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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30823775 |
|---|---|
| 쪽수 | 616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양장 |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역사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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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역사 자체를 기술하는 것과 다르다. 이미 지나간 역사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문학작품의 의미는 더더욱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 해석과 평가가 달라진다. 문학사의 서술은 그래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문학사는 문학작품에 반영된 사회사 또는 문학사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29권의 시집을 펴낸 현역 시인이자, 35년간 강단을 지켜온 학자이기도 한 오세영 교수가 정년 이후 20년 만에 정리를 완료한 역작이다. 신시운동부터 2000년대 탈이데올로기 시대까지 100여 년의 시대를 가로지르고, 시의 장르 정립부터 격동의 근현대사와 함께 부침했던 온갖 문학사조들에 대대 분석하였으며, 개화기의 계몽주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친일어용문학과 전쟁시, 민중시, 노동시, 농민시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의 사회 변화를 반영해온 시문학의 흐름을 통시적으로 추적하였다. 수많은 시인과 그들의 작품을 논하며, 김수영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등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 예리한 비평을 가한 점도 눈에 띈다.
'책머리에' 중에서
우리 근현대시문학사(近現代詩文學史)는 개화기 신시운동(新詩運動)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제 백여 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선학(先學)들의 노고에 힘입어 그 연구 역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시사(詩史)를 바라보는 학계의 태도가 아직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선학들의 논의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초창기 연구자들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당시의 우리 학문적 풍토에서 많은 공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자료의 미흡, 역사의식 결여, 개척자로서의 시행착오, 방법론의 결핍, 비평적 안목의 부재 등으로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어느 정도 학문적 성과를 축적한 오늘, 우리는 이에 토대해서 보다 냉철하게 우리의 시문학사를 한 번쯤 점검해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일반 역사와 문학사는 물론 모두 대상을 ‘시간의 축’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전자는 그 자신 생성 소멸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그 인간이 만들어놓은 어떤 ‘노작(勞作, quelque chose = artefact)’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문예학에서 문학사 기술에 대한 회의론이 적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따른다. 하르트만(Geoffry H. Hartman)이 ‘역사 연구는 기록(document)에 관련되어 있으나 문학 연구는 기록체(monument)에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던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그 작업이 확실하고도 필연적인 증거에 토대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재구하면 일단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 의미는 주체가 대면할 때마다 순간순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문학작품의 의미는 해나 달처럼 혹은 뜰에 놓여 있는 정원석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임진왜란은 그 자체로 이미 종결된 사건이지만 춘향의 러브스토리는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느껴지고, 다시 살아나는 현존적(現存的) 사건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지닌 이 같은 성격은 그 사적(史的) 기술을 어렵게 만든다. 문예학의 논의에 있어서 문학사 기술이, 극단적으로, 그 자체가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주장까지도 제기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사’라 여기고 있는 기존의 업적들도 엄밀히 살펴보면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대개 문학작품에 반영된 사회사이거나, 문학의 사조사(思潮史)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문학에 대한 역사 기술을 아예 포기해버린 연대기적(年代記的, chronicle) 서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필자라고 문학사 기술이 지닌 이 같은 본질적 한계성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본서가 우리의 시를, 훌륭한 시인이나 뛰어난 작품들 중심으로 한 인과관계나 이의 시간적 계기로 서술하지 못하고 정치사나 사회사 혹은 시대 이념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고충이 여기에 있다.
한편 문학의 학(學)에서 문학사 기술이란 항상 연구의 최종 단계에서나 시도해봄직한 분야이다. 개개의 작품 해독과 시인 연구, 이의 학문적 분석과 비평적 가치 평가, 동시대와의 관련성과 통시대적 이해, 비교문학적 영향 관계와 사조사적 탐색 등이 끝나 그것을 최종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35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정년한 지 다시 20년 만에 겨우 본서의 집필을 한번 가늠해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디 후학들의 준열한 비판과 편달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