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들어가며
I. 마티스, 〈생의 기쁨〉 - 감정이자 음악이자 생명인 색
II. 블라맹크, 〈샤투의 집들〉 - 계산보다 본능, 절제보다 폭발
III. 드랭, 〈빅 벤〉 - 그늘에 가린 현대미술의 개척자
IV. 루오, 〈사이렌〉 - 영혼을 보듬는 위안의 빛
V. 반 동겐, 〈큰 모자를 쓴 여인〉 - 붓을 든 아나키스트
나가며
참고 문헌
미주
야수주의 다섯 개의 그림
[본 문]
야수주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색채’다. 그들에게 색채는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독립적인 언어였다. 이러한 색채 혁명은 무엇보다 후기인상주의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 후기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인상주의자들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포착한 찰나의 빛과 색채 변화를 화폭에 담는 데 몰두했다면, 후기인상주의자들은 그 너머의 세계 즉 사물의 본질과 내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다. 반 고흐는 격정적인 붓놀림과 타오르는 색채로 내면의 감정을 쏟아냈다. 고갱은 명확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그림자와 음영을 과감히 생략해 색면을 평면적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의 색채를 완전히 벗어난 자신만의 상징적인 색을 선택했다. 야수주의는 바로 이 후기인상주의로부터 ‘형태와 색채의 해방’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를 더욱 과감하고 주관적인 표현의 극한으로 밀어붙여 새로운 미술 운동으로 나아갔다.
_14~16쪽, ‘들어가며’
마티스의 혁신적 통찰은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마티스는 1908년 12월 25일 〈라 그랑드 르뷔La Grande Revue〉지에 기고한 「화가의 노트Notes d’n peintre」에서 자신의 색채 철학을 명확히 밝혔다(마티스는 평소 미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상세히 서술했다). 그는 자연을 모사하거나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감각과 체험을 통해 색을 선택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색채가 고정된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제곱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제곱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 마티스의 이 말은 곧 색채의 질은 곧 양이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의 색이 인접한 색의 영향을 받는다는 기존 이론을 넘어, 색채 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표면과 면적의 관계에 있다는 중대한 통찰이었다. 그는 따라서 색상의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 색상이 차지할 정확한 영역과 크기를 신중하게 계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완성된 화면에서 개별 색채들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색은 그다음에 칠해질 색의 시각적 ‘배경’이 되어 전체적인 색채 효과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야수주의 하면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붓질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오해다! 자유로워 보이는 야수주의 색채는 사실은 각 색채 간의 미묘하고 복합적인 관계를 이해하고 다양한 색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율하는, 고도의 조형적 감각을 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야수주의의 진정한 혁신은 바로 이러한 ‘색채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_46~48쪽, 마티스, 〈생의 기쁨〉
사실 블라맹크의 작품은 원작을 감상해야 그 특유의 질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마치 쏟아져 내릴 듯 생생한 표면의 질감과 소용돌이치듯 속도감 있는 필치, 그리고 묵직하면서도 화려한 색채의 조화는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존감을 선사한다. 블라맹크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물감을 바로 캔버스에 짜낸 뒤 붓이나 나이프로 두터운 물감의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 색의 혼합을 최소화함으로써 원색의 힘과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철저히 즉흥에 의존하여 순간의 직감만을 믿고 화면을 구성해나갔으며, 한 번 그린 것은 절대 고치지 않았다. 찰나에 폭발하는 감정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였다. 블라맹크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폭풍우가 몰아치듯 거침없이 캔버스 위에 남김없이 쏟아내는 것. 그에게는 그것만이 진정한 예술이었다.
전통적인 원근법적 공간 또한 해체된다. 전통적인 회화는 삼차원 공간을 평면에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목표였고, 전경과 후경의 명확한 위계적 구분을 통해 환영적 깊이감을 만들어냈다. 반면 블라맹크는 이러한 관습적 공간 개념을 과감히 버렸다. 그의 그림에서는 인물과 배경, 주요 형상들이 하나로 녹아들어 추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는 화면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색채의 장場’으로 전환하는 결과를 낳는다.
_91~92쪽, 블라맹크, 〈샤투의 집들〉
드랭이 남긴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와 마티스 사이의 치열한 이론적 논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단순한 개인적 안부를 넘어선, 새로운 그림의 길을 찾아가는 탐구 과정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살롱 도톤》 개막을 앞둔 1905년 6월, 드랭이 마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 그의 예술관이다. 글에서 그는 개별 색채가 지닌 강렬함보다는 “색상들 간의 논리적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각 색채들 간의 미묘한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찰하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색채의 조화를 구현하고자 했던 마티스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야수주의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색채의 향연이 결코 아니었다. 전통적인 회화 문법을 해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조형 원리를 구축하려는 극도로 치밀한 조형 실험이었다. 그러나 드랭이 지향한 바는 마티스와 달랐다. 당시 드랭이 제작한 〈콜리우르 항구〉(1905, 113쪽)와 〈콜리우르 항구의 배들〉(1905, 115쪽)을 살펴보면, 그의 독특한 조형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점묘법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 드랭은 캔버스의 흰 바탕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이를 빛의 효과로 활용했다. 물감을 칠하지 않은 빈 캔버스 부분은 형태를 섬세하게 암시함과 동시에, 수면 위 햇빛의 반사 효과를 생생하게 구현하며 작품에 생동감을 더했다.
_114~116쪽, 드랭, 〈빅 벤〉
흥미롭게도 루오는 동시대의 어떤 미술 운동에도 공식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야수주의 전시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마티스나 드랭과는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나는 야수가 아니다. 나는 신앙인이다”라고 루오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동료들이 색채의 해방에 열중할 때, 그에게는 영혼의 표현이 더 중요했다. 입체주의나 초현실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들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형식의 혁신보다 내용의 진실성이 우선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그의 태도를 고집스럽다고 여겼고,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그러나 확신에 차서 걸어갔다.
루오는 20세기 초, 과학과 합리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야수주의적 색채 해방과 표현주의적 기법은 분명 20세기 전위미술의 언어였다. 하지만 루오는 이런 현대적 기법을 단순한 조형 실험에 국한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중세 종교미술이 간직한 숭고한 영성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냈던 것이다. 루오의 진정한 미술사적 성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모더니즘의 형식적 혁신과 전통적 종교화의 정신성을 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결합해낸 것이다.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인물의 얼굴을 과장하고, 자신만의 감정으로 색을 칠하는 루오의 방식은, 특히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표현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_173~174쪽, 루오, 〈사이렌〉
특히 반 동겐은 개성 있고 독특한 스타일로 날씬하고 세련된 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 특히 저명인사의 부인이나 사교계 귀부인들의 주문이 많았다. 반 동겐의 작품은 전시되기도 전에 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야수주의 시절의 거친 에너지는, 파리 사교계의 우아한 취향에 맞게 세련되게 다듬어져 갔다. 길게 늘인 신체, 크고 검은 눈, 짙은 화장, 눈부시게 화려한 색감, 도회적 관능미, 묘한 신비로움… 이 모든 요소들이 이 시기 반 동겐 초상화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을 길게 늘이고 특히 날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엔 그들의 보석을 크게 키우는 것만 남는다. 그들은 황홀해한다.” 반 동겐은 지금으로 치자면 포토샵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를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그는 평생에 걸쳐 아름다운 거짓말을 그려나갔다. 어떤 이들은 이를 예술적 타락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반 동겐에게는 순수 예술과 상업적 성공 사이에서의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반 동겐은 정치적 급진성을 미학적 실험의 원동력으로 삼는 데 탁월한 화가였다. 따라서 이 시기 여성 초상화들도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현실과 타협한 작품들로만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오히려 반 동겐은 여전히 자신만의 사회비판적 시선과 인물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놓지 않았다. 당시 그린 초상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복잡한 내면을 포착하는 그만의 이중적 표현법이 돋보인다.
_208~210쪽, 반 동겐, 〈큰 모자를 쓴 여인〉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야수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브랜드 로고의 강렬한 색상 대비,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색채 표현, 디지털 미디어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감. 이 모든 것들이 야수주의가 열어 젖힌 색채 자율성의 전통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이제 말보다는 이미지로, 텍스트보다는 색채로 소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화면의 알록달록한 앱 아이콘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유튜브 섬네일의 자극적인 색이 클릭을 유도하고, 눈길을 잡아 끄는 지하철 광고판의 강렬한 색감은 무의식중에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100여 년 전 야수주의 화가들이 캔버스에서 처음 발견한 ‘색채의 힘’은 이제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야수주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깨달음이다. 야수주의 이전까지 서양 미술에는 어느 정도 공통된 ‘잘 그리는 법’이 있었다. 하지만 야수주의는 수백 년간 이어져온 회화의 전통을 과감히 깨뜨리며 기존 관습에 도전했다. “틀에 박힌 것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라”는 메시지는 창작자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감을 준다. _221~222쪽, ‘나가며’
이 책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리뷰를 남기고 다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해보세요.
안내 열기구매(배송/수령완료) 후 리뷰를 작성하시면 적립금 300원을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