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왜 농촌경제학인가? 이 물음 앞에서 한국 경제학은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농업경제학은 생산함수와 가격이론의 틀 안에서 농가의 미시적 의사결정을 정밀하게 분석해 왔으나 그 시선이 농장 울타리를 넘어 농촌이라는 공간 전체로 확장된 적은 드물었다. 지역경제학은 공간을 변수로 도입하였으나 도시의 집적경제를 설명하는데 주력한 나머지 저밀도 공간의 고유한 작동원리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사회적경제론은 공동체의 잠재력을 조명하였으나 거시적 산업구조와의 연결이 느슨했고, 식품경제학은 푸드시스템이라는 확장된 분석단위를 제안하였으나 농촌의 다기능적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생산과 생활, 공동체와 생태, 서비스와 정주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분석체계는 부재했다. 이 책은 바로 그 학문적 공백에서 출발한다.
집필의 또 다른 동인은 농촌이 직면한 위기의 성격자체가 달라졌다는 현실 인식이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 서비스 접근성의 악화, 생활권의 축소는 개별현상이 아니라 순환적 피드백 구조를 형성하며 정주체계 전반을 침식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농업생산성, 에너지체계, 생태계서비스를 동시에 압박하고, 디지털 전환은 새로운 기회의 창과 새로운 배제의 골을 함께 열어 놓고 있다. 이처럼 경제와 사회와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복합적으로 분출하는 도전을 어느 한 분과학문의 관점만으로 포착하기란 어렵다. 농촌의 작동원리를 해명하는 독립된 분석체계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본서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농촌경제학』은 이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본서는 농촌을 농업의 부속공간이 아니라 생산과 생활, 공동체와 생태, 서비스와 정주가 통합된 복합경제체계로 파악하며, 경제-사회-공간의 삼각구조 모형을 전체논의를 관통하는 핵심 분석틀로 제시한다. 경제 축은 농업을 넘어 농촌형 제조업, 관광, 재생에너지, 바이오산업, 디지털경제에 이르는 다층적 산업생태계를 포괄한다. 사회 축은 인구동학, 가구경제, 노동시장, 협동조합, 사회적농업, 돌봄경제 등 농촌의 사회적 재생산 구조를 다룬다. 공간 축은 토지이용, 생활SOC, 정주체계, 금융시스템, 디지털 인프라 등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물리적·제도적 무대의 구조와 격차를 규명한다. 본서가 추구하는 학문적 지향은 이 세 축이 서로를 제약하고 강화하는 상호작용을 밝히는 데 있다.
본서는 총 13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농촌경제학의 학문적 범위와 문제의식을 정립하고 기존 분과학문과의 차별성 및 통합성을 논의한다. 제2장은 한국 농촌개념의 역사적 변천과 국제적 농촌정의를 비교하며 농촌성의 구성요소와 현대적 확장을 다룬다. 제3장은 공간경제 이론, 사회적경제·커먼즈 이론, 회복탄력성 이론, 제도경제학, 농업경제학, 식품경제학 등 본서의 이론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정초하고, 경제-사회-공간 삼각구조 모형을 정식화한다. 제4장에서 제6장까지는 농촌의 인구구조와 정주체계, 가구소득과 생활경제, 공동체 조직과 사회적 자본을 분석하며, 제7장은 농촌 산업구조의 다층화를 농식품산업, 융복합산업, 먹거리체계, 관광, 재생에너지, 디지털화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제8장과 제9장은 농촌의 공간구조·토지이용 및 금융시스템을 다루고, 제10장은 농촌 개발정책의 역사적 전개와 정치경제학적 해석, 국제비교를 제시한다. 제11장은 농촌경제 분석방법론을 이질성·공간성·인과성의 정초에서 복합계 분석과 설계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제12장은 농촌 기본사회론과 기본소득, 보편서비스의 경제학을 논의한다. 마지막 제13장은 소멸담론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을 제기하고 성장이론에서 문명유지 경제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한다.
집필과정에서 견지한 원칙은 세 가지이다. 첫째, 모든 논의를 경제학의 이론적 언어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농촌문제를 서술적으로 기술하거나 정책적 제언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효용함수, 생산함수, 거래비용식, 후생지표, 공간접근성 모형 등 경제학의 분석도구를 동원하여 농촌현상이 지닌 구조적 논리를 해명하고자 했다. 둘째, 농촌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이론모형의 제약조건과 계수 안에 내재화하는 것이다. 저밀도, 고령화, 이동성 제약, 시장규모의 한계, 인프라 희소성이 효용함수의 제약항이나 거래비용 함수의 계수, 수요·공급의 탄력성 구조에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각 장에서 일관되게 추적하였다. 셋째, 이론적 귀결을 먼저 도출한 뒤에야 정책적 함의를 연결하는 순서를 엄격히 지킨 것이다. 후생경제학적 판단과 제도경제학적 분석이 정책논의에 선행하도록 설계함으로써 이론적 근거 없는 정책처방이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였다.
본서가 제안하는 가장 도전적인 학문적 시도는 제13장에 집약되어 있다. 이 장은 '농촌은 소멸하는가?'라는 물음을 문명사의 시야로 끌어올려 마스다 히로야의 소멸론이 전제하는 인구결정론적 서사에 대해 경제학·생태학·문명사를 아우르는 체계적 반론을 전개한다. Diamond(2005)가 『문명의 붕괴』에서 분석한 사회붕괴의 조건, Polanyi(1944)가 『거대한 전환』에서 경고한 허구적 상품화의 파국, Acemoglu와 Robinson(2012)이 규명한 포용적 제도와 문명존속의 관계를 종합하여 농촌의 문제는 단순한 지역문제가 아니라 문명기반의 침식이라는 명제를 도출한다.
이러한 문명사적 진단 위에서 본서는 독자적인 분석모형과 이론적 법칙을 제시한다. 먼저 CIVRES(Civilizational Resilience) 모형은 경제스파인(Economic Spine), 사회스파인(Social Spine), 공간스파인(Spatial Spine)이라는 세 개의 구조적 축이 상호작용하며 문명회복 탄력성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정식화한다. 경제스파인은 식량안보, 에너지 자립, 자원순환 등 물질적 재생산의 기반을, 사회스파인은 신뢰, 호혜, 공동체 규범 등 사회적 재생산의 기반을, 공간스파인은 정주체계, 생태계서비스, 국토균형 등 공간적 재생산의 기반을 각각 지칭한다. CIVRES 모형의 핵심 명제는 이 세 스파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임계치 이하로 떨어질 때 문명시스템 전체가 비가역적 취약성에 노출된다는 것이며 농촌은 이 세 스파인이 물리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문명유지의 최전선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본서는 이 모형을 토대로 성장이론에서 문명유지 경제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전통적 성장이론이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를 핵심 질문으로 삼았다면 문명유지 경제학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 식량안보, 수자원 함양, 탄소흡수, 생물다양성 보전, 사회적 신뢰의 유지라는 비시장적 기반이 허물어질 때 포용적 제도 역시 함께 무너진다는 인식 위에서 본서는 농촌에 대한 투자가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시스템 붕괴를 예방하는 거시적 보험이라는 명제를 정식화한다. 회복탄력성은 자연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설계를 통해 형성되며 그 설계의 핵심 대상이 바로 농촌이라는 것이 본서가 도달한 결론이다.
본서가 농업·농촌 연구자와 현장 실무자의 새로운 조망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농촌경제학이 독립된 학문 분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이론체계의 구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후속 세대들이 이 체계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농촌이라는 살아 있는 현장에서 이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본서에 담긴 모형과 분석틀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검증과 수정과 재구성을 기다리는 출발점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디딤돌 삼아 농촌경제의 현장으로 나아가 이론이 닿지 못하는 현실의 지혜를 배우고, 다시 그 현실을 이론의 언어로 번역하여 학문적 엄밀함 속에 녹여내는 순환을 이어가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집필 과정에서 아낌없는 학문적 조언과 비판을 보내 주신 지역농업네트워크 동료들과 농촌현장에서 실천의 지혜를 나누어 주신 농업인, 마을활동가, 지방자치단체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본서의 모든 한계와 오류는 전적으로 저자의 몫이다. 독자들의 엄정한 비판을 통해 후속판에서 보완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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