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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6054595 |
|---|---|
| 쪽수 | 240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문학
AI추천 이유
- 문학은 어디까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가
남승원의 평론집 『경계선 지우기』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서 ‘경계선’이란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회를 구성하는 실제의 분할선이며, 동시에 문학이 가장 첨예하게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주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 그리고 불안정한 청년 세대는 이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문학과 영화, 이론을 통해 읽어내며, 기존의 비평적 관성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현실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 책의 서문은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사건, 그리고 문학적 사유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일본 작가 요모타 이누히코의 소설 『계엄』을 읽은 직후, 한국 사회에서 실제 계엄 사태가 발생한 경험은 저자로 하여금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게 만든다. 문학은 현실을 예견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자기 세계에 갇히는가. 남승원은 이 질문 앞에서 문학의 무력함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바꾸지 못한다고 해서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문학은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질서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경계선 지우기』의 핵심 문제의식은 기존의 진보 담론이 전제해온 ‘주체’ 개념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다. 노동자 계급이나 시민이라는 범주는 한때 사회 변화를 견인하는 강력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전지구화와 노동의 파편화, 플랫폼 경제의 확산 속에서 이러한 범주는 점차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승원은 이 지점에서 이주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를 호출한다. 이들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시민적 권리와 사회적 보호의 영역에서는 지속적으로 배제되는 존재들이다.
영화 〈로니를 찾아서〉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안산 원곡동이라는 공간은 산업화와 이주 노동의 역사가 중첩된 장소다. 태권도라는 ‘국기’가 상징하는 문화적 정체성과 자율방범대라는 공동체 장치는, 이주노동자를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남승원은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를 선량하거나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신 영화는 시선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시선은 어떻게 권력으로 작동하는가. 이러한 분석은 문학과 영화가 사회적 감각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논의는 이 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유미리의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한 분석은, 불안정 노동이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넘어 존재론적 불안을 낳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평생 노동했음에도 사회적 관계망에서 삭제되어가는 노숙인의 삶은, 국가 발전 서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축제의 시간과 개인의 몰락이 겹쳐질 때, 우리는 ‘누가 시민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남승원은 이 소설의 서사 구조와 목소리의 배치를 통해, 프레카리아트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지는지를 분석한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독백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회적 소음 속에서 차단된다. 이는 프레카리아트가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사회적 서사 속에서는 언제든 삭제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 책에서 문학은 결코 안전한 거리에서 현실을 관조하지 않는다. 남승원은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를 경유하며, 진보의 주체를 특정 집단이 아니라 ‘자리 바꿈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이는 누군가를 대신해 말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이주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의 시민적 안정성을 의심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경계선 지우기』는 문학 비평이 여전히 유효한 사유의 장르임을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특정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작품 하나하나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안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균열을 따라간다. 남승원의 문장은 차분하지만 집요하고, 이론적이지만 현실 감각을 잃지 않는다.
이 평론집은 문학 연구자뿐 아니라, 오늘의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깊은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경계선 지우기』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문학이 어디까지 질문할 수 있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불안정과 배제의 시대에 문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언어일 수 있는 이유가, 이 책 안에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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