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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72541316 |
|---|---|
| 쪽수 | 316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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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가족의 역사에서 지워진 사람이야.
그래서 내 이야기를 직접 써야 해.”
디아스포라·퀴어 문학의 정점 리 랑그바드의 대표작
소외된 존재를 포착하고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문학이 오래도록 붙잡아온 역할이다. 한국의 역사적 상흔을 경험한 재일조선인이나 이민자 1~3세대, 탈북민 등 다양한 디아스포라 서사가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주목받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나의 통역사》는 그중 상대적으로 공백으로 남아 있는 해외입양인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주인공이 원가족을 만나기 위해 수년간 한국을 방문한다. 친부모의 언어를 말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는 함께 한국에 온 한국계 덴마크인 통역사에게 의지하며 가족과 만남을 이어나간다. ‘어느 삼계탕집’에서 ‘어느 피자헛’으로, ‘큰언니 집’에서 ‘부모님 댁’으로 장소가 전환되며 이어지는 대화는 이방인의 시선 속 ‘동시대 한국’이라는 배경 위에서 섬세하게 펼쳐진다.
전작《그 여자는 화가 난다》를 통해 입양인이자 퀴어라는 이중의 소수성을 다룬 바 있는 작가 리 랑그바드는 《나의 통역사》에서 이를 한층 날카롭게 그려내며 “입양인이나 퀴어로 살아가는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뛰어난 ‘번역자’”라는 호평을 받았다. 수년간 만남을 이어왔지만 여전히 통역 없이는 소통이 불가능하고, 말해지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더욱 많은 가족과의 대화. 주인공은 회의감과 함께 문득 자신이 레즈비언이며 통역사는 여자친구임을 밝히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타국으로 입양되었던 그녀가, 언니들의 남편과 조카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그녀가 이 비밀을 말할 때, 가족들은 만남을 지속하려 할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소설은 가족, 언어, 문화를 잃었지만 자신의 뿌리와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주인공의 여정과 그 내면의 분투를 아프지만 따뜻하게 그려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망과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교차시키며, 소설은 입양인이자 퀴어라는 특수한 경험을 보편의 감각으로까지 열어놓는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통역하고 해명해야 했던 이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소설이다.
“그 말은 내가 통역하지 않을게.”
대사와 공백으로 빚어내는
연결과 단절이라는 문학적 경험
《나의 통역사》에는 인물 간 대화가 대사와 지문으로 직접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장황한 설명이나 불필요한 묘사는 없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동시에, 특정한 순간에 오래 머물게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재미와 여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깊은 슬픔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임에도 통역되기 전까지는 아주 사소한 말도 나눌 수 없다. 표정, 행동, 어조 같은 비언어적 소통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리 랑그바드는 한국어라는 미지의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두며, 언어의 장벽뿐 아니라 감정적인 거리감마저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거리감을 일시적으로 완화해주는 것이 바로 통역사다.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통역사를 “당신과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공유하는 특별한 반려자”라고 표현했다. 한국계 덴마크인이자 그의 여자친구인 통역사는 언어를 변환해주며 가족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그뿐 아니라 관계에서 오가는 말을 조율하고, 대화 중 흐르는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 ‘나’-통역사-가족이라는 흥미로운 삼각 구도에서 언뜻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주인공에게 세계를 받아들이는 틀을 제공하고 그들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는 주인공이 친부를 내내 북한 출신으로 알아왔으나 그가 죽은 후에야 이것이 통역의 오류로 인한 오해였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나, 통역사가 가족의 반응을 두려워하며 주인공의 커밍아웃을 통역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장면 등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로써 그간 언어에 덧씌워져 있던 환상이 벗겨진다. 언어가 나를 설명하고 상대를 알아가게 하며 우리를 연결시키리라는 환상. 《나의 통역사》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단절, 그리고 통역할 수 없는 감정을 행간에서 은근하게 드러내며 때로는 침묵이 언어보다 더욱 무겁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내비친다.
“트라우마를 넘어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이야기”
시와 소설을 비롯한 여러 예술 형식을 가로지르며 입양, 퀴어,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해온 리 랑그바드는 《나의 통역사》에서 마침내 기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언어를 구축해냈다. 바로 ‘침묵의 언어’다. 작품의 주인공처럼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그는 덴마크어, 영어, 한국어로 이 작품을 쓰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개의 가족, 문화, 역사를 안고 있음에도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원래 언어, 우리 자신의 입양 서류, 그리고 우리가 왜 입양됐는지에 대한 진실”이라는 ‘공백’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디아스포라에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언어”, 침묵의 언어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다. 이는 《딸에 대하여》 작가 김혜진이 추천사에서 말하듯 “디아스포라의 영토 안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해나가는 서글프고 완강한 투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시도,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하는 이 시도는 작품 속 주인공과도 겹쳐진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어렸을 적 이별했으나 재회하게 된 자신의 존재를 언니들이 왜 남편과 조카들에게 알리지 않는지, 어째서 자신을 입양 보내게 했던 가부장적인 구조가 지금까지 반복되는지, 왜 어떤 말은 할 수 있고 어떤 말은 할 수 없는지.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사랑이란 (중략)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당신의 세계를 기어코 알고자 하는 열망의 몸짓”임을 짚으며 주인공의 여정을 ‘사랑’으로 해석해낸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와 그들의 딸들, 그리고 조카로 이어지는 가족 3대와 해외입양인 여성 ‘나’의 재결합을 그린 이 소설에서 인물들의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다만 리 랑그바드는 결말을 희망의 방향으로 열어놓는다. 《나의 통역사》는 “언어의 장벽, 문화적 차이, 세대 간 격차, 그리고 트라우마를 넘어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회복하고 치유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