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특별한 감사의 말 _이정용
추천의 글 _이선경
옮긴이의 글 _임찬순
1장╻들어가는 말
2장╻주역과 내면의 과정의 기본 철학
3장╻주역과 해럴드
4장╻내면의 과정의 상징, ‘나’
5장╻예수, 인간의 원형
6장╻내면의 십자가
7장╻내면의 왕국
8장╻물질과 영의 내면의 과정
9장╻내면의 정신
10장╻변화하는 과정의 패턴들
11장╻내면의 시간
12장╻환생의 비밀
13장╻소통의 비밀
14장╻공감의 비밀
15장╻무의식의 도덕성
16장╻남자는 여자이고, 여자는 남자입니다
17장╻나가는 말
부록
부록 1_ 2024년 미연합감리교회 총회 후의 신학적 성찰:
지구촌 기독교, 통일 한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소망의 노래
부록 2_ 역과 나 -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치열한 이정용의 구도의 길
[본 문]
음양은 내면의 과정에서 패턴을 이뤄가는 책임을 지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기본 범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의 과정은 이미지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것들은 과정의 패턴을 구조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내면의 현실에서 양극화의 기본 상징입니다. 그러나 음양의 상호 작용은 내면의 현실을 범주화하는 과정인데, 상호 작용이 일어나기 전에는 분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양극화의 과정은 드러남과 발전의 과정, 즉 창조적 과정과 일치합니다. 더욱이 음양의 양극화는 많은 다른 이름들로 알려진 원초적 본성의 선재적 존재(the prior existence of a primordial nature)로 신이나, 도,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2장 _ 주역과 내면의 과정의 기본 철학〉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나’라면, 나는 내면 과정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역에서 발견되고, 해럴드가 제안하는 대로, 예수님은 주역에서 나타난 ‘변화’와 ‘역’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중국의 주역 원문을 명확하고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나뉘어지지 않은 존재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들의 근원과 내면의 현실, 즉 궁극적으로 나눠질 수 없는 원리, 이와 같은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그렇게 해석된)과 주역의 가르침은 아주 강력하게 구조적으로 조화되기 때문에 주역의 궁극자, 즉 태극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나’”에 대한 예수님의 중심적 가르침에 익숙하게 됩니다.
〈4장 _ 내면의 과정의 상징, ‘나’〉 중에서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의 관계를 음양의 도표를 사용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해럴드는 “중성자나 반중성자(anti-neutrino)에서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의 연합은 음양의 상징과 같다”6고 말했습니다. 음양이나 태극도를 관찰한다면, 이것은 완벽한 대칭인데, 영성의 구조적인 상징입니다. 물리성의 상징으로 해럴드는 물질적 에너지의 원초적 단위인 비대칭적 상징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양적인 셋과 음적인 둘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물질적 에너지는 다소 긍정적(positive)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원의 오른쪽은 음이거나 부정적 에너지이고, 원의 왼쪽은 양이거나 긍정적 에너지입니다.
〈8장 _ 물질과 영의 내면의 과정〉 중에서
변화와 변혁의 원리는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큰 것까지 우주 안에서 있는 모든 만물 위에 작용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 자체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것은 하나이고, 역이고, 수학의 원리이고, 우주 가운데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자라는 씨앗과 누룩에 비유했을 때, 이 원리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변화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과 쇠퇴의 개념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메타포에서 온 것인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 23:11-12).
〈10장 _ 변화하는 과정의 패턴들〉 중에서
예수님 또한 내면의 시간을 말했는데, 그 시간은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고, 삶의 모든 형태에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 내면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었고,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내면의 시간은 원초적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은 궁극의 시간이고 신적인 시간입니다. 한편, 예수님에게 외부의 시간은 일시적인 것으로 약속된 시간인데, 그것은 영원한 현존의 차원은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내면의 시간은 외부로 정해진 시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잠재적 시간은 자라나는 씨앗의 운동에 비유되며, 이것은 영원의 상징이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시간을 향해서 확대됩니다. 내면의 시간은 에너지의 원초적 단위 속에 존재하고, 예수님 자신이 상징하는 빛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속에 있는 이들은 만물의 원초적 존재 속에 있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3:15).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 안에 산다는 것인데, 그는 빛의 핵심이고 존재의 원초적 단위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원초적 단위와 함께 있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 즉 영원한 생명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11장 _ 내면의 시간〉 중에서
공감은 윤리의 규범인데,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더욱 활동적입니다. 따라서 윤리는 원칙적으로 무의식의 활동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대부분 윤리나 도덕 이론들은 합리적인 기준틀에 근거한 마음의 의식적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합리적 원칙 때문에 과거의 윤리와 도덕적 결정은 법칙이나 규율처럼 외부의 지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서양의 도덕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하고 불가피한 법률입니다. 예수님은 윤리를 법률적이고 외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혁파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새 율법을 도입했습니다. 따라서 해럴드는 “공감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행동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주님으로 마음과 정신, 영혼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새 율법은 구약의 옛 율법의 반복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옛 율법은 외재적인 기준틀에 근거했지만, 새 율법은 내면의 관계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15장 _ 무의식의 도덕성〉 중에서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안으로 밖을, 밖으로 안을, 위로 밑을 만들 때,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존재로 만들 때, 남성은 남성적이 아니게 되고, 여성은 여성적이 아니게 되어, 너희는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다른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들 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될 것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을 보게 됩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이것이 바로 엘리아데가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입니다. “다른 기록들도 왕국의 이미지처럼 성적인 재결합에 대한 비슷한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적인 공감적 연합은 구원의 상징적 경험, 즉 존재의 이원적 상태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런 종류의 경험에서 남성은 여성이 되고, 여성은 남성이 됩니다. 저쪽은 이쪽이 되고, 이쪽은 저쪽이 됩니다. 음은 상대 짝인 양이 됩니다. 양은 상대 짝인 음이 됩니다. 따라서 양쪽은 모두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하나됨의 경험 속에서 남자는 여자이고, 여자는 남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은 이원론의 세계를 초월해서 구원을 경험하는 전인적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16장 _ 남자는 여자이고, 여자는 남자입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