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들어가며
I. 모네, 〈해돋이, 인상〉 - 태양보다 빠르게
II. 드가, 〈무용 수업〉 - 카메라, 휴대용 물감, 우키요에
III.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 전쟁, 기차 그리고 모던 라이프
IV. 마네, 〈올랭피아〉 - 인상주의를 잉태한 화가들
V. 카유보트, 〈비 오는 날〉 - 대표하는 얼굴들
나가며
참고 문헌
미주
인상주의 다섯 개의 그림
[본 문]
이 그림은 모네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도시인 르아브르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정할 때 본인이 보기에도 딱히 르아브르 같지는 않아 그냥 ‘인상’이라 했다. 그래도 해 뜨는 모습처럼 보인다고는 생각했는지 ‘해돋이’라는 단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르루아의 글에 나오는 “인상을 그린 것 같긴 하다”라는 조롱 섞인 대사는 분명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서 착안한 것이다. 작품 제목이 사조의 이름이 된 셈이다. 미술사에서 이렇게 작품 제목이 사조가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하지만, 모네의 〈해돋이, 인상〉은 그럴 만도 하다. 이 작은 그림이 인상주의의 핵심개념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_18쪽, ‘들어가며’
모네에 이르러 그림의 주제가 ‘이야기’가 아닌 ‘빛’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해방이었다. 미술은 더 이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신화고 성경이고 역사고 정치고 다 떠나도 된다. 내 맘대로! 아무거나 그려도 된다!!! 미술가들이 얻은 자유가 느껴지는가? 미술의 독립이었다(이 독립정신이 극단으로 가면 추상미술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미술사에서는 인상주의를 멋진 말로 “미술이 더 이상 문학의 시녀가 아니게 된” 터닝 포인트라고 평가한다. 모네가 공기도 물도 아닌, ‘빛’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서양 미술에서 빛은 그림에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가들은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그럴 듯하게 옮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입체감을 구현해야 했다. 입체감을 내려면 밝고 어두움(명암)이 필수였다. 쉽게 말해 가장 튀어나온 부분은 밝고, 들어간 부분은 어둡고, 물체가 바닥과 만나는 부분에는 그림자가 있어야 평평한 캔버스 위에 현실감 있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모두는 빛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빛은 늘 그림에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은 없었다. 그냥 거기 늘 있는,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대소품일 뿐 결코 주연인 적은 없는 녀석이랄까. 그런 ‘빛’을 모네는 주인공으로 삼았다. 파격적인 캐스팅이다.
_22~24쪽, 모네, 〈해돋이, 인상〉
인상주의는 (미술사의 모든 사조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 어떤 한 개인이 하늘의 계시를 받아
만들어낸 사조가 아니다. (역시 다른 여러 사조와 같이) 탄생할 만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카메라와 튜브 물감의 발명, 일본과의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화가들은 카메라와 경쟁했고, 휴대용 물감 덕분에 밖에서 그림을 그렸다. 일본 우키요에의 소재와 색감 그리고 표현 방식 모두를 흡수했다. 이렇게 그들은 과학 기술에 자극을 받고, 외국의 문화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화파, 인상주의가 되었다. 하나의 미술 사조가 생겨나는 데는 이와 같이 과학의 발전과 국제적 정세 등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작가 개개인의 자전적인 스토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대·사회적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_52~53쪽, 드가, 〈무용 수업〉
르누아르 특유의 부드러운 붓질 역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일등공신 중 하나다. 그의 붓질은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유연하게 흐른다. 날카롭거나 거친 붓질은 르누아르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붓질이 지나치게 섬세하지도 않다. 르누아르는 인물의 복장에 관심이 많았지만(그는 모델들에게 직접 모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어떤 부분도 과도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적당히 표현하고 적당히 뭉갰다(이 적당함이야말로 르누아르의 재능이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 역시 즐거운 휴일의 분위기를 한껏 고취시킨다. 등장인물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자. 모든 인물들은 편안하고 행복하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며 느긋하게 야외 파티를 즐긴다(르누아르는 평생 슬프거나 화난 사람을 그린 적이 없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햇빛 조각,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 순간의 즐거움. 이런 기분 좋은 것들이 르누아르의 부드러운 붓질과 어우러져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들의 기분도 좋아지게 한다. 모네가 빛의 순간을, 드가가 움직임의 순간을 포착했다면, 르누아르는 환희의 순간을 화면 가득 담았다.
_68~69쪽,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인상파 화가들이 본 궤도에 오르기 직전, 마네는 모던 라이프를 그린 그림으로 미술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큰 스캔들을 부른 것은 1863년에 발표한 〈올랭피아〉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그리 놀랍지 않은 그림일 수 있다. 하지만, 1860년대를 사는 파리의 미술 소비층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누드였기 때문이 아니다. 예로부터 여성 누드화는 흔했다. 단, 누드화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첫째는 현실의 인물이 아닌, 비너스와 같은 가상의 인물로 그린다는 점, 둘째는 관람자를 의식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거나 요염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래야 주로 남성이었던 관람자가 여인의 누드를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이 두 가지 규칙을 대범하게 어겼다. 당시 파리에 살던 남성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사창가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에 건 목걸이, 머리의 꽃, 신발 등 모든 것이 놓칠 수 없는 힌트였다. 게다가 그림 속 올랭피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관람자를 쳐다본다. 상상해보라. 전시실에 가서 올랭피아를 마주쳤을 남성 관객의 반응을. 어쩌면 어제 자신과 하룻밤을 함께 했을 수도 있을 여인이 ‘뭘 봐? 너 나 몰라?’라는 눈빛으로 쳐다봤을 때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마네의 이 작품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작품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마네의 그림은 너무나 납작했다. 여성의 육체를 표현하는 데 정석으로 여겨졌던 울룩불룩한 양감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올랭피아는 마치 종이인형 같다. 원근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올랭피아의 뒤를 모두 가려버리는 어두운 커튼을 설치하여 화면에 평면적인 느낌을 한껏 더했다. 인물도 공간도 모두 납작하게 눌러 버린 거다.
_91~92쪽, 마네, 〈올랭피아〉
인상주의자로 대서양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며 영향력을 끼치던 커샛은 말년에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서도 열심을 냈다. 그녀는 여성이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했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기부했으며, 여성 참정권을 홍보하고 기금을 모으기 위한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다. 여성 참정권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단 여성을 그린 그림이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국 학교에서는 수업 수강에 제한을 받았고, 파리 미술 학교에는 입학조차 하지 못했으며, 화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활동 반경에 제약을 받으며 드가의 제자라는 자존심 상하는 의심도 받아야 했던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 커샛이 여성의 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_128~130쪽, 카유보트, 〈비 오는 날〉
인상주의자들이 이룩한 위와 같은 혁명이 미술사에 가져온 영향은 어마무시하다. 현대미술의 사조 모두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인상주의 이후 미술에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증가했다. 가까이는 후기인상주의부터 멀리는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물론 일상을 다루는 것이 인상주의의 단독적 접근이라고 하긴 어렵다. 사실주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떠한 다른 의도 없이 소소하고도 유쾌한 도시인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은 분명 미술의 무게를 덜었고, 이는 현대미술의 소재를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단연 색채다. 인상주의가 색채에 주의를 기울인 점, 특히 고유색을 부정했다는 점은 후대에 대대로 영향을 미쳤다. 사과를 파랗게 칠할 수도 있다니! 이것은 색에게 주어진 전례 없는 자유였다.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나 폴 고갱의 상징적인 색채가 바로 인상주의자들에게 크게 빚진 단적인 예다. 모네가 짚더미를 보라색으로 그리지 않았다면, 반 고흐가 해바라기의 배경을 노란색으로 바꾸기도, 고갱이 바닥을 새빨갛게 칠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야수파도 마찬가지다. 모네가 아니었다면, 마티스가 과연 아내의
얼굴 중앙에 초록색을 떡하니 바를 수 있었을까?! 색에 더해 인상주의는 형태에도 커다란 자유를 줬다. 여러 인상주의자들에게 형태는 그리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다른 말로, 사실적인 형태로부터 이전에 비해 크게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후대의 추상미술가들에 이르러 폭발한다. 현실의 형태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기는 일에 신경을 덜 쓰던 인상주의자들에게서 한발 더 나아가 현실의 형태에 아예 신경을 꺼버린 것이다. ‘20세기 미술의 최고의 발명’이라 불리는 추상미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색과 형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인상주의의 DNA를 극대화시킨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_198~199쪽,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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