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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4324669 |
|---|---|
| 쪽수 | 168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의사소통은 가장 예쁜 조약돌을 주워
서로의 머리에 찍는 일”
아름다운 오류를 일으키는 게임적 상상력
언어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시적 루프
게임적 상상력을 시적 언어로 가동하며,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크런치 모드’를 인간의 새로운 차원으로 그려낸 시집. 이자연의 첫 번째 시집 『크런치 모드』가 아침달 시집 56으로 출간되었다.
“독특한 언어감과 예상 불가능한 전개 과정이 만드는 파편적 흐름이 흥미”(큐레이터 박소란)롭다는 평과 “강한 덕후력으로 현실과 게임 판타지가 엮인 ‘이야기하기'를 질주하는 시”(큐레이터 정한아)라는 평을 받으며 독창적인 시 세계를 단단한 원고로 구현해낸 시집이기도 하다. 총 5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게임적 요소를 적극 동원하는 시, 신과 종교를 이웃 삼아 대결하는 시, 인간에게 누적되는 피로와 상처를 유머로 변장시키며 끝없이 돌파하는 시들로 엮여 있다. 단순히 게임적 상상력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테마로서 한 인간의 실패한 로그(log) 기록, 한 세계가 간직한 크랙(crack)의 발견.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크런치 모드’라는 인간의 임계점으로부터 출발해 비로소 시집 『크런치 모드』라는 아름다운 오류로 도착한다.
이자연의 시는 행과 행을 밀착해 시적 논리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행과 행, 연과 연이라는 시 안에서의 연결점을 서로 밀어내게 만들며 언어가 일구는 저항으로부터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이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우리 세계에 놓인 균열을 읽어보게 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과열된 삶이 스스로를 정돈하지 못하고 파열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작동 방식은 언어를 파편적으로 나열하는 문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아가 지극히 인간적인 기질, 인간의 연약한 말과 마음의 영역에도 닿아 우리가 머물러 있는 맵(map)을 새로운 각도로 투시하게 만든다. 언뜻 오류처럼 보였으나 시라는 형식으로 오류를 마음에 체류하게 만든 다음, 새로운 지도를 구성해 다쳤던 마음을 복원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산문 형식의 시 없이 행간의 낙차를 적극 활용한 시에는 끼어들 여지가 많아 있는 그대로 풍성하다. 또한, 이번 시집에서 다층적으로 나타나는 ‘불’의 이미지는 세계에 대한 각오처럼 다양한 지점에서 지펴지는 소재 중 하나다. ‘크런치 모드’로 불타오른 뒤 남은 재가 되어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이 불씨는 사람의 마음에 옮겨지거나 자신 스스로 일으킨 불꽃이 되어 시집 전반을 이끄는 상상력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왜 내 마음이 불타오를까요”(「없는 집」) “불이 나 다 타버린 산사”(「살」) “불꽃의 마을에서 세를 받던 영주”(「단명」) “된장을 불에 볶으면 더 고소해진다”(「괴성」) “처음 본 사람에게 불도 빌릴 수 있고 반말도 할 수 있다”(「사랑의 게임」)처럼 다양한 곳에 번져 새로운 국면을 만드는 방식으로 삶의 곳곳에 적용된다. 소진된 형상으로서의 불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서의 불을 밝히며 시집은 더 깊은 지도(map)를 향해 간다.
“이름은 왜 필요할까? 난 너를 알아볼 수 있는데”
NPC 동료들에게 말 걸기, 친구 하기
종료되지 않는 게임을 영원히 실행하기
이자연의 시에는 무수히 많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귀신, 동굴이라는 이름의 동물, 수도사, 스님, 양철 나무꾼, 허수아비, 부장님, 도로시, 여관 주인장, 생쥐, 사형 집행자, 여우, 수녀…… 무수한 캐릭터들은 삶에서 존재했으나 배경처럼 놓여 있던 존재 혹은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NPC)이기도 하다. 이자연의 시는 NPC를 동료 삼아 말을 걸고 우정을 나누고 불화하기도 한다. 한 편에 서서 동료가 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NPC에게 발언권을 부여하면서 갖게 되는 새롭고 신선한 장면들은 시적 울림을 만들며 다가온다. 이들 가운데 ‘이자연’이라는 캐릭터는 발화하는 주체인 자신이자, 누군가의 NPC처럼 움직인다. “바람꽃이라는 집단”(「불의 발걸음」)이 되어 있었다 다시 사라지는, 그 홀연한 등장과 퇴장을 의연하게 그리며 많은 캐릭터를 시에 등장시키는 것은 그의 게임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자 시의 새로운 활력이 된다. “너는 길을 잃은 자구나?/ 나는 너처럼 길을 잃은 자가 좋아” 함께 길을 잃었다는 절망이 아니라 함께 모험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치환하는 것 또한 시인이 시를 통해 발견한 절체절명 순간의 처세술이다.
“어디선가 본 단어를 쓰고/ 어디선가 겪은 무너짐을 반복하”(「이게 정말 주인님이 원한 모습입니까」)는 삶의 굴레 속에서 시인은 자기 삶에서 벌어진 일들을 토대로 완성되지 않을 게임을 만든다. 특히, 부록으로 수록된 산문 「미친 사람」은 게임 시나리오 같은 독특한 전개를 앞세워 소설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등장하는 인물과 대화, 상황 설정은 어쩐지 한 번쯤 겪어보았을 법한 삶의 장면들을 드리우게 한다.
“당신 눈에 드리웠던 먹구름은 어디 갔어요?/ 나는 그거 좋았는데”(「불의 발걸음」) 누군가의 눈에 드리운 먹구름을 발견하고 함께 우거진 어둠 속을 나아가려는 시인의 시적 루프에 있는 힘껏 빠져들고 싶어진다. 어떤 오류도 세상을 새롭게 읽어낼 방법처럼 느껴진다. 시인이 인간의 마음이나 말과 같이 가장 약점으로 꼽을 만한 연약한 장소를 게임과 시라는 레이어를 축적 시켜 가장 무모해도 좋을, 자유도를 발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탄생시킨다는 점. 『크런치 모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이 시들을 우리 삶에 능동적으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등장시키는 모드로 적용하여 지금까지 누벼본 적 없는 시의 지도를 걸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의 말]
이 책을 열면 강가에서 NPC를 만난다.
“당신은 나를 칼을 들고 다니는
불량 청소년쯤으로 봤지. 하지만 알아야 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제 당신의 길을 찾아가.”
—죽어가는 병사의 말
그렇게 게임이 시작된다.
2026년 5월
이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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