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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89936594 |
|---|---|
| 쪽수 | 379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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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아우라 뒤에 숨겨진 ‘정직한 노동’의 실체를 기록하다
“조선의 예술은 천재의 영감이 아니라 직업인의 노동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의 예술을 논할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에 담긴 신비로운 이상향이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타난 해학과 유희에만 집중해 왔다. 박물관 유리창 너머로 마주하는 유물들은 세속을 초월한 ‘천재적 영감’의 산물로 비치곤 한다. 그러나 역사 서술가 박영규는 신작 《조선 예술가들의 직업세계》를 통해 이 우아한 감상법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 위대한 미학은 어디에서 왔는가?” 저자의 답은 명쾌하고도 묵직하다. 그것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 앞에 정직했던 이름 없는 직업인들의 ‘치열한 노동’이었다.
이 책은 조선 예술가들을 고고한 예인이 아니라,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하며 생계를 고민하던 ‘직업인’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12가지 예술 직종의 생태계를 복원해냈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기술을 파는 행위는 ‘말업(末業)’으로 치부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그 천시받던 손길들이 견뎌낸 밥벌이의 무게 위에서 피어났다.
제1부: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환쟁이라 불려도 왕의 얼굴을 그린다”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조선 예술가들의 삶을 파고든다.
제1부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조선의 시각 매체를 전담했던 화가들의 세계를 다룬다. 특히 ‘도화서 화원’을 다룬 대목은 흥미롭다. 그들은 오늘날의 전문직 공무원과 같았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안광을 쏟으며 왕의 얼굴(어진)과 국가 행사를 기록했지만, 사회적 대우는 ‘환쟁이’라는 비칭에 머물렀다. 저자는 화원들의 구체적인 일과와 녹봉(월급), 그리고 장승업과 같은 스타 화가의 그림 값 등을 상세히 제시하며 그들의 경제적 실체를 파헤친다. 여기에 선비들의 자존이었던 문인화, 장터에서 엽전 몇 닢에 팔리던 민화, 그리고 금기시된 인간의 욕망을 담은 춘화까지 아우르며 조선의 화단이 어떻게 거대한 ‘직업 시장’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제2부: 소리와 몸짓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장터의 흙먼지 속에서 피어난 소리”
제2부 ‘소리와 몸짓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장터와 사랑방을 흔들었던 공연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천역의 신분임에도 국가 의례를 지켰던 장악원 악공들, 단 한 번의 통곡 같은 소리를 내기 위해 폭포 아래서 피를 토했던 판소리 명창들의 ‘득음 투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광대와 재담꾼을 다룬 장에서는 그들의 ‘흥행 경제학’을 분석한다. 줄타기와 땅재주로 대중을 매료시켰던 사당패가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고 수익을 배분했는지, 판소리가 어떻게 후원자 신재효를 만나 근대적 예술로 격상되었는지를 지적인 시선으로 조망한다. 또한 예술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 기생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한국 근대 예술의 요람인 권번으로 이어졌는지 그 계보를 추적한다.
제3부: 손끝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들
“이름은 지워졌으나 작품은 남았다”
제3부 ‘손끝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조선 미학의 실질적 토대인 장인들의 역사다. 백자를 빚기 위해 평생 뜨거운 가마 불과 씨름한 도공, 옻칠과 나전으로 찰나의 빛을 영원으로 박제한 공예가, 나무의 성질을 읽어 궁궐과 사찰을 세운 대목장들. 이들은 대부분 기록에서 이름조차 사라진 ‘무명의 존재’들이었다. 저자는 이들을 ‘이름 없는 거인들’이라 명명하며,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 속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수난과 이를 극복해낸 장인 정신의 고귀함을 복원한다.
왜 지금 ‘조선 예술가의 밥벌이’인가?
K-컬처의 뿌리, 신분적 멸시를 견디고 피워낸 ‘직업적 자존’
박영규 작가가 이토록 예술가들의 ‘밥벌이’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가 예찬하는 한국 문화의 근본적인 에너지가 바로 이들의 ‘직업적 자존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의 억압과 가난이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붓과 소리와 손끝을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단순히 고귀한 취미가 아니라, 세상의 멸시를 견뎌내는 유일한 수단이자 삶을 일궈내는 가장 정직한 투쟁이었다.
“예술가이기 전에 직업인이었던 그들의 생존기가 오늘날 각자의 일터에서 밥벌이의 고단함을 견뎌내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영감이 되길 바란다”는 저자의 말은 인문학적 깊이를 넘어 삶에 대한 뜨거운 응원으로 다가온다.
《조선 예술가들의 직업세계》는 단순한 역사 지식의 전달을 넘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정직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어떻게 ‘예술’이라는 정점으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시대를 읽는 가장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미시사이자, 이름 없는 거장들에게 바치는 가장 다정한 헌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