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서문
1부 사건과 사건 이후
1. 공동체의 재명명: <족보>
2. 반복되는 사건의 연결: <쥬라기의 사람들>
2부 흐르는 애도
1. 위로부터의 애도: <호모 세파라투스>
2. 미완의 애도와 미완의 봄: <봄날>
3부 죽음의 정치
1. 상실의 추체험: <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
2. 애도 (불)가능성: <칠산리>
4부 애도공간
1. 무대와 실험공간: <셋>, <다섯>
2. 대안공간과 무경계의 상상력: <느낌, 극락 같은>
후기
참고 문헌
[본 문]
많은 문학 작품에서 ‘죽음’은 극단적 결말을 만드는 요소로 취급되었다. 등장인물이 죽는지 죽지 않는지가 희곡을 비롯해 일반적 문학 장르에서 작품의 결말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를 가리는 판정 조건의 역할을 해왔다. 현실에서라면 슬픔과 비통함을 견인할 요소가 무대 위에서는 얼마든지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문학장에서 재현되는 소재로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을 의미화해 그 일부의 기표로서만 기능한다. (8쪽)
‘포스트–유신 체제’ 혹은 ‘장기 80년대’라는 말은 양적 발전과 질적 좌절이 벌리는 격차를 이어 붙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장기 80년대’라는 조어가 말하는 정서의 지속을 두고, 이강백의 1980년대 희곡에 전회하며 드러나는 정치성과 애도의 역학을 살피기로 한다. (16쪽)
버틀러와 데리다의 관점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두 논의 모두 프로이트의 차원을 넘어 애도의 윤리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애도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중요한 가치를 상실한 자를, 즉 애도 주체를 영원히 바꿔놓을 수 있다고 분석한 버틀러의 논의와 완전한 애도는 수행 불가능하며 수행 불가능해야만 한다는 데리다의 논의에 기대어 분석을 진행한다. (23~24쪽)
프로이트의 방식대로 설명되어온 기존의 애도가 에너지를 떼어내 다른 대상에 이동하는 움직임에 한정되어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를 물리치는 데에 그 역할이 있다면 이 글에서 다루는 애도작업은 기존의 애도가 지닌 망각의 위험성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행위로서 투쟁이 된다. 종험이 알던 집안의 내력과 ‘족보’를 통해 새롭게 본 집안의 내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이미 기억된 것이 기억되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55쪽)
자신들에게 상실이 일어났다는 것을 몰랐던 대중이 앎을 통해 비로소 분노에 이르렀지만 그들이 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려는 ‘폭도’적 행동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직까지 이강백의 대중 혹은 군중관에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청산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이 강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종험 또는 세 남매가 아닌 ‘집’ 공간을 무대에 남김으로써 이 공간으로 대표되는 죄의식에의 요구가 극을 닫는다. (65쪽)
애도를 정치적으로 보는 데에 〈쥬라기의 사람들〉의 희생자 최씨는 ‘유령’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책임 소재의 확정과 제도적 변화에의 요구인데 〈쥬라기의 사람들〉의 이강백은 아직까지 이를 개인의 ‘죄의식’ 속에서 찾으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희생자의 가시화는 이뤄져 있다. 희생자를 목격한 개인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을 겪은 이후의 이강백이자 이강백이 상정한 관객일 것이라는 점에서 능동적 애도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집단 기억을 통해 견인된 상실의 발견이 비로소 애도로 이어지려는 조짐을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다. (79쪽)
이강백의 1980년대 희곡 두 편에서 애도작업의 요구는 〈족보〉에서는 ‘죄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쥬라기의 사람들〉에서는 죽음에 대한 ‘진실’의 명백한 증언으로 소환된다. 이 지점까지 이강백이 제시하는 해답은 진실을 본 개인의 진심 어린 반성과 진술이며 군중 혹은 대중의 역할에는 그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풀의 논의를 빌려올 때 그것은 참사의 책임이 있는 자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발전 도상 중에 있는 애도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같은 사건들이 반복되었고 반복되며 반복되리라는 것이 그 배면에 있는 한 차이의 발생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가능성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 (87쪽)
공적 애도의 형태는, 즉 국가적, 도시적 ‘기념비’ 만들기 행위는 타인의 행동을 제어해 의식에 참여하게끔 강제한다는 점에서 폭력성을 띠고 자유를 침해한다. 죽음을 명명하면서 유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정의하고, 그 안에 있을 ‘해결될 수 없는’ 타자를 내사해 흡수하며 그런 과정에서 죽은 자를 승화시키거나 재의미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께 갈 수 없는 죽은 자들에게 함께 가기를 요구하는 것이며 등장하지 않는 유령을 의미화함으로써 살아 있는 인간을 유족으로 정의해 그 정체성의 일부를 변형시킨다. (119쪽)
〈호모 세파라투스〉에서의 국가적 애도는 특정한 형태가 고정된 애도였다. 죽음이 국가적 영웅 행위로 의미화되면서 진정하고 불가능한 애도의 수행은 막혔다. 희곡은 관객이라는 군중의 이미지를 객석에 끊임없이 제시하고 그들과 시선을 동일시할 것을 제안하면서 사이–공간이 아닌 한, 즉 이미 규정된 공간인 한 애도는 불가능할 것임을 드러낸다. 〈봄날〉에는 애도 불가능한 공간과 그 공간 내외부에서의 애도 시도가 나타난다. 애도작업과 애도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개인의 죄의식이나 대속적 뉘우침에서 찾은 〈족보〉와 〈쥬라기의 사람들〉과는 달리 1980년대를 겪으면서 이강백은 ‘군중’이라는 항을 애도 주체의 자리에 놓기 시작한다. 그것은 〈호모 세파라투스〉에서는 국가 권력과 착종된 형태로, 〈봄날〉에서는 탈주해야만 사유할 수 있는 제한적 인간으로 보인다. (141쪽)
〈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의 무대는 그 자체로 완결되고 완성된 하나의 닫힌 세계로서 죽음만이 도래하거나 도래할 세계를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고, 싸울 수 없는 것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인물들이 처해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 폭력은 무대의 벽화에 조응되어 관객 앞에 구현된다. (159쪽)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혹은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끊임없이 반복해 말하기를 통해 기억은 역사로 정초될 가능성을 지니고 애도작업의 수행성을 제시한다. 끊임없는 반복과 수행으로 보이더라도 수행 불가능한 애도작업의 본질을 통해 이강백은 거대한 애도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시대의 지난함을 상기시키고 그 어떤 초월성으로도 메우지 못할 ‘막내’의 빈자리가 있음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1990년대 이후의 작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다고 본다. (192쪽)
투안이나 아스만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은 그 자체로 물성을 지니고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 보족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간성을 언급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공간은 생산되고 그것은 실천적 인간의 인위적 행위다. 바흐친의 주체는 대화에서 비롯한 분열 중에서 단수가 아니며 주체 스스로가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한다. 바람직한 주체란 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함의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공간의 생산 과정과 공간의 의미화 과정에, 즉 ‘공간성’을 생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다. (209쪽)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양화된 공간성을 강요하며 억압에서 해방되는 길은 지배 공간과 다른 공간의 생산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르페브르와 짐멜을 동원해 대도시의 일상이 지배 질서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음을 밝힌다면 주로 실내의 고정된 배경을 사용하며 무대 배경의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이강백 희곡의 닫힌 공간은 일종의 실험실로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호모 세파라투스〉의 공공성은 공간적이다. 비단 작품 속에서 그것이 이쪽과 저쪽이라는 한국 전쟁 이후의 분단을 환유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공적이기에 그러하다. (238쪽)
애도는 상실을 정리하는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부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며 끝내 봉합되지 않는 틈을 견디는 태도다. 애도는 수행 불가능해야만 한다는 말은 남은 자가 죽은 이를 내부로 완전히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타자로 남겨둬야 한다는 명령이다. 타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한 인간 삶의 공통분모로서 문학은 애도의 장이 된다. 그러나 그 방식이 위로와 공감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은 상실을 매끄럽게 의미화하려는 충동을 제지한다. 문학은 사물의 배치를 재조정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감각의 질서를 흔들 때만이 유의미하다.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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