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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69574532 |
|---|---|
| 쪽수 | 440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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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세이/시 >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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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는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이 멈추었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생긴 금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분단 이후의 시간은 제도와 경제만이 아니라, 말과 표정, 마을의 공기까지 바꾸어 놓았다. 누가 어느 편에 섰는지, 어느 집안의 아들인지가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던 세월. 겉으로는 평온했으나 속으로는 서로를 경계하던 시선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봉합되지 못한 채 굳어, 다음 세대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스며듦을 다룬다. 한 마을, 몇 사람의 얼굴을 통해 분단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길들였는지, 그들의 깊은 상처를 보여준다.
아버지들의 세대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침묵했고, 체면을 위해 선을 그었으며, 때로는 이념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멀리했다. 그들의 침묵은 비겁함이라기보다 시대의 압박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해와 해결은 다르다. 풀지 못한 갈등은 응어리로 남았고, 그 응어리는 고스란히 자식 세대의 몫이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그 응어리 위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세대를 이어온 핍박과 괴롭힘 앞에서 망설임 없이 나서는 태도,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지 않는 태도, 약자를 위해 몸을 내어주는 결단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들에게 정의라는 말은 추상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주인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낙인과 단절을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진다. 아버지 세대가 남긴 선을 넘어, 다른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젊은 세대의 순수한 의지를 존중한다. 그들의 질문은 정당하다. 왜 아직도 ‘그 집안’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지, 왜 과거의 이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해야 하는지 묻는 일은 자연스럽다.
이 소설은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옳다고 믿는 마음이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의를 향한 발걸음이 법의 경계를 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갈등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서술한다.
그중 ‘사부님’이라는 인물은 갈등을 직면하게 만드는 존재다. 산기슭 황토집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그는 한편으로는 따뜻한 어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이 사부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개인의 정의가 공동체의 질서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 갈등을 푸는 방식이 또 다른 갈등을 낳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조용히 짚는다. 작가의 주장은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공동체를 지키려는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등장인물들의 사건, 그리고 자수와 재판의 과정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등장인물들은 변명으로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선택한 행동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려 한다. 판결은 누구에게도 통쾌하지 않다. 오히려 무겁고 담담하다.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시간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정의를 말하기 전에 책임을 생각하게 되고, 분노보다 감당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재판이라는 ‘해소’, 그 판결 이후 마을의 균열은 조금씩 움직인다. 오래 이어진 소송이 취하되고, 왕래가 끊겼던 집안 사이에 조심스러운 인사가 오간다. 취하서 한 장은 종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더는 이 갈등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다음 세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슬프도록 단순했다. 갈등을 만들지 말고, 생겼다면 풀어야 한다는 것! 그 말은 아버지들에게 지나온 삶의 후회처럼 들릴 것이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갈등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가 겪어온 이념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동시에 그 상처를 증오로 덮지 않는다. 아버지들의 시대가 남긴 금이 아들들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반복이 아닌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희망! 그것은 승리의 깃발처럼 펄럭이지 않는다. 대신 인정과 사과, 책임과 내려놓음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다. 갈등을 넘어선다는 말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분열의 시간을 지나온 우리에게 이 소설은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이름과 집안으로 사람을 나누고 있지는 않은지, 과거의 금을 새로운 분노로 덮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갈등을 넘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책임을 통해 매듭을 푸는 자리에서 시작됨을 작가는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