으로 인하여 냉면을 먹는 사람들은 십중팔구가 위장병에 걸리어 고생을 하는 예가 많다.(247쪽)
아지노모도는 매우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그 편리성은 비싼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특히 한여름에 굳이 동치미를 담글 필요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간편했겠는가.(249쪽)
《조선중앙일보》는 1935년 7월 11일 자 〈지금부터가 냉면의 중독시절〉이라는 기사에서 냉면으로 인한 식중독의 계절이 왔음을 알렸다. ‘성하盛夏에는 냉면에 중독되는 일이 많은데’, 원래 조선 음식점은 설비가 불완전하므로 아무리 주의해서 먹는다 해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균을 위해 식초 같은 것을 많이 쳐서 먹지만 그 역시 위장에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256쪽)
음식점 업자들은 값을 올릴 수 없을 경우 양을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매일신보》의 1940년 11월 23일 자 기사 〈적어지는 냉면의 양〉을 보자.…국수류의 음식은 음식점조합에서 협정 가격을 받아 왔다. 그런데 우동과 소바의 분량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총독부에서는…11월 21일 본정서本町署에서 음식조합장 등을 불러 값을 올리지 못하는 대신 양을 줄이는 업자들을 훈계한다.(274쪽)
반죽꾼이 메밀을 치대서 반죽을 만들어 발대꾼에게 넘긴다. 발대꾼은 그것을 국수틀에 넣고 눌러 끓는 솥으로 면발을 내린다. 앞자리는 면발을 건져서 찬물에 헹궈 씻어 그릇에 담는다. 고명꾼은 고명을 얹는다.(279쪽)
냉면점이 늘어나자 면옥 노동자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임금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면옥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하루 19시간이었다.…1925년 1월 25일 냉면의 성지인 평양에서 최초의 노조가 만들어졌다.…고용주의 착취와 학대를 받아오던 105명의 면옥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대항하는 무기로 면옥노동조합을 결성했던 것이다.…같은 해 4월 2,000명의 양말공장 직공이 파업을 단행하자, 면옥노조 역시 임금 인상 투쟁에 나섰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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