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Part 1. 인생 지도를 업데이트할 시간
― 새로운 지형 위에 선 그리스도인
1. 예수님이라면 이 보라색 도시에서 어떻게 사실까?
2. 방관자로 겉돌 것인가, 나그네로 들어갈 것인가
3.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두신 이유가 있다
Part 2. 정체성은 명료하게
― 독보적인 그리스도의 ‘다르심’을 높이는 일상
4. 잃어버린 ‘증인’의 이름표를 되찾다
5. ‘구별된 걸음’으로 생명력을 퍼뜨리다
6. ‘신실한 현존’으로 이웃에 큰 기쁨을 안기다
7. 투표지 너머의 정치, 정당보다 먼저인 하나님 나라
Part 3. 삶은 조용하게
― 세상을 감동시키는 아름답고 탁월한 일상
창조 명령을 수행한다
8. “미완의 세상을 가꾸는 즐거움”
탁월함을 추구한다
9.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일할 때”
세상에 거룩함을 비춘다
10. “그분 성품 따라 정직하고 너그러운 행실로”
구속의 은혜를 보여 준다
11. “하나님 셈법으로 차려 내는 넉넉한 잔치”
선교적 사명을 진척시킨다
12. “내가 밟는 모든 곳이 선교지”
Part 4. 증언은 담대하게
― 우리 왕과 왕의 나라를 우렁차게 선포하는 일상
큰 소리로 용기를 내라
13. “사적 고백을 넘어 공적 증언의 광장으로”
큰 소리로 기뻐하라
14. “냉소의 시대를 멈춰 세우는 가장 강력한 변증”
큰 소리로 후히 베풀라
15. “적대적인 세상을 당황시키는 파격적인 관대함”
16. 큰 소리로 환대하라
“사랑의 온기로, 낯선 이들에게 집을 열 때”
17.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도록 구하라
“신실한 순종 위에 더해지는 초자연적 확증”
에필로그. 왕의 길을 예비하며 세상을 뒤집는 일상 혁명가
[본 문]
<20-21쪽 중에서>
다니엘서는 특히 흥미롭다. 구약에 이중 언어로 기록된 책이 몇 권 안 되는데 그중 하나가 다니엘서다. 도입부와 종결부는 히브리어라서 주로 유대인을 위해 쓴 책임을 알 수 있지만, 내러티브 부분은 바벨론(바빌로니아) 언어인 아람어로 기술되었다. 모든 사건이 바벨론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BC 6세기에 정복 국가 바벨론이 유대 민족을 포로로 끌어갈 때 다니엘도 그 무리에 있었다.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바벨론은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살랐다〕”(대하 36:19).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궁에서 일하며 바벨론의 학문과 풍습을 익혀, 말하자면 바벨론학 석사를 취득하도록 선발된 정예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을 장악한 뒤 그들을 앞세워 동족 포로들을 바벨론의 충직한 신민으로 개종시키려는 것이 느부갓네살왕의 치밀한 속셈이었다.
고국을 떠나와 환경이 바뀌다 보니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지침대로 살아갈 수 없는 부분이 생겼다. 정결의식, 제례와 절기, 사회 구조에 대한 모세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상전인 느부갓네살 정부는 정복과 폭력과 불의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야말로 ‘왕좌의 게임’에 휘말린 다니엘은 그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아내야 했다.
도입부와 종결부는 히브리어로, 중심 이야기는 아람어로 기록된 이 책의 독특한 구조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이 있다. 바로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신실할 줄 아는 너희가 ‘아람어로도’ 신실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문화적 ‘언어’가 완전히 다른 곳, 옳고 그름의 성경적 정의가 뒤집힌 곳, 마땅히 슬퍼할 일에 환호하고 명예로운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곳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을까?
다니엘의 경험은 비참하고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놀라웠다. 그는 바벨론 왕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게 했다. 하지만 주변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색할 만큼 튀었고,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남들이 먹는 것을 먹지 않았고, 남들이 무릎 꿇을 때 서 있었으며, 남들이 서 있을 때 무릎을 꿇었다. 그는 철저히 역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사자 굴에 던져질 정도였지만, 동시에 어찌나 큰 사랑을 받았던지 금령을 내려 그를 던지게 한 왕조차 그를 잃을까 봐 근심하며 밤을 지새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52-53쪽 중에서>
예수님도 자신의 사역을 아버지께서 이미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7, 1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왜 자신이 베데스다 못가의 특정한 병자만 고쳐 주시고 나머지는 다 그냥 두셨는지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맥락에서 나왔다. 그날 못가에 병자가 많았지만 그분은 한 사람만 고쳐 주셨다. 아버지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그분이 아셨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어 마음에 새겨 보라. 예수님도 사역을 스스로 주도하지 않으셨다. 사역에서 그분의 핵심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곁에서 하고 계신 일, 나를 불러 동참하게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였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가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잘못된 것이다. 이는 현대의 바벨론에서 신실한 삶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려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다. 단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이냐의 문제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얻을 곳은 바로 그분이 일하고 계신 그곳이다.
<59쪽 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하나님이 내 곁에서 늘 일하고 계심을 인식해야 한다. 어디에 있든 내가 할 일은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을 찾아내 거기에 동참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내 손에 영적 자석이 들려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주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석을 대 보아, 하나님이 작업 중이신 ‘쇠붙이’가 누구인지 분별해 보려는 것이다. 교육 목사가 새벽 6시, 공항 대합실에서 바로 그 일을 하는 동안, 듀크대학교에는 동일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수고하는 동료가 있었다. 하나님이 이 모두를 한데 엮어 아름다운 구원의 이야기를 이루신 결과로, 정처 없이 방황하던 한 여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얻었다.
사실 그날 아침에 그 교육 목사는 이런 상황을 구상하면서 집을 나선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행기 좌석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아 한껏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고 한다! 한 사람 차이로 자리를 놓쳤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그 좌석을 대신 차지하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기내에서 그의 말소리가 그 여성에게 잘 들리게 하시려고 말이다.
사회라는 이름의 비행기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더는 ‘일등석’이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일로 우리는 좌절할 수 있다. ‘긍정적 세계’에서는 그런 특권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바로 그곳에 두신다. 그분이 일하고 계신 대상이 있기에 우리에게 그들의 사연을 듣게 하신다.
자신이 어쩌다 현재의 상황에 이르렀는지 의아한가? 왜 하필 이 학교, 이 직장, 이 옆집 사람이란 말인가? 당신이 그 자리에 있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어떨까? 적어도 현재로서는 말이다. 그분의 뜻에 저항하기보다 당신의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 하늘 아버지가 문득 당신에게 보이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어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 우리가 생각하던 최고의 계획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분의 계획이 훨씬 낫다.
<132쪽 중에서>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고 그러려면 종종 어둠의 일을 책망해야 하지만, 그 일을 우리는 거대한 사랑의 프로젝트라는 정황 속에서 해 나간다. 우리 지역이 우리를 생각할 때 맨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우리 교회가 그들과 나누는 사랑과 은혜다. 우리가 경고하는 말도 바로 그 정황 속에서 그들이 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곳에 있음으로 인해 도시에 “큰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세상에 동화되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것도 아니다. 도시에 동화하여 우리만의 독특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느부갓네살에게 천국을 가리켜 보일 능력을 상실한다. 맛을 잃은 소금이 더 이상 갈증을 일으키지 못하듯 말이다. 그러나 소금 통 안에만 갇힌 소금 역시 갈증을 일으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읍”을 품고 힘써 복을 끼쳐야 하며,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구주와 왕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분은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로버트 루이스가 저서 The Church of Irresistible Influence(불가항력적 영향력의 교회)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각자의 지역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를 바란다. “이상한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을 우리는 아직 믿지 않지만,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세금을 올려야 할 것이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에 따르면 그가 기독교인을 미워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가 가난한 자들을 워낙 많이 도와주다 보니 그렇게 못 하고 있는 로마 정부에 수치를 안겼다는 것이다.
<250쪽 중에서>
회개란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회개란 내게 무엇이 옳은지를 내가 가장 잘 정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핵심 주장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바벨론 사람들이 우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때는 우리가 메시지를 그들의 취향에 맞춰 재단할 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들을 귀를 열어 주실 때뿐이다. 그런 변화를 그분은 타협할 줄 모르는 담대한 증언을 통해서만 일으키신다. 메시지를 수정하는 영리한 마케팅을 통해서는 결코 역사하지 않으신다.
<262쪽 중에서>
용기의 시험대는 세대마다 다르다. 더는 논란거리가 못 되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담대하다고 자축할 것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공공연한 인종 차별에 맞서는 데 필요한 용기는 1860년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비하면 훨씬 덜하다. 반면, 태아의 신성한 생명,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별,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배타성 등을 증언하려면 오늘날 훨씬 더 용감해야 한다.
마르틴 루터의 말로 알려진 오래된 인용구가 있다. “군인의 용기를 시험하려면 전투가 끝난 곳이 아니라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서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버티는지를 봐야 한다.” 우리의 용기는 주변 문화가 무릎 꿇는 순간에도 우리가 기꺼이 서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나타난다.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적 예언은 세상의 가치관에 성경 구절만 붙여서 그대로 따라 하는 말일 때가 많다. 우리의 용기는 그들이 죄로 인정하기는커녕 덕목으로 칭송하는 온갖 불의에 우리가 당당히 맞설 때 비로소 나타난다. 진정한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용기야말로 바벨론에 하나님의 능력을 실어 나르는 도관이다.
<270쪽 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영광스러운 유산을 확신하기에 우리가 문제투성이 인생길을 기쁘게 걸어갈 때, 비로소 이 땅의 느부갓네살들은 천국의 실재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 얼마든지 기도로 치유와 공급을 구하고, 구한 대로 주실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기도한 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는 그 또한 그분이 빛날 더 큰 기회임을 알라. 아무리 고통스러운 길일지라도 당신의 인생이라는 판지를 영원의 관점에서 뒤집어 보면, 분명히 “헛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병이 나을 때만 아니라 병든 그리스도인이 잘 죽을 때도 영광을 받으신다.
질병, 고난, 재정 파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고난은 쓰라린 것이며, 나도 일부러 고난을 자처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하나님이 당신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실 때는 이를 그분의 계획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을 증언할 기회로 활용하라는 말이다. 실제로 고난은 복음을 증언할 좋은 기회다. 인생은 짧지만 영원은 말 그대로 영원하다. 현세의 모든 불운은 바울의 표현대로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다(고후 4:17, 새번역).
<273-274쪽 중에서>
종종 이런 의문이 든다. “바울은 왜 지진을 하나님이 자신을 석방해 주시려는 기적으로 보지 않았을까?” 불과 몇 장 앞에서 베드로는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 주어 감옥에서 풀려났다(행 12:5-19). 바울에게도 하나님은 지진을 통해 똑같이 일하신 게 아닐까? 바울은 하나님이 단지 자신을 석방하시는 것보다 훨씬 크고 나은 일을 하고 계심을 감지했다. 그분이 바울을 빌립보에 보내신 것은 그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포로’로 가득한 그 도시를 향해 하나님이 그들도 풀어 주실 수 있음을 증언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증언하는 최선의 길은 감옥에 갇힌 그 몇 시간 동안 빌립보 간수의 영혼에 집중하는 것이다. 바울이 간수의 마음을 얻은 것은 어떠한 철학적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기쁨과 파격적인 관대함을 통해서였다.
우리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하면 이것이 때로 어떠한 설교로도 전할 수 없는 명징한 울림을 준다. 고난 중의 기쁨은 소망을 외치고, 그 소망을 보며 바벨론 시민들은 이런 의문을 품는다. “저 기쁨은 어디서 올까? 나도 저렇게 되고 싶은데!”(벧전 3:15 참조)
팀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전문가가 돼야 하는데 ……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즐거움과 복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이 드러난다. 바벨론에서 무엇 하나에라도 전문가가 되고자 애쓸 거라면, 하나님께 기쁨의 전문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러면 당신이 불속을 걸을 때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고, 불꽃을 통과하는 당신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과 평안을 보며 놀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서 냉소에 그을린 머리털을 보거나 절망에 탄 옷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자신들이 마음속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와 기쁨만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고난은 기회다. 고난을 즐길 필요는 없지만 낭비하지도 말라. 바벨론에서 고난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 성능의 메가폰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