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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88937409615 |
|---|---|
| 쪽수 | 144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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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없는 세계를 응시하는 힘
너는 지금까지도 오래 걸렸고 마지막은 멀었다는 것을 잘 아는
앞뒤 잘려 나간 장면
영문을 모르는 표정
너는 너를 구원할 수 없는 구원자
너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을 뿐이다
-「장구한 파멸」에서
기계적 신성에 지배당한 시대에는 숏폼처럼 ‘앞뒤 잘려 나간 장면’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그 안에서 ‘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겨우 존재한다. 인간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행하는 최후의 저항인 죽음마저 알고리즘 안에서는 더 이상 전복의 힘을 갖지 못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변혁의 능력을 잃은 채로 보존됨으로써 폐쇄된다. 희박해진 주체에게 신화는 ‘겨우 조각만 남은 이야기’일 뿐이고 ‘유통기한이 지난 신’은 휴지통에 버려진다.(「카르만 라인」) 현 시대를 향한 윤의섭의 냉정한 시선은 그러나 냉소주의나 패배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쉽사리 끝나지 않을 듯한 ‘장구한 파멸’의 시대에 주체의 유통기한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윤의섭은 기능의 회복이 아닌 노이즈 되기를 제안한다.
■ 측정 불가능한 것이 되기
결말을 말해 줄게 나는 멸망한 지구로 돌아가 내가 항해일지를 조작한 거였지
(……)
산다는 건 긴 복선이다 어떤 떡밥은 끝내 회수되지 못한다
산다는 건 그러니까 긴 예언이다 불행해야 행복해진다는 믿기 힘든 결말도 있다
-「서바이벌」에서
알고리즘은 ‘나’의 선택을 반영하여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듯하지만, 구성 원리로부터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상 주권 박탈의 기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을 데이터화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알고리즘의 눈을 피해 ‘멸망한 지구’로 돌아가는 움직임은 알고리즘의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일이다. 알고리즘의 궤도를 벗어난 곳에는 ‘멸망한 지구’뿐 아니라 ‘어머니의 목소리’, ‘늙은 나무에서 물 흐르는 소리’, ‘구름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같은 ‘환청’이 있다.(「음속」) 윤의섭의 시편은 기계적 신성이 포착할 수 없는 잔여를 조금씩 만들어 감으로써 “인간적 주파수”를 보존한다. 이렇듯 『장구한 파멸』은 시라는 형식 속에서 인간의 유통기한을 조금씩 연장하는 조용한 저항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