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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9056824 |
|---|---|
| 쪽수 | 200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수필
AI추천 이유















그런 인생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1
손대원 님을 처음 만난 것은 제가 강의했던 ‘함께 읽고 쓰는 책모임’ 시간이었습니다. 희끗한 머리칼은 단정했고, 눈매는 날카로웠습니다. 말 한마디 가볍게 흘리지 않을 듯한 인상이어서 젊은 강사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지 내심 걱정되었습니다. 수업이 거듭되며 첫인상이 조금씩 허물어졌습니다. 경상도와 충청도 말씨가 섞인 말투가 정겨웠고, 툭툭 던지는 농담이 재밌었습니다.
손대원 님은 합평 과제로 ‘티미한 놈’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때 ‘어리석다’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 ‘티미하다’를 처음 알았습니다. 글을 쓴 이유를 물으니,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티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나이 들어 돌아봐도 아버지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글에는 아버지 앞에서 티미했던 저자의 지난 삶이 담겨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니,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고 똥지게를 나르는 열세 살 소년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빨리 끝내고 놀 생각으로 구덩이를 대충 파서, 똥물을 치우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혼나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수학 교사를 하겠다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티미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글을 다 읽고 알았습니다. 티미한 놈이라는 말 안에 담긴 깊은 애정을. 아버지는 막 제대한 아들의 손을 잡고 서예학원으로 갔습니다. 판서와 서류 작업을 휘갈겨 쓴 글씨로는 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자는 “아버지는 아들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티미한 놈을 티미하지 않은 놈으로 고쳐주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직장을 중간에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다 끝맺지 못했고 아버지의 노력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글을 끝맺습니다. “삶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고, 배고픔을 알고 나서야 낮추고 굽히고 겸손해질 줄 알았다. 실패와 좌절은 쓰지만 가르침을 주었다. 지금은 연금 없이 노인 일자리에서 일하며 기초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초라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티미한 놈이 맞다.”
2
저의 아버지는 손대원 님보다 네 살 위로, 같은 세대입니다. 아버지는 일흔이 된 이른 봄, 심한 어지러움 때문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고 여러 검사 끝에 만성 골수증식질환 판정을 받았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제를 먹은 지 두 해가 지났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내고 싶다는 아버지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조급해지는 날들입니다.
아버지의 책을 내는 마음으로 『생각을 여읜 마음』을 만들었습니다. 줄 노트 93장을 빼곡히 채운 친필 원고를 받았을 때, 각기 다른 서른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알맞은 크기로 줄과 줄 사이를 메운 손 글씨를 보는데(아들을 서예학원에 보낸 저자의 부친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난 사실 티미하지 않다’라는.
저는 마흔이 넘어도 아버지가 어렵습니다. 어린 시절 콧노래를 부르다가도 문밖에서 아버지 발소리가 들리면 자는 척을 했습니다. ‘티미한 놈’이라는 말 대신 “네가 커서 뭐가 되겠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 앞에서 티미한 장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생각을 여읜 마음』 곳곳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소리치며 회초리를 들 때는 무서웠지만, 함께 서점에 가고 영화관에 갈 때는 속이 간지러울 만큼 따뜻했습니다.
3
작가는 쓰는 사람입니다. 쓰다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쓰면 전과는 다른 결의 사람이 됩니다. 손대원 님은 티미하지만 티미하지 않습니다. 티미했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티미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한 권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저자는 손자에게 넉넉한 할아버지입니다.
“손자 녀석을 무릎에 앉히고 수업을 함께 보고 들었다. 동영상 시청이 끝나면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과제도 하고, 과제 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 담임 선생님에게 전송하면 일과가 끝났다. 나머지 시간은 손자와 산책도 하고 엎치락뒤치락 장난도 치면서 뒹굴며 놀았다.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18쪽)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의 나이를 계산하며 저자 자신과 비교하는 모습은 유쾌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중심으로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의 나이를 계산해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나이에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는데 그들은 참으로 대단했구나!”(60쪽)
안나와 브론스키가 ‘안놔’와 ‘불온새끼’로 개명하는 과정은 짓궂으면서도 천진합니다. 충청도식 유머에 빠져들었습니다.
“후반부로 가면 안나의 사랑은 집요한 집착으로 변한다. 브론스키는 외친다. “제발 나를 놓아줘! 놓아달란 말이야! 놔! 놓으라고! 안 놔?” 그래서 안나는 ‘안놔’로 개명했다. 한편 브론스키는 행실도 온당하지 않지만 마음도 불온하다. 그래서 ‘불온+스키’가 되고 혀 짧은 소리로 ‘불온새끼’가 되었다나.”(104쪽)
재수생 시절 불교와 인연을 맺고 직업까지 바꾸게 된 사연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1977년 충청도 촌놈이 서울로 재수하러 왔다. 관훈동에 있는 재수종합반 정일학원에 등록했다.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집으로 가거나 단과학원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러 갔다.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 하릴없이 학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쉼터로 발견한 곳이 조계사였다. 경내의 돌덩어리에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돌아왔다.”(160쪽)
서른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손자와 뒹굴며 놀고,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를 계산하며 헛웃음 짓고, 안나의 이름을 ‘안놔’로 바꾸고, 조계사 돌덩어리에 앉아 있던 그를 만났습니다. 티미한 놈이라 꾸짖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자는 손자와 엎치락뒤치락 장난치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인생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 윤혜린((주)도서출판 밤나무 대표, 『엄마의 책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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