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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59068302 |
|---|---|
| 쪽수 | 452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AI추천 이유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 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6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간을 꼽으라면 1970년대라고 할 것이다. 1970년대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그 두 얼굴 가운데 ‘전태일’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고, ‘경부고속도로’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한 참혹한 노동 실태의 현장이었던 서울 평화시장은 “공간적으로 당시 민중들의 삶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희생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형성을 뒷받침한 요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그러한 ‘요람’에서 짜낸 피와 땀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낳고 촉진시킨 발전과 번영의 수혜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전태일은 독재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언론, 경제발전 지상주의라고 하는 거센 물결 속에서 ‘경제동물화’되어 갔던 중산층과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까지 보여주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 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 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던져졌고, 권력과 부(富)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것을 웅변해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19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한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으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한 생존술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그 생존술은 자연스러운 문화로까지 정착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70~1972년, 제2권은 1973~1975년, 제3권은 1976~197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4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 포항종합제철 준공
1969년 12월 3일 포항종합제철 공장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간 기본협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지원 자금은 총 1억 2,370만 달러로 이 가운데 청구권 자금이 7,370만 달러, 일본 수출입 은행의 연불(年拂) 융자가 5,000만 달러였다. 박정희 정권은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1970년 1월 1일 철강공업육성법을 제정했다. 이는 포항종합제철을 육성하기 위한 법이었다. 포항종합제철의 기공식은 1970년 4월 1일에 거행되었고, 1973년 6월 8일 첫 화입식(火入式)을 가졌으며,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연인원 81만 명의 건설 인력과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3배에 이르는 공사비를 투입해 여의도 3배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연간 103만 톤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춘데다 준공하자마자 생산 규모 확장에 들어간 포항종합제철은 울산석유화학 공업단지와 함께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룬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박태준은 직원들에게 “포철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포항제철 준공식 연설에서 박태준이란 이름을 3번이나 언급한 것도 그의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포항제철 완공을 위해 기울인 관심과 지원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박정희는 모든 주요 건설공사에서 예외 없이 공사비의 10%씩 거둬들였던 정치자금을 포항제철만큼은 면제시켜주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포항제철을 13차례나 방문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포항제철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1973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한국 경제에 미국보다 더 중요한 나라로 부상했다. 일본은 미국을 앞질러 수출입이 모두 한국 제1위 상대국이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미국 대신 일본에 의존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
1973년 12월 24일 각계 민주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날 민주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김종필은 개헌 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고, 박정희도 직접 나서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두는 바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살벌한 경고도 서명운동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서명운동 일주일 후인 1974년 1월 1일에 5만 명을 넘어섰고 1월 8일엔 10만 명에 육박했다. 그날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3,000여 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 후에 가두시위를 벌였고, 5일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지지했다. 7일엔 문학인 61명의 이름으로 개헌 지지 성명이 나왔고, 8일엔 제1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을 위한 전력 경주를 다짐했다.
박정희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휘두른 긴급조치라는 칼은 법대로 따지자면 박정희 자신이 선포한 유신헌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비방 또는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만 해도 군사재판에 넘겨 15년간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또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못 박아 “유신헌법은 개정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규정으로 우상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조건 입 닫으라는 것이었다. 1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와 백기완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했고, 1월 21일 도시산업선교회의 김경락·김진홍·박윤수·이규상·이해학·인명진 등 교회 목사와 전도사 11명을 구속했다. 1월 26일 개헌 지지 성명을 낸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등 5명의 문인을 구속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
1975년 4월 8일,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 피고인 38명에 대한 상고심 판결 공판이 열린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사형 판결을 받았던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사형수들은 사형을 당한 후에도 모독을 당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이 사형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반성한 것처럼 유언까지 조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그는 후일 “크나큰 실책이라면 인혁당 8명을 처형한 것이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고백했다. 1995년 4월 25일 MBC가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도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는 답이 나왔다. 이 ‘사법 살인’에 대해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수들의 가족이 당한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사형수들이 사형당하기 전 그들의 아내들을 연행해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온갖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가하면서 “남편이 간첩과 같은 행동을 했다. 앞으로는 구명운동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사형수 가족들은 평균 3개월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해야만 했고, 변호사조차 제대로 만날 수 없었으며, 재판은 물론 사후 재판 기록조차 볼 수 없었다. 1998년 10월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고, 그해 11월 9일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2015년 5월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가요 금지곡 양산과 대마초 파동
1975년 5월 13일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와 시위 금지 등도 포함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방송계에도 찬바람을 몰고 왔는데, 5개항의 실천 사항과 6개항의 방송 금지사항이 있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의 살벌한 분위기는 가요계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1975년 한 해에만 225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포크 음악계는 ‘대마초 파동’까지 가세해 파국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대마초 단속은 1975년 12월 1일부터 시작되어 12월 3일에는 이장희·이종용·윤형주 등 27명이 구속되었고, 12월 6일에는 신중현·김추자·권용남·손학래 등 신중현 사단의 핵심 인물들이 구속되었다.
1974년 그룹사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적 록’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신중현은 대마초 파동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미인>은 1974년 당시로선 놀랍게도 레코드가 100만 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신중현이 만든 수십 개의 곡은 ‘가요계 정화 조치’라는 미명하에 금지곡으로 묶이게 되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인>에서 <봄비>에 이르기까지 당시 히트했던 신중현의 노래들은 모두 사랑을 표현했던 것들이다.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노래들 가운데 금지된 곡은 1969년에서 1974년까지 4곡, 1975년 한 해에만 17곡이나 되었다. 우회적 은유와 풍자도 금지 이유가 되었으니 모든 게 ‘엿장수 마음대로’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국심을 담은 <뭉치자>의 금지 이유는 ‘방송 부적’이었다. 나라 위해, 평화 위해 뭉치자는 내용의 곡인데 ‘방송 부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곡을 금지시킨 이유는 데모가로 쓰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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