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 조문영
특집 리뷰: 살아남기, 살아 내기, 살게 하기
‘경제적으로 멀쩡한 약자’를 위한 변론 · 『필연적 혼자의 시대』 ∥ 박한슬
집단학살의 동시대인이라는 부끄러움, 행동을 향해 내달리는 책 · 『가자란 무엇인가』 ∥ 신지영
너무 기분 좋은 자기 착취 · 『불굴의 챔피언』 ∥ 이연숙
AI 문명의 창세기 · 『새로운 질서』 ∥ 박경렬
위기의 시대, 진화의 지혜 · 『완벽하지 않은 것이 살아남는다』 ∥ 고관수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얻으리라 ·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 하미나
이마고 문디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 대하여∥ 전은지
디자인 리뷰
사이에서 읽기∥ 구정연
북&메이커
서점에서 책을 팔고,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책을 만듭니다∥ 서지애
리뷰
이성의 이름으로, 혼돈과 대결의 시대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철학자 하버마스 · 『분열된 서구』, 『아, 유럽』 ∥ 하상복
실천적 고민과 함께 변화하는 경제학을 위하여 · 『자유란 무엇인가』 ∥ 최정규
누가 말하는 현재와 미래인가 · 『먼저 온 미래』 ∥ 오치민
논픽션과 소설 사이, 자유와 예속 사이 · 『주인 노예 남편 아내』 ∥ 유정훈
ChatGPT를 둘러싼 환상과 신비주의 걷어 내기 · 『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홍성욱
지구의 유한성 앞에서 자본의 한계를 사유하다 · 『인류세와 마르크스』 ∥ 조민서
문학·에세이·카툰
헤매는 시간 ∥ 박서영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 홍한별
벌이는 일 ∥ 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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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책꽂이
[본 문]
‘생존’은 이런 벌거벗은 비극에나 합당한 단어가 아닐까? 하지만 생존 감각으로 따지자면 주변 풍경도 예사롭지 않다. 기술 가속주의가 일자리를 잠식하고 예측 가능성을 불허할 때, 각자가 경쟁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낼 때, 부동산과 학원뿐 아니라 불안과 우울, 차별과 혐오도 함께 증식한다.
―전은지 「편집실에서」, 3쪽
저자가 밝혔듯 그가 공식 ‘인터뷰’ 형태로 만난 1인 가구만 100여 가구가 넘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본인들이 인정하건, 혹은 인정하지 않건 간에 1인 가구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박한슬, 「‘경제적으로 멀쩡한 약자’를 위한 변론」, 18쪽
한국 속 이주민·난민·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과 위계를, 더 나아가 비인간 존재들에 늘 점령자였던 ‘인간’의 가해성을 깊이 물어야 한다. 한국의 위치를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치에 비춰 성찰하는 것도 필요하다. 집단학살은 망각 일반이 아니라, 가해의 망각(amnesia)으로 반복되고 한국도 더 이상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신지영 「집단학살의 동시대인이라는 부끄러움, 행동을 향해 내달리는 책」, 43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중은 마조히즘적 노동자 주체의 가장 강렬하고 직접적인 수행자 모델이다. 그의 말처럼 자기 착취의 연쇄에서도 우리가 늘 한 꼬집의 ‘자랑스러운’ 기분을 착즙하고 ‘향유’한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얼마나 ‘지긋지긋’한가?
―이연숙 「너무 기분 좋은 자기 착취」, 60쪽
과학기술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요청은 더 날카롭게 읽힌다.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외견상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기술이 사회와 인간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결정론적 시각이 그것이다.
―박경렬 「AI 문명의 창세기」, 72쪽
몇 가지 의문이 메시지의 선명함을 가로막지만, 그건 어차피 우리가 마주할 미래의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이 얘기한 대로 다양성은 진화의 기본 재료이며, 생명의 본성이다. 자연은, 진화는 한 종의 운명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고관수 「위기의 시대, 진화의 지혜」, 86쪽
요즈음 나는 다음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 사랑은 지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책을 읽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사랑의 달인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달라고 요구한 뒤 받아 낼 수도 없다. 돈으로 사랑을 구매한 뒤에 내 것인 것처럼 장착하고 다닐 수도 없다.
―하미나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얻으리라」, 89쪽
우리는 생존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로 생각한다. 전쟁, 재난, 극한의 위기에서 살아남는 것. 그 정의 안에서 생존은 특별한 상황에 속한 단어로, 평범한 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전은지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 대하여」, 105쪽
말은 발화되는 순간 사라지지만, 어떤 문장과 장면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미디어버스의 ‘한 시간 총서’는 그렇게 사라지는 말들을 다시 책의 형태로 붙잡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읽기의 단위로 삼아, 한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책의 형식을 상상했다.
―구정연 「사이에서 읽기」, 123쪽
얼마 전, 프리랜서로 일하다 카페를 시작한 언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카페를 열면 내 공간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손님이 있을 때는 구석에 조용히 있어야 해. 내 공간이 아니야.” 내가 서점을 운영하면서 느낀 생각과 닮았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나의 공간이 아니다.
―서지애 「서점에서 책을 팔고,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책을 만듭니다」, 129쪽
트럼프가 호르무즈 해협으로 가는 군함 파견을 5개 나라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날인 3월 14일은 공교롭게도 하버마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근대적 자기 이해의 윤리에 기반한 소통의 실천만이 국제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철학적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시대다.
―하상복 「이성의 이름으로, 혼돈과 대결의 시대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철학자」, 150쪽
인간 행동의 과학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심리적 상태와 규범적 가치를 모두 버린 경제학에 남은 것은 선택 그 자체뿐이었다. 선택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동기와 관련 요인들은 경제학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가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최정규 「실천적 고민과 함께 변화하는 경제학을 위하여」, 155쪽
마지막 장인 10장에서는 이전까지 논의의 중심에 있던 프로 기사, 바둑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쉽다. 그들의 견해가 결론부까지 이어졌더라면 보다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마무리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치민 「누가 말하는 현재와 미래인가」, 176쪽
크래프트 부부의 실화에서 출발하지만, 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실화는 크래프트 부부의 서사를 낳고 그들의 삶을 결정지은 역사적·사회적 배경, 구체적으로 노예제를 둘러싼 분열이 임계치에 이른 당시 미국과 그런 역사의 현재 함의를 보여 주려고 의도한 책이라는 의미다.
―유정훈 「논픽션과 소설 사이, 자유와 예속 사이」, 181쪽
그러나 이것이 AI의 종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카렌 하오가 지적하듯 오히려 이 과정은 과학기술 연구의 보조, 환경 문제 해결, 보건 복지 영역의 증진,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도움 그리고 불평등과 재난 대응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머신 러닝 기반 AI가 다층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홍성욱 「ChatGPT를 둘러싼 환상과 신비주의 걷어 내기」, 206쪽
저자 자신이 책을 통해 모범적으로 보여 주듯이 작고한 사상적 거인들이 남긴 글들을 완결된 체계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논쟁하는 것을 넘어, 그들 역시 마지막까지 고민하며 변화해 갔던 한 사람의 사상가로 읽어내고 그 고민에서 오늘날 필요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말이다.
―조민서 「지구의 유한성 앞에서 자본의 한계를 사유하다」, 211쪽
이제는 인공 지능 덕분에 번역에서 오역 문제는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번역에서 뒤틀림과 균열에 신경 쓰는 대신 그 빛을 바라볼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번역가는 책장을 뜻밖의 빛으로 물들일 기회를 만났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불협화음(cacophony)이 될지 엑소포니가 될지 번역가가 판단하는 지점에 문학이 있다.
―홍한별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233쪽
그들의 전쟁도 끝이 났고, 나도 그 시기를 지나왔다. 그러나 헤매기를 멈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슴 속 태풍이 잦아들었을 뿐 여전히 앉을 자리를 찾아 길을 어슬렁거린다. 더 이상 예고 없이 풀린 운동화 끈에 무너지지는 않지만 사소한 모순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건 매한가지다. 사는 일은 아주 가끔 기쁘고 대부분 싫다.
―박서영 「헤매는 시간」, 211쪽
고립의 시대, 집단학살의 현재, AI 이후의 세계를 되돌아보는 여름
21세기 생존 풍경을 살피다
특집: 살아남기, 살아 내기, 살게 하기
하버마스의 공론장부터 마르크스 생태학까지
혼돈의 시대에 다시 읽는 이성, 자유, 기술과 생태
리뷰
전문 번역가 홍한별과 첫 책을 펴낸 소설가 박서영의 문학·에세이
《서울리뷰오브북스》 22호의 특집 주제는 ‘살아남기, 살아 내기, 살게 하기’다. 이번 호는 ‘생존’을 재난과 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에만 속한 말로 한정하지 않는다.
편집위원 조문영은 “우리는 ‘살다’라는 동사를 새롭게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살아남기와 살아 내기가 무한 반복 중인 루프에서 해방될 방도는 없을까? 이번 호 특집은 이 질문들을 탐색하는 우회로로서 21세기 생존 풍경들을 짚어 본다.”며 22호의 뜻을 밝힌다.
특집 리뷰에는 여섯 권의 책과 여섯 명의 서평자를 통해 21세기의 생존 풍경을 살피며, 살아남는 일과 살아 내는 일, 나아가 타자를 살게 하는 일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박한슬은 김수영의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통해 1인 가구를 ‘생존 풍경’의 전면에 놓는다. 그는 1인 가구를 재생산에 참여하면서도 돌봄에서는 배제되는 취약한 시민으로 읽는다. 신지영은 오카 마리의 『가자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지식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이 책을 “행동을 요청하며 내달리는 책”으로 읽고, 팔레스타인의 죽음과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존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연숙은 『불굴의 챔피언』을 통해 생존 게임과 자기 착취의 감각을 파고든다. 박경렬은 『새로운 질서: AI 이후의 생존 전략』을 “AI 문명의 창세기”로 읽는다. 그는 이 책이 AI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비인간 행위자의 지능’이 열어젖힌 새로운 문명의 시작으로 파악한다고 설명한다. 고관수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 살아남는다』를 통해 ‘적자생존’이라는 오래된 오해를 바로잡는다. 하미나는 이랑의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관한 책으로 읽는다. 그는 이 책이 엄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폭력과 고통의 연대기를 기록하면서도, 읽는 이를 고통 속에만 가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번 호의 특집 문제의식은 다른 코너들로도 이어진다. 전은지는 이마고 문디에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다룬다. 전은지는 “닿을 수 있을지 모르면서도 계속 두드리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선택해 온 생존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구정연의 디자인 리뷰 「사이에서 읽기」, 서지애의 북&메이커 「서점에서 책을 팔고,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책을 만듭니다」를 싣는다. 구정연은 책과 기록이 서로를 참조하고 중첩하며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만드는 방식을 살피고, 서지애는 책과 손님, 제작자와 출판사, 서점 운영자가 서로 존중받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실험을 말한다.
일반 리뷰 역시 이번 호의 중요한 축이다. 하상복은 『분열된 서구』와 『아, 유럽』을 통해, 올해 세상을 떠난 철학자의 사유를 현재의 국제 정치와 연결한다. 최정규는 『자유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경제학이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검토한다. 오치민은 『먼저 온 미래』를 통해 미래를 말하는 주체의 문제와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 AI를 받아들이는 견해의 차이를 살핀다. 유정훈은 『주인 노예 남편 아내』를 통해 논픽션과 소설, 자유와 예속의 경계를 파헤치며 책의 한계와 가능성, 미국 내에서의 인종 차별을 주의 깊게 논한다. 과학기술학자 홍성욱은 『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을 통해 카렌 하오가 묘사하는 샘 올트먼에게서 오펜하이머의 야심과 몰락, 프랑켄슈타인의 욕망과 비극의 그림자를 읽어 낸다. 조민서는 『인류세와 마르크스』를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주의와 탈성장 코뮤니즘의 전망을 진지하게 검토하려는 독자에게 필요한 안내서로 읽는다.
문학·에세이·카툰 코너에서는 번역가 홍한별, 작가 박서영, 만화가 란탄이 글쓰기와 독서, 반복적인 일과 삶의 감각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서리북》 22호는 이처럼 서평, 과학, 정치철학, 경제학, AI, 생태 사유, 디자인, 출판 현장, 에세이와 카툰을 한 지면에 놓으며, 2026년 여름의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살아남고, 어떻게 살아 내며, 누구를 살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