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은 방외인이고, 경계인이었다.
김시습의 생을 요약하여 보면 유가(儒家) → 출가(出家) → 환속하여 유가(儒家) → 출가(出家)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자들과 달리 불교의 진리를 인정했으며, 도학에도 심취했다. 실제 거처했던 곳도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을 오갔고,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유학(儒學)을 기본 이념으로 삼아 불교나 도교 같은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고 탄압했는데, 이러한 체제에 반발하여 이단(異端) 사상을 추구하거나 세속적 현실을 초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방외인(方外人)으로 불렀다. 김시습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회 질서나 규범의 밖에서 살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김시습은 유불(儒佛)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논(論)하면서도 백성의 정신적, 경제적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유·불(儒佛)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서, ‘이념·사상·종교나 조정(朝廷)의 정책이 모든 백성의 삶을 궁핍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시습은 세속적 삶에도 ‘방외인인가’, ‘아닌가’의 경계를 오가며 살았고, 학문에도 유·불·도를 모두 수용하거나 그 경계에서 살았다. 그가 걸어가는 방외인의 길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기에(직접적으로는 부모, 아내, 자식이 없었다) 더 가능하였다.
김시습은 유불도(儒佛道)를 통섭하는 삶, 지금으로 말하며 간학문적(間學問的) 탐구와 실천에 심취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방(方) 안팎 드나듦에 있어 제약이 없던 경계인이었다.
관동(關東, 강원도)은 김시습의 고향이며 안식처였다.
김시습은 관동의 사나이이다. 관동을 뜨겁게 사랑하였다. 중흥사에서 유람을 시작한 이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낸 곳이 관동이고, 강원이다. 그의 긴 호흡은 산마루에서, 강나루에서, 골 깊은 산골짜기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행동하는 지식인, 그래서 아직도 함께 걷고 있을 김시습, 그러나 이제는 일단 놓아주자. 더 큰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김시습은 진정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김시습은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진정한 고독의 지식인이었다. 김시습은 유자(儒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을 등지고 절집을 떠도는 불자(佛子)가 되었고, 불자가 되어 산천을 가까이하다 보니 도인(道人)도 되었다. 그래서 김시습은 유불선(儒佛仙)을 통달하게 되었다. 이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시도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살다 보니 그렇게 된 면도 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 꿈은 열심히 꾸고, 세밀한 실천 계획을 세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나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자각(自覺)하고는 ‘이것이 순리인가 보다’하는 그런 것.
정주동은 『매월당 김시습 연구』에서 이렇게 적었다. “김시습(時習)의 일생(一生)은 방랑(放浪)의 일생이요, 병고(病苦)와 투쟁(鬪爭)의 일생이요, 궁수비한(窮愁悲恨)의 일생이요, 자학(自虐)과 저항(抵抗)의 일생이요, 시주광객(詩酒狂客)의 일생이었다” 라고….
김시습은 강원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관동인(關東人)이다.
금강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보니 몇 가지 새로운 자료가 있어 추가한다. 『국역 매월당 전집(강원도, 2000)』에는 없는 김시습의 관동 관련 시(詩) ‘관동명산(關東名山)’을 「북한 지리 정보」에서 발견하였다.
관동명산(關東名山) 북한지리정보
臺嶠靑萬疊 (대교청만첩) 오대산 푸르고 푸르러 일만 겹이요
楓缶白千層 (풍부백천층) 금강산 희디희며 일천 층이라.
國島波雷壮 (국도파뇌장) 국섬 파도 소리 우레가 마냥 장하고
叢亭石柱稜 (총정석주릉) 총석정 돌기둥은 모나기도 하여라.
沙明三日浦 (사명삼일포) 삼일포 모래밭은 깨끗하기도 한데
苔蝕六書陵 (태식육서릉) 봉우리에 새긴 여섯 글자엔 이끼가 꼈구나.
渤海連天闊 (발해연천활) 하늘에 잇닿은 듯 저 바다 넓고 넓어
三山藥可仍 (삼산약가잉) 삼신산 불로초도 여기서 캐겠구나!
〈번안시조〉
오대산은 푸르르고 일만 겹 겹쳐있고
금강산은 희디희게 일천 층 층계 있고
국섬의 우레 파도는 총석정에 이른다.
삼일포 모래벌은 깨끗해 보기 좋고
사선정 여섯 글자 세월이 쌓였구나!
삼신산 불로초 약도 이곳에서 캤겠네.
이 자료는 2004년 북한에서 발행된 ‘금강산 한자 시선(상)’에 수록된 자료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며 유의 사항에 안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發掘)한 시(詩)라는 이야기이다.
김시습은 이 시에서 오대산, 금강산, 국도, 총석정, 삼일포 등을 제시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토록 관동의 아름다운 산하(山下)를 사랑하였다.
김시습 손을 잡고 다시 찾고 싶은 금강산
오늘날, 금강산은 2007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언젠가 다시 활짝 열려 한 번이라도 내 차를 몰고 표훈사 정류장까지 올라가 김시습의 발길을 따라 탐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마도 세 시간 정도면 갈 텐데….
국토적 통일 뿐만 아니라 민족 문화의 뿌리들을 자랑스럽게 정리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분명, 금강산은 다시 열려야 한다. 하여, 새로운 만남으로부터 더 아름다운 금강산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한편, 금강산을 유람할 당시 김시습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에서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지었는데, 당시 그의 작시(作詩)와 관련되는 일화(逸話)가 전해오고 있다. ‘김시습과 금강산(2018.08.23.)’ 이야기에서 인용한다.
“사찰 부근의 만폭동(萬瀑洞)계곡에는 수많은 폭포와 소(沼)들이 즐비해서 여름에 한참 소나기가 퍼부으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나 세차게 흘러내리곤 하였다. 시습은 이런 때면 으레 100여 장의 종이를 준비해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목의 너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추악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시들을 썼다. 시 한 편을 쓰면 목이 메인 채 읊다가 여울물에 띄워 보내고, 또 한 편을 써서 읊은 다음 다시 띄워 보내곤 하였다. 이때 그가 하루에 쓴 시는 무려 백여 수에 달했다고 한다. 뒷날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이 시(詩) 제목을 ‘누군가 김시습에게로’로 붙여보자.
‘작자 미상(未詳)의 누군가’가 김시습에게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가나
굽이치며 흘러서 바다로 가지
푸른 하늘 한 조각 같은 종이쪽에
읊고 쓰고 쓰고 읊고 여념 없었네.
〈번안시조〉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흘러 가나
굽이쳐 흘러 흘러 바다로 달리겠지
저 하늘 조각 종이에 읊고 쓰고 또 쓰네.
이런 기록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느냐’에 있다. 남아(南兒) 26세면 아직 젊은 나이이다. 꿈도 있고 그 꿈을 이룰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래 세상이 온통 미처 돌아가고 있었다. 그 더러운 구정물에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시습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익히고,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금강산에서 나오는 김시습은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집권층에 대한 증오에 가깝던 반감(反感)도 이십대 후반으로 가는 나이와 함께 상당히 무디어졌다. 그리하여 쓰고 또 쓴 후 물에 띄워 한양으로 보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특히 내금강 관광이 다시 열린다면 김시습의 손을 잡고 김시습의 감성적 서정(抒情)으로 내금강을 천천히 걷고 싶다.
매월당은 지금도 관동의 어디에선가 걷고 있을 터…
김시습은 우리나라의 관북을 제외하고 관서, 관동, 호서, 호남, 영남 등 온 나라를 유람하였다. 그런 중에도 관동에는 여러 번 왔다. 관향(貫鄕)의 고향이고 맹모 같았던 어머니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간 머무른 것까지 고려한다면 충청남도 공주시 동학사 방문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김시습은 단종의 위패(位牌)를 모신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열리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의 빠짐없이 초혼각(招魂閣)을 방문하였다. 이런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김시습의 발길이 제일 많이 머무른 곳은 관동이다.
김시습의 주거주지(主居住地)를 다시 살펴보자. 먼저 삼각산 중흥사는 과거시험 공부하던 곳이고,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부근 폭천정사는 서울에 머물렀던 곳이며, 경주 금오산실(金烏山室)은 관향(貫鄕)의 본향(本鄕)이다. 강릉은 관향의 고향(故鄕)이고, 강릉(양양?)은 어머니를 모신 곳이었다. 춘천은 제자 학매의 고향이었고, 그 외의 산사(山寺)는 대개 나옹선사(懶翁禪師)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 많았다.
그중에서 지방으로 나들이할 때는 관동에 대한 발길이 가장 잦았다. 김시습에게 관동은 현실의 도피처요, 휴식처요, 공부하는 곳이요, 고향처럼 아늑함이 있는 곳이다. 또 비교적 서울에서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수(山水)가 수려하다는 특징도 있었다.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습에게 산은 세속에서 고뇌를 잠재울 수 있는 자연이 있었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부끄러움 없이 행하고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사실이 끝없이 계속되고 반복되지만, 자연은 그냥 거기에 그 모습으로 늘 있었다.
김시습의 마지막 주 거주지는 양양군 법수치리 검달동의 띠 집이었다. 띠집은 띠풀로 지붕을 올린 집이다. 골 깊은 산골짝에는 논이 없어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볏짚이 있어야 이엉을 엮고 이엉을 지붕에 올려서 초가집을 짓는데 볏짚이 없으니 볏짚이엉 대신 산골짜기에 흔한 띠풀로 띠풀 이엉을 엮어 지붕에 올려 눈비를 막았다. 울타리와 대문은 짐승의 접근을 막을 정도면 되었기에 싸릿대를 엮어 세운 싸리문이면 충분했다.
검달동은 김시습의 놀이터요, 생활 공간이요,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농경지요, 목축지였다. 그리고 시문(詩文)이 솟아오르는 샘터였다. 그러니 자연은 김시습 영육(靈肉)의 모두였다. 이 모두를 충족시켜 주었던 검달동을 비롯한 관동은 김시습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었을까?
유람의 긴 세월 중에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고 유람하고 은거하며 영육이 숨 쉬던 혈육의 고장 강릉에서, 어머니의 본향 울진(지금은 경북이지만)에서, 김화(사곡촌), 금강산, 화천(사탄, 지금은 사내면), 춘천(소양강과 청평사), 인제(오세암), 홍천, 횡성(각림사), 원주(치악산), 평창(오대산, 상원사), 영월(청령포와 주천), 정선, 태백, 삼척, 양양(동산관, 낙진촌, 법수치, 낙산사, 검달동) 등등 관동의 산하(山河)를 누볐다. 이외에도 저자(著者)가 알지 못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을까?
매월당 김시습은 생육신으로서의 절의(節義), 뛰어난 재능, 선구자적 면모, 방외인(方外人)으로 사는 삶,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괴벽한 행동, 은둔생활에 대한 의문(은둔이냐 현실 도피냐) 등은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 조용히 사색하면 도(道)를 수련하여 인생의 터전을 닦는 것) 하였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1492년,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남도 홍산(鴻山, 현재는 부여) 무량사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긴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이이 율곡도 ‘백 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관동인(關東人) 김시습, 일단 손을 놓아주자.
짧은 기간이었고, 애당초 감히 손을 대서는 안 될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기왕 손을 댄 김에 관동 곳곳에 숨어 있던 김시습 시혼(詩魂)의 샘(泉)을 더 많이 깨워 온 나라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게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 보니, 다 파내지는 못했어도 이제 마라톤 출발선에는 함께 손잡고 서 있을 만큼은 된 것 같다. 앞으로 더 지루한 씨름을 하며, 완주(完走)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의 ‘자회(自悔)’를 읽어보자.
스스로 후회하며〔自悔〕 : 64
詩酒淸狂四十年 (시주청광사십년) 시와 술로 마음 비우고 미처 살기 사십 년
如今往事更依然 (여금왕사갱의연)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迷途末遠應須覺 (미도말원응수각)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
擬把□□學地仙 (의파□□학지선)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
〈번안시조〉
시주(詩酒)로 마음 비워 미처 살기 사십여 년
내 삶이 반복돼도, 지금처럼 살아가리
깨닫고 지상선(地上仙) 닮아 옳은 길을 걸었네.
지상선(地上仙)은 하늘로 승천하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며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선을 의미한다. 김시습은 지상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뜻깊은 작품인데, 시어(詩語) 두 자가 누락된 것도 계획적인 듯 기가 막히게 빠져 있다.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빈 자리에 어떤 시어가 채워져 있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이 시는 만년에 쓴 작품이다. ‘시주(詩酒) 사십 년’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거의 육십이 다 되어 쓴 작품이다. 제목을 자회(自悔)라고 썼으나 실제로는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라고 하였다. 잘 살았고, 올곧게 살았다고 자위(自慰)하고 있다. 자기의 삶에 만족한 김시습, 역시 ’김시습‘답다.
일단 여기서 잰걸음을 멈추고 김시습의 오른손을 놓아주자. 그래도, 관동(關東)의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휘적휘적 걷고 있을 매월당. 그 이름 김시습! 그가 말한 천년 뒤가 아니라, 영원히 영원하리.
김시습은 방외인이고, 경계인이었다.
김시습의 생을 요약하여 보면 유가(儒家) → 출가(出家) → 환속하여 유가(儒家) → 출가(出家)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자들과 달리 불교의 진리를 인정했으며, 도학에도 심취했다. 실제 거처했던 곳도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을 오갔고,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유학(儒學)을 기본 이념으로 삼아 불교나 도교 같은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고 탄압했는데, 이러한 체제에 반발하여 이단(異端) 사상을 추구하거나 세속적 현실을 초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방외인(方外人)으로 불렀다. 김시습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회 질서나 규범의 밖에서 살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김시습은 유불(儒佛)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논(論)하면서도 백성의 정신적, 경제적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유·불(儒佛)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서, ‘이념·사상·종교나 조정(朝廷)의 정책이 모든 백성의 삶을 궁핍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시습은 세속적 삶에도 ‘방외인인가’, ‘아닌가’의 경계를 오가며 살았고, 학문에도 유·불·도를 모두 수용하거나 그 경계에서 살았다. 그가 걸어가는 방외인의 길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기에(직접적으로는 부모, 아내, 자식이 없었다) 더 가능하였다.
김시습은 유불도(儒佛道)를 통섭하는 삶, 지금으로 말하며 간학문적(間學問的) 탐구와 실천에 심취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방(方) 안팎 드나듦에 있어 제약이 없던 경계인이었다.
관동(關東, 강원도)은 김시습의 고향이며 안식처였다.
김시습은 관동의 사나이이다. 관동을 뜨겁게 사랑하였다. 중흥사에서 유람을 시작한 이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낸 곳이 관동이고, 강원이다. 그의 긴 호흡은 산마루에서, 강나루에서, 골 깊은 산골짜기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행동하는 지식인, 그래서 아직도 함께 걷고 있을 김시습, 그러나 이제는 일단 놓아주자. 더 큰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김시습은 진정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김시습은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진정한 고독의 지식인이었다. 김시습은 유자(儒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을 등지고 절집을 떠도는 불자(佛子)가 되었고, 불자가 되어 산천을 가까이하다 보니 도인(道人)도 되었다. 그래서 김시습은 유불선(儒佛仙)을 통달하게 되었다. 이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시도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살다 보니 그렇게 된 면도 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 꿈은 열심히 꾸고, 세밀한 실천 계획을 세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나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자각(自覺)하고는 ‘이것이 순리인가 보다’하는 그런 것.
정주동은 『매월당 김시습 연구』에서 이렇게 적었다. “김시습(時習)의 일생(一生)은 방랑(放浪)의 일생이요, 병고(病苦)와 투쟁(鬪爭)의 일생이요, 궁수비한(窮愁悲恨)의 일생이요, 자학(自虐)과 저항(抵抗)의 일생이요, 시주광객(詩酒狂客)의 일생이었다” 라고….
김시습은 강원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관동인(關東人)이다.
금강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보니 몇 가지 새로운 자료가 있어 추가한다. 『국역 매월당 전집(강원도, 2000)』에는 없는 김시습의 관동 관련 시(詩) ‘관동명산(關東名山)’을 「북한 지리 정보」에서 발견하였다.
관동명산(關東名山) 북한지리정보
臺嶠靑萬疊 (대교청만첩) 오대산 푸르고 푸르러 일만 겹이요
楓缶白千層 (풍부백천층) 금강산 희디희며 일천 층이라.
國島波雷壮 (국도파뇌장) 국섬 파도 소리 우레가 마냥 장하고
叢亭石柱稜 (총정석주릉) 총석정 돌기둥은 모나기도 하여라.
沙明三日浦 (사명삼일포) 삼일포 모래밭은 깨끗하기도 한데
苔蝕六書陵 (태식육서릉) 봉우리에 새긴 여섯 글자엔 이끼가 꼈구나.
渤海連天闊 (발해연천활) 하늘에 잇닿은 듯 저 바다 넓고 넓어
三山藥可仍 (삼산약가잉) 삼신산 불로초도 여기서 캐겠구나!
〈번안시조〉
오대산은 푸르르고 일만 겹 겹쳐있고
금강산은 희디희게 일천 층 층계 있고
국섬의 우레 파도는 총석정에 이른다.
삼일포 모래벌은 깨끗해 보기 좋고
사선정 여섯 글자 세월이 쌓였구나!
삼신산 불로초 약도 이곳에서 캤겠네.
이 자료는 2004년 북한에서 발행된 ‘금강산 한자 시선(상)’에 수록된 자료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며 유의 사항에 안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發掘)한 시(詩)라는 이야기이다.
김시습은 이 시에서 오대산, 금강산, 국도, 총석정, 삼일포 등을 제시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토록 관동의 아름다운 산하(山下)를 사랑하였다.
김시습 손을 잡고 다시 찾고 싶은 금강산
오늘날, 금강산은 2007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언젠가 다시 활짝 열려 한 번이라도 내 차를 몰고 표훈사 정류장까지 올라가 김시습의 발길을 따라 탐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마도 세 시간 정도면 갈 텐데….
국토적 통일 뿐만 아니라 민족 문화의 뿌리들을 자랑스럽게 정리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분명, 금강산은 다시 열려야 한다. 하여, 새로운 만남으로부터 더 아름다운 금강산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한편, 금강산을 유람할 당시 김시습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에서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지었는데, 당시 그의 작시(作詩)와 관련되는 일화(逸話)가 전해오고 있다. ‘김시습과 금강산(2018.08.23.)’ 이야기에서 인용한다.
“사찰 부근의 만폭동(萬瀑洞)계곡에는 수많은 폭포와 소(沼)들이 즐비해서 여름에 한참 소나기가 퍼부으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나 세차게 흘러내리곤 하였다. 시습은 이런 때면 으레 100여 장의 종이를 준비해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목의 너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추악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시들을 썼다. 시 한 편을 쓰면 목이 메인 채 읊다가 여울물에 띄워 보내고, 또 한 편을 써서 읊은 다음 다시 띄워 보내곤 하였다. 이때 그가 하루에 쓴 시는 무려 백여 수에 달했다고 한다. 뒷날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이 시(詩) 제목을 ‘누군가 김시습에게로’로 붙여보자.
‘작자 미상(未詳)의 누군가’가 김시습에게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가나
굽이치며 흘러서 바다로 가지
푸른 하늘 한 조각 같은 종이쪽에
읊고 쓰고 쓰고 읊고 여념 없었네.
〈번안시조〉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흘러 가나
굽이쳐 흘러 흘러 바다로 달리겠지
저 하늘 조각 종이에 읊고 쓰고 또 쓰네.
이런 기록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느냐’에 있다. 남아(南兒) 26세면 아직 젊은 나이이다. 꿈도 있고 그 꿈을 이룰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래 세상이 온통 미처 돌아가고 있었다. 그 더러운 구정물에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시습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익히고,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금강산에서 나오는 김시습은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집권층에 대한 증오에 가깝던 반감(反感)도 이십대 후반으로 가는 나이와 함께 상당히 무디어졌다. 그리하여 쓰고 또 쓴 후 물에 띄워 한양으로 보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특히 내금강 관광이 다시 열린다면 김시습의 손을 잡고 김시습의 감성적 서정(抒情)으로 내금강을 천천히 걷고 싶다.
매월당은 지금도 관동의 어디에선가 걷고 있을 터…
김시습은 우리나라의 관북을 제외하고 관서, 관동, 호서, 호남, 영남 등 온 나라를 유람하였다. 그런 중에도 관동에는 여러 번 왔다. 관향(貫鄕)의 고향이고 맹모 같았던 어머니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간 머무른 것까지 고려한다면 충청남도 공주시 동학사 방문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김시습은 단종의 위패(位牌)를 모신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열리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의 빠짐없이 초혼각(招魂閣)을 방문하였다. 이런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김시습의 발길이 제일 많이 머무른 곳은 관동이다.
김시습의 주거주지(主居住地)를 다시 살펴보자. 먼저 삼각산 중흥사는 과거시험 공부하던 곳이고,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부근 폭천정사는 서울에 머물렀던 곳이며, 경주 금오산실(金烏山室)은 관향(貫鄕)의 본향(本鄕)이다. 강릉은 관향의 고향(故鄕)이고, 강릉(양양?)은 어머니를 모신 곳이었다. 춘천은 제자 학매의 고향이었고, 그 외의 산사(山寺)는 대개 나옹선사(懶翁禪師)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 많았다.
그중에서 지방으로 나들이할 때는 관동에 대한 발길이 가장 잦았다. 김시습에게 관동은 현실의 도피처요, 휴식처요, 공부하는 곳이요, 고향처럼 아늑함이 있는 곳이다. 또 비교적 서울에서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수(山水)가 수려하다는 특징도 있었다.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습에게 산은 세속에서 고뇌를 잠재울 수 있는 자연이 있었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부끄러움 없이 행하고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사실이 끝없이 계속되고 반복되지만, 자연은 그냥 거기에 그 모습으로 늘 있었다.
김시습의 마지막 주 거주지는 양양군 법수치리 검달동의 띠 집이었다. 띠집은 띠풀로 지붕을 올린 집이다. 골 깊은 산골짝에는 논이 없어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볏짚이 있어야 이엉을 엮고 이엉을 지붕에 올려서 초가집을 짓는데 볏짚이 없으니 볏짚이엉 대신 산골짜기에 흔한 띠풀로 띠풀 이엉을 엮어 지붕에 올려 눈비를 막았다. 울타리와 대문은 짐승의 접근을 막을 정도면 되었기에 싸릿대를 엮어 세운 싸리문이면 충분했다.
검달동은 김시습의 놀이터요, 생활 공간이요,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농경지요, 목축지였다. 그리고 시문(詩文)이 솟아오르는 샘터였다. 그러니 자연은 김시습 영육(靈肉)의 모두였다. 이 모두를 충족시켜 주었던 검달동을 비롯한 관동은 김시습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었을까?
유람의 긴 세월 중에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고 유람하고 은거하며 영육이 숨 쉬던 혈육의 고장 강릉에서, 어머니의 본향 울진(지금은 경북이지만)에서, 김화(사곡촌), 금강산, 화천(사탄, 지금은 사내면), 춘천(소양강과 청평사), 인제(오세암), 홍천, 횡성(각림사), 원주(치악산), 평창(오대산, 상원사), 영월(청령포와 주천), 정선, 태백, 삼척, 양양(동산관, 낙진촌, 법수치, 낙산사, 검달동) 등등 관동의 산하(山河)를 누볐다. 이외에도 저자(著者)가 알지 못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을까?
매월당 김시습은 생육신으로서의 절의(節義), 뛰어난 재능, 선구자적 면모, 방외인(方外人)으로 사는 삶,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괴벽한 행동, 은둔생활에 대한 의문(은둔이냐 현실 도피냐) 등은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 조용히 사색하면 도(道)를 수련하여 인생의 터전을 닦는 것) 하였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1492년,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남도 홍산(鴻山, 현재는 부여) 무량사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긴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이이 율곡도 ‘백 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관동인(關東人) 김시습, 일단 손을 놓아주자.
짧은 기간이었고, 애당초 감히 손을 대서는 안 될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기왕 손을 댄 김에 관동 곳곳에 숨어 있던 김시습 시혼(詩魂)의 샘(泉)을 더 많이 깨워 온 나라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게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 보니, 다 파내지는 못했어도 이제 마라톤 출발선에는 함께 손잡고 서 있을 만큼은 된 것 같다. 앞으로 더 지루한 씨름을 하며, 완주(完走)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의 ‘자회(自悔)’를 읽어보자.
스스로 후회하며〔自悔〕 : 64
詩酒淸狂四十年 (시주청광사십년) 시와 술로 마음 비우고 미처 살기 사십 년
如今往事更依然 (여금왕사갱의연)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迷途末遠應須覺 (미도말원응수각)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
擬把□□學地仙 (의파□□학지선)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
〈번안시조〉
시주(詩酒)로 마음 비워 미처 살기 사십여 년
내 삶이 반복돼도, 지금처럼 살아가리
깨닫고 지상선(地上仙) 닮아 옳은 길을 걸었네.
지상선(地上仙)은 하늘로 승천하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며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선을 의미한다. 김시습은 지상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뜻깊은 작품인데, 시어(詩語) 두 자가 누락된 것도 계획적인 듯 기가 막히게 빠져 있다.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빈 자리에 어떤 시어가 채워져 있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이 시는 만년에 쓴 작품이다. ‘시주(詩酒) 사십 년’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거의 육십이 다 되어 쓴 작품이다. 제목을 자회(自悔)라고 썼으나 실제로는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라고 하였다. 잘 살았고, 올곧게 살았다고 자위(自慰)하고 있다. 자기의 삶에 만족한 김시습, 역시 ’김시습‘답다.
일단 여기서 잰걸음을 멈추고 김시습의 오른손을 놓아주자. 그래도, 관동(關東)의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휘적휘적 걷고 있을 매월당. 그 이름 김시습! 그가 말한 천년 뒤가 아니라, 영원히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