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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94939092 |
|---|---|
| 쪽수 | 144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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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알몸인 저 개펄은
회임 중이다
쏟아부은 짜장 뻘 들판에
살아 거품 무는 동굴 속이
물먹은 대머리 무용수
허공을 춤추는 다리들
율포 바다 세발낙지
뿜어내는 탄소 독을 삼키며
어둠을 움직이는 바다
상한 상처
혀로 핥는 부활의 힘
탯줄로 이어지는 자궁
만삭으로 먹물 쏟는 숨결
뻘 가슴팍에 구멍 뚫는 낙지들
성깔이 찐득하다
-⸢개펄은 회임 중」 전문
시인은 갯벌이 회임한 것을 본다. 갯벌이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갯벌이 살아 있음을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갯벌과의 오랜 조우가 낳은 상상력이다. 즐겨 먹는 짜장면에 짜장 같은 갯벌에 구멍을 내고 살고 있는 낙지를 대머리 무용수로 만들어 내는 묘사가 재미있다. 무용수는 허공에 다리를 비틀며 생의 마지막 춤을 춘다. 썰물이 나간 후 남는 율포리 개펄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배출된 탄소를 정화시켜주는 공학적 지식을 다져와 개펄이 병든 지구의 상처를 혀로 핥아 부활시켜주는 어머니 같다고 말해 준다. 탯줄로 이어진 뻘자궁 속에서 만삭이 되어 먹물을 쏘아내는 낙지의 모습은 뻘 가슴에 구멍을 내는 성질머리가 고약하다. 마지막 ‘찐득하다’는 징헌 남도 정서를 담고 있는 맛깔나는 묘사다. 한 번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끈질기다는 의미와 지속적으로 엉겨 붙는다는 두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갯벌이 지닌 속성을 해안가 어민들의 성정을 잘 드러내 주는 어감을 담은 이미지다. 이 언어는 갯벌과 낙지와 갯벌에서 삶을 영위하는 갯가 사람들의 끈끈한 삶을 한 단어 속에 함축해 넣은 걸쭉한 표현어다. 이런 표현은 주희령 시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밤 깊어
어둠이 나를 접은 자리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방 한편,
손끝에 작은 문 하나 있다
스위치를 켠다
빛이 켜지는 대신
잠든 내 목소리가 켜진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내 앞길들이
빛으로 가는 실이 되어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다
스위치를 켠다는 건
내 안에 나를
다시 불러내는 빛을 부른다는 걸
나는 안다
-⸢스위치를 켜다」 전문
이 작품은 나와 나 사이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밤이 깊어 어둠이 나를 접어 방안으로 밀어 넣고 잠들라 이른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방안에서 문 하나를 발견한다. 문은 사이를 연결해 주는 통로다. 통로를 통해 나서기 위해 스위치를 켠다. 빛을 불어 들이기 위한 행동이지만 빛 대신 내 목소리가 켜진다. 그렇게 스스로 밝히는 어둠 속에서 발견한 것은 문 저쪽에 존재하는 나의 목소리다. 그동안 사라졌다고 여겼던 나의 길들이 펼쳐진다. 가느다란 빛 줄기로 어둠 속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스위치를 켠다는 것은 바로 나를 찾기 위해 빛을 불러오는 것임을 스스로 자각한다.
주희령 시인이 발견하는 사이는 나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한 통로를 안고 있는 문과 같은 존재다. 어둠 속에서 문을 발견하고 어둠 저쪽으로 나가기 위해 불을 켠다. 그곳에는 나의 목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내가 나를 찾은 것이다. 결국 사이는 자아를 찾기위한 방편임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그것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주희령 시인이 찾은 은유는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더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