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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97533619 |
|---|---|
| 쪽수 | 352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AI추천 이유

고조선 왕검성은 고구려(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
『삼국사기』는 “고조선의 왕검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平壤城)”이라 하였고, 왕부(王符, 85~162년)의 『잠부론』은 “한성 서쪽에 준왕이 다스리던 고조선 왕검성이 있다”고 하였으며, 후한 때 반고(班古, 32~92년)의 『전한서』 지리지는 “고조선의 왕험성에 훗날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된다”고 하였다.
현재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鎭)에 폐허가 된 고성(固城) 즉 범양고성(範陽古城)이 있는데, 이것이 왕검성이다. 이는 『전한서』 지리지에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 주석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당태종 아들 이태(李泰)의 『괄지지(括地志)』는 “고구려 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으로 곧 고조선 땅이다”고 하였고, 당나라 장수철 주석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고조선 왕검성과 같은 자리에 훗날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는 “평양성이 훗날 발해 중경현덕부 치소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왕검성이 있었던 낙랑군은 서진 시대에는 평주 속군이 되었는데, “276년 당시 요동, 창려(昌黎), 현토, 대방, 낙랑 등의 5군은 평주에 속했다”는 신찬의 『진서』 지리지 기록과 일치한다. 더 결정적인 기록은 원나라 탈탈(脫脫)의 『요사』이다.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는 본래 고조선 땅으로 동경(東京)이 바로 옛 평양성”이며, “발해의 홀한주도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라고 한다“ 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정흥현(定興縣) 고성(固城)이 한(漢)나라 패수현(浿水縣)이자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 상락현(常樂縣) 위치로 밝혀졌다. 따라서 계조하(鷄爪河) 일명 패수 동쪽 7㎞에 있는 정흥현(定興縣) 고성(固城)이 바로 고조선 왕검성 치소로 추정된다.
왕검성(王儉城) 위치
한사군은 실재했는가?
한나라는 군(郡)을 설치하면 황제직할지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태수 등을 파견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는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면서 그와 같은 기록이 없다. 왜일까?
1. 반고의 『한서』(약 180년 후 기록)는, 『사기』의 5군이 황제직할지인 한사군으로 바뀌고 5군 제후들의 이름까지 삭제해 버렸다. 당시 직할 통치가 어려운 곳은 제후가 다스리는 국(國)을 설치하지 군(郡)을 설치하지는 않는다. 또 (『사기』보다 약 5백 년 뒤인 432년 편찬) 『후한서』는 『사기』에 나오는 조선 평정(平定) 기사에서 정(定) 자를 멸(滅) 자로 바꿔 조선을 멸망(滅亡)시킨 것으로 변조했다.
사료 『후한서』: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 현토, 임둔, 진번으로 했다(遂滅朝鮮 爲樂浪 玄免 臨屯 眞番). 낙랑, 현토, 임둔, 진번 등 4군을 두었다(爲樂浪 玄免 臨屯 眞番)
위에서 만약 한 4군이 실제로 설치되어 직할 통치했다면, 위(爲) 자가 아니라 치(治) 자를 써야 한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점은 전한에서 서진까지(전한, 왕망의 신(新)나라, 유수(劉秀)의 후한, 220년 조조 아들 조비(曺丕)에 의한 한나라 멸망, 위(魏), 서진에 이르기까지) 5개 왕조가 바뀌는 400년간 한사군만 생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 있었다는 낙랑군이 거짓인 이유!
사학계는 대동강 남안의 토성리에 있는 약 1.5km 토성(土城)과 목곽묘(木槨墓) 고분 100여 기를 한사군의 지배 시기의 토성과 무덤이라고 보고, 낙랑군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강 주변 토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또 낙랑군 고분으로 추정되는 목곽묘(木槨墓) 고분 100여 기도 BC 108년 훨씬 이전 목곽묘이며, 한사군이 설치되는 시기에는 사라진 무덤이다. 결국 대동강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세형동검류의 고조선계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또 봉니 200여 개 발견을 근거로 우리 사학계는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는 관직명이 전한 당시 관직 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들어 위조되었다고 추정한다. 특히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라고 쓰인 봉니가 위조품인 이유는 왕망의 신나라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당연히 낙선대윤장(樂鮮大尹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점제현(秥蟬縣) 신사비는 뜨거운 감자다. 동경대 세키노 다다시 교수가 평남 온천군 성현리에서 발견했는데, (점제현은 낙랑군 25개 속현 중의 하나-『한서』 지리지) 비석이 발견된 평안도 온천면 일대는 2천여 년 전, 한나라 시대에는 바다 밑에 있었다. 또 비석의 성분은 대동강 유역에서 생성된 화강암이 아니고 외부에서 옮겨온 것일 뿐만 아니라 2000년 전에 만든 비석 기초에 시멘트가 발라져 있었다.
세키노 다다시(関野貞): 동경대 교수 점제현 신사비
고조선과 진국 및 삼한의 관계
대한민국의 국호와 한민족의 뿌리는 조선과 삼한에 있다. 여기서 삼한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三國)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의미한다. 조한 전쟁시 “(고조선의)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왕에게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동쪽에 있는 진국으로 갔으며 그때 백성 2천여 호가 따라갔다(朝 鮮相歷谿卿以諫 右渠不申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 二千餘戶)”는 『삼국지』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진국은 위만조선의 남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었다. 또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나라 이름도 진국(振國)이었다.
『후한서』도 마한, 진한, 변진의 삼한 모두가 진국에서 발전했고, 진왕이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 전체를 다스린다고 했다. 다만 도읍을 『삼국지』는 월지국, 『후한서』는 목지국이라고 하였다. 결국 진국이 삼한 전체의 전신이었고,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해 삼한으로 분할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한(韓)은 3개 종류가 있다. 마한, 진한, 변진으로 나뉘어 있으며 78국이다. 모두 옛 진국이다(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凡七十八 國 皆古之辰國也).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래 우리 사학계가 신라, 백제, 가야가 삼한 소국들에서 발전한 국가라고 주장했는데, 속셈은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기원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삼국(原三國) 시대라는 말도 이런 주장에 맞추다 보니 등장한 조어였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태조왕 시기 고구려와 마한 연합군이 한나라 현토성을 공략했던 기사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기록에서, 멸망한 마한 세력은 사학계 주장처럼 한반도 서남부로 간 것이 아니라 한산 이북에, 강제로 이주했다고 나온다. 이어서 이 지역의 주민들이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김부식이 추론한 마한이 온조왕 때에 멸망했으나 고구려와 함께 요동 정벌을 할 수 있는 지역에 부활했음이 사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다”라고 단언하는 최치원의 삼한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여의 기원과 건국 신화
『논형』에 따르면 부여는 북이(北夷) 고리국(槀離國) 출신 맥족 동명(東明)이 남하해 예족의 땅에 세운 국가이며 고리국은 탁리국(橐離國) 혹은 색리국(索離國)이라 불린다. 『산해경』과 『상서대전』 및 『사기』 화식열전 기록으로 미루어, 부여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1046년경 이전이고, 고대국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건국 위치는 예맥의 결합이 이루어진 상곡 북쪽 지역 곧 상곡군(上谷郡)이다. 『삼국사기』는 북부여는 해모수, 동부여는 해부르를 시조로 보고 있지만, 중국 사서는 동명 신화만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동명왕 사당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아 동명 부여가 전체의 건국 시조로 보인다. 동명 신화의 기본 자료는 1세기경에 채록된 『논형』에 근거한다.
한편 동명 부여는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유방의 건국 과정에서 북맥은 군사적 지원을 했으며, 서기 121년과 122년 두 차례 고구려와 마한 연합군의 한나라 현토성을 공략 시 부여가 수만 병력을 보내 고구려 연합군을 깨뜨렸다. 그리고 신나라 왕망의 새 인수 명단에도 현토, 낙랑, 고구려, 부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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