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학대하는 아이는 폭력적인 성인으로 자란다?
저자는 대부분의 무자비한 동물 학대가 타고나기를 나쁜 아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장차 건축가, 진로 상담 교사, 대학교수 등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할 평범한 아이들에 의해 자행된다. 동물 학대가 매우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이 정신 이상적 사이코패스가 왜 잔혹한지를 말해주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었거나, 도덕적으로 눈멀었거나, 혹은 기질적으로 사악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동물 학대와 인간을 향한 폭력이 강한 연관성(link)을 띤다는 생각은 ‘링크(The Link)’라는 용어가 미국동물보호협회(American Humane Association) 소유의 등록 상표가 될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링크 옹호자들이 진행하는 대중 강연은 흔히 비극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먼저,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언급한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동물 학대 전력이 있다고 알려진 소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어 연쇄 살인범이 거론된다. 그들 역시 모두 어린 시절 동물 학대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링크 지지자들은 아동기의 동물 학대와 성인기의 폭력 간 관계를 과장하곤 한다. 물론 두 현상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물 학대가 추후의 폭력을 점치기에 효과적인 예측 요소라는 증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퍼시픽 대학 연구팀은 학교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한 위험 요인을 분석했다. 단연 독보적 요인은 총기에 대한 집착이었으며, 괴롭힘 경험, 폭력적 음악과 미디어에 대한 높은 관심, 사회적 고립, 반사회적 또래 관계 그리고 우울증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확실히 동물 학대는 학교 총기 범죄와 가장 관련이 낮은 요인이었다.
점점 더 많은 연구자가 단순한 ‘링크’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링크 옹호자와 미디어가 대중에게 비이성적인 도덕적 공포를 부추긴다고 우려한다. 링크 회의론자라고 해서 동물 학대를 무시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동물 학대를 관심 있게 다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아이들을 성인 사이코패스로 키우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성차
인간-동물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별 차이와 유사성을 다룬 논문 수백 편을 검토한 끝에, 저자는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동물에게 더 ‘약한 구석’을 지닌다. 둘째,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여겨온 몇몇 고정관념은 사실과 다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빈도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개나 고양이와 노는 방식에서는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동물 실험 같은 쟁점에 대한 태도에서는 성차가 조금 더 두드러지지만, 그래도 남녀의 입장은 상당 부분 겹친다. 뚜렷한 성차가 드러나는 지점은 극단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동물 보호 활동가나 동물 학대자 같은 경우다.
종형 곡선은 성차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동물권 활동가 다수는 여성이고 동물 학대자 다수는 남성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극단적 반려동물 애호가, 이를테면 통상 수준을 벗어나는 호더 가운데는 여성이 남성보다 10배나 더 많다. 반면 가학적 동물 학대자 집단에서는 남녀 비율이 그보다 훨씬 더 남성 쪽으로 치우쳐 있다. 겹친 종형 곡선은 왜 동물권 활동가 가운데 여성 비율이 높은지도 설명해준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동물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동물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성별 내 개인차는 남녀 평균 간 차이보다 한층 크다. 그럼에도 분포의 양쪽 꼬리로 갈수록 남녀는 서로 점점 더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친(親)동물 쪽 극단에서는 ASPCA에 기부하거나 서커스를 보이콧하고 동물권 시위에 참여하는 비율이 여성에서 남성보다 4배나 많다. 반(反)동물 쪽 극단에서는 재미 삼아 동물을 사냥하며 즐거움을 맛보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다.
투계와 인간의 도덕성
저자는 동물과 관련한 여러 도덕적 문제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면서도 투계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연구하면서 만난 투계꾼은 대부분 마음에 들었지만,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는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유물이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전히 투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에서의 도덕적 위선과 상식의 오류에 대해 말해주는 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치킨을 즐겨 먹는 일반 대중이 오늘 밤 투계가 모든 주에서 금지되었다는 사실에 마음 놓고 잠을 청하는 사이, 메릴랜드주와 캘리포니아주에서 작업하는 수많은 닭 수확자는 어두운 육계 사육장에 들어가서 공포에 질린 닭 3500만 마리를 철제 상자에 집어넣어 내일 가공 공장으로 운송할 채비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저자가 박사 학위를 위해 투계를 조사하던 시절, 투계장에 동행한 한 국제앰네스티 직원에게 최정상 투계꾼들과 어울려보니 어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보기에 투계의 도덕적 문제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저자는 여섯 조각짜리 치킨 맥너겟 해피밀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닭이 겪는 고통과 비교할 때, 그의 말이 옳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채식주의와 잡식주의로의 회귀
사람들이 고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대다수 채식주의자에게는 건강상 이유가 가장 큰 동기이며, 도덕적·환경적 이유가 그 뒤를 잇는다. 때로는 채식주의를 선택하게 된 동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느낀 본능적 혐오감 때문에 고기를 멀리하게 된 이는 이후 동물권 운동에 점점 더 깊이 발을 담그면서 자연스럽게 비건이 되었다. 또 다른 이는 종교적 이유에서 건강상 이점 때문으로 바뀌었는데, 다른 생명체의 권리나 고통에 대한 걱정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인구통계학적 요인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 채식주의자는 여성, 백인, 대학 교육을 받은 경우가 평균보다 많다. 채식주의자와 준(準)채식주의자는 불안 성향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에서 평균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동물 복지에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대다수 채식주의자는 처음에는 붉은 고기를 끊고, 이후에는 닭고기와 생선까지 거부한다. 비건의 경우에는 달걀과 유제품마저 끊는다.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동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기를 끊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동물을 먹는 데 반대하는 도덕적 논리를 내면화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채식주의에서 잡식주의로 회귀하는 경우도 많다. 채식주의자들이 도로 동물을 먹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건강 악화다. 하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채식주의자나 비건 생활의 번거로움에 신물이 나서다. 즉, 질 좋은 유기농 채소는 지역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감당하기 벅찬 가격이고, 채식 요리를 준비할 시간도 없으며, 그냥 그 생활 방식 자체에 싫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채식주의자는 불현듯 동물성 고기에 갈망을 느낀다고도 한다.
동물 실험, 그리고 좋은 생쥐와 나쁜 생쥐
인간동물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논리와 감정으로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과학에서 동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우리의 결정 가운데 일부는 더없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동물 연구에 대한 태도는 부분적으로 실험의 잠재적 성과, 동물이 겪을 고통의 정도, 연구에 쓰이는 동물종에 따라 달라진다. 2018년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65퍼센트는 대안이 없을 경우 의학적 목적을 위한 동물 연구에 찬성했지만, 동물에게 화장품 안전 테스트를 실시하는 데 대해서는 단 7퍼센트만이 지지를 표시했다. 또한 조사 대상자의 44퍼센트는 생쥐를 사용한 연구에 찬성했다. 반면, 개나 고양이 연구를 지지한 사람은 14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동물의 도덕적 위상에 대한 우리 관점은 일관성을 잃기도 한다. 이를테면 쥐에 붙이는 꼬리표와 범주 구분이 그렇다. 대학 연구소의 생쥐는, 이를테면 삼나무 냄새가 나는 깔끔한 방에서 지내며 정식 자격을 갖춘 유능한 직원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들 대부분은 ‘좋은 생쥐’다. 그들은 매년 교수,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이 수행하는 수백 건의 생의학 연구 및 행동 연구에 사용되는 실험 대상이다. 이 연구들은 대부분 인간이 겪는 다양한 질환 치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생쥐들은 스스로 선택권이 없었지만, 인간의 이익을 위해 살고 죽는다.
그러나 그 건물에서 살아가는 생쥐 가운데는 ‘나쁜 생쥐’라는 또 다른 범주도 있었다. 그들은 해롭게 취급된다. 형광등이 켜진 기다란 복도를 따라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이따금 사람들 눈에 띄는 존재다. 이들 생쥐는 청결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즉 방들 간의 교차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이다. 이 작은 무법자들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 속의 인간동물학
대다수 사람은 동물이나 자연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부엌에 개미가 들끓어도 절대 죽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물과 연결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인간이 다른 종들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역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즉 그들은 가상의 기차가 한 사람의 노인을 향해 달리게 할 것인지, 아니면 멸종 위기에 놓인 한 무리의 침팬지를 향해 달리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소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가죽 신발은 신는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선적이다. 우리 안의 ‘야수’는 양념을 듬뿍 뿌려 천천히 구워낸 돼지고기 안심 바비큐의 황홀한 맛을 음미한다. 그런가 하면 송아지 고기를 먹지 않고, 행복한 암탉이 낳은 로컬 달걀을 구입하며, 공장식 육계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으리라 믿고 싶어 ‘놓아 기른’ 닭에 기꺼이 돈을 더 지불한다.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저자는 이 책에서 묘사한 명백한 도덕적 불일치 탓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라면서도 고기를 먹는다고 멋쩍게 털어놓는 사람들, 수탉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투계꾼들, 품종을 개량하겠다는 욕망 때문에 유전적 결함을 지닌 개를 대물림해서 만들어내는 순종견 애호가들, 자신이 구조한 수많은 동물을 실제로는 열악한 환경에 방치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호더들. 그러나 저자는 이제 이런 모순이 예외나 위선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그것은 피할 수 없으며, 바로 우리가 인간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동물, 혐오하는 동물, 먹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 행동,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맺는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동물을 학대하는 아이는 폭력적인 성인으로 자란다?
저자는 대부분의 무자비한 동물 학대가 타고나기를 나쁜 아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장차 건축가, 진로 상담 교사, 대학교수 등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할 평범한 아이들에 의해 자행된다. 동물 학대가 매우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이 정신 이상적 사이코패스가 왜 잔혹한지를 말해주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었거나, 도덕적으로 눈멀었거나, 혹은 기질적으로 사악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동물 학대와 인간을 향한 폭력이 강한 연관성(link)을 띤다는 생각은 ‘링크(The Link)’라는 용어가 미국동물보호협회(American Humane Association) 소유의 등록 상표가 될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링크 옹호자들이 진행하는 대중 강연은 흔히 비극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먼저,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언급한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동물 학대 전력이 있다고 알려진 소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어 연쇄 살인범이 거론된다. 그들 역시 모두 어린 시절 동물 학대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링크 지지자들은 아동기의 동물 학대와 성인기의 폭력 간 관계를 과장하곤 한다. 물론 두 현상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물 학대가 추후의 폭력을 점치기에 효과적인 예측 요소라는 증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퍼시픽 대학 연구팀은 학교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한 위험 요인을 분석했다. 단연 독보적 요인은 총기에 대한 집착이었으며, 괴롭힘 경험, 폭력적 음악과 미디어에 대한 높은 관심, 사회적 고립, 반사회적 또래 관계 그리고 우울증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확실히 동물 학대는 학교 총기 범죄와 가장 관련이 낮은 요인이었다.
점점 더 많은 연구자가 단순한 ‘링크’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링크 옹호자와 미디어가 대중에게 비이성적인 도덕적 공포를 부추긴다고 우려한다. 링크 회의론자라고 해서 동물 학대를 무시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동물 학대를 관심 있게 다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아이들을 성인 사이코패스로 키우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성차
인간-동물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별 차이와 유사성을 다룬 논문 수백 편을 검토한 끝에, 저자는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동물에게 더 ‘약한 구석’을 지닌다. 둘째,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여겨온 몇몇 고정관념은 사실과 다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빈도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개나 고양이와 노는 방식에서는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동물 실험 같은 쟁점에 대한 태도에서는 성차가 조금 더 두드러지지만, 그래도 남녀의 입장은 상당 부분 겹친다. 뚜렷한 성차가 드러나는 지점은 극단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동물 보호 활동가나 동물 학대자 같은 경우다.
종형 곡선은 성차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동물권 활동가 다수는 여성이고 동물 학대자 다수는 남성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극단적 반려동물 애호가, 이를테면 통상 수준을 벗어나는 호더 가운데는 여성이 남성보다 10배나 더 많다. 반면 가학적 동물 학대자 집단에서는 남녀 비율이 그보다 훨씬 더 남성 쪽으로 치우쳐 있다. 겹친 종형 곡선은 왜 동물권 활동가 가운데 여성 비율이 높은지도 설명해준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동물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동물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성별 내 개인차는 남녀 평균 간 차이보다 한층 크다. 그럼에도 분포의 양쪽 꼬리로 갈수록 남녀는 서로 점점 더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친(親)동물 쪽 극단에서는 ASPCA에 기부하거나 서커스를 보이콧하고 동물권 시위에 참여하는 비율이 여성에서 남성보다 4배나 많다. 반(反)동물 쪽 극단에서는 재미 삼아 동물을 사냥하며 즐거움을 맛보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다.
투계와 인간의 도덕성
저자는 동물과 관련한 여러 도덕적 문제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면서도 투계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연구하면서 만난 투계꾼은 대부분 마음에 들었지만,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는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유물이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전히 투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에서의 도덕적 위선과 상식의 오류에 대해 말해주는 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치킨을 즐겨 먹는 일반 대중이 오늘 밤 투계가 모든 주에서 금지되었다는 사실에 마음 놓고 잠을 청하는 사이, 메릴랜드주와 캘리포니아주에서 작업하는 수많은 닭 수확자는 어두운 육계 사육장에 들어가서 공포에 질린 닭 3500만 마리를 철제 상자에 집어넣어 내일 가공 공장으로 운송할 채비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저자가 박사 학위를 위해 투계를 조사하던 시절, 투계장에 동행한 한 국제앰네스티 직원에게 최정상 투계꾼들과 어울려보니 어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보기에 투계의 도덕적 문제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저자는 여섯 조각짜리 치킨 맥너겟 해피밀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닭이 겪는 고통과 비교할 때, 그의 말이 옳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채식주의와 잡식주의로의 회귀
사람들이 고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대다수 채식주의자에게는 건강상 이유가 가장 큰 동기이며, 도덕적·환경적 이유가 그 뒤를 잇는다. 때로는 채식주의를 선택하게 된 동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느낀 본능적 혐오감 때문에 고기를 멀리하게 된 이는 이후 동물권 운동에 점점 더 깊이 발을 담그면서 자연스럽게 비건이 되었다. 또 다른 이는 종교적 이유에서 건강상 이점 때문으로 바뀌었는데, 다른 생명체의 권리나 고통에 대한 걱정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인구통계학적 요인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 채식주의자는 여성, 백인, 대학 교육을 받은 경우가 평균보다 많다. 채식주의자와 준(準)채식주의자는 불안 성향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에서 평균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동물 복지에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대다수 채식주의자는 처음에는 붉은 고기를 끊고, 이후에는 닭고기와 생선까지 거부한다. 비건의 경우에는 달걀과 유제품마저 끊는다.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동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기를 끊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동물을 먹는 데 반대하는 도덕적 논리를 내면화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채식주의에서 잡식주의로 회귀하는 경우도 많다. 채식주의자들이 도로 동물을 먹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건강 악화다. 하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채식주의자나 비건 생활의 번거로움에 신물이 나서다. 즉, 질 좋은 유기농 채소는 지역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감당하기 벅찬 가격이고, 채식 요리를 준비할 시간도 없으며, 그냥 그 생활 방식 자체에 싫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채식주의자는 불현듯 동물성 고기에 갈망을 느낀다고도 한다.
동물 실험, 그리고 좋은 생쥐와 나쁜 생쥐
인간동물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논리와 감정으로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과학에서 동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우리의 결정 가운데 일부는 더없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동물 연구에 대한 태도는 부분적으로 실험의 잠재적 성과, 동물이 겪을 고통의 정도, 연구에 쓰이는 동물종에 따라 달라진다. 2018년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65퍼센트는 대안이 없을 경우 의학적 목적을 위한 동물 연구에 찬성했지만, 동물에게 화장품 안전 테스트를 실시하는 데 대해서는 단 7퍼센트만이 지지를 표시했다. 또한 조사 대상자의 44퍼센트는 생쥐를 사용한 연구에 찬성했다. 반면, 개나 고양이 연구를 지지한 사람은 14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동물의 도덕적 위상에 대한 우리 관점은 일관성을 잃기도 한다. 이를테면 쥐에 붙이는 꼬리표와 범주 구분이 그렇다. 대학 연구소의 생쥐는, 이를테면 삼나무 냄새가 나는 깔끔한 방에서 지내며 정식 자격을 갖춘 유능한 직원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들 대부분은 ‘좋은 생쥐’다. 그들은 매년 교수,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이 수행하는 수백 건의 생의학 연구 및 행동 연구에 사용되는 실험 대상이다. 이 연구들은 대부분 인간이 겪는 다양한 질환 치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생쥐들은 스스로 선택권이 없었지만, 인간의 이익을 위해 살고 죽는다.
그러나 그 건물에서 살아가는 생쥐 가운데는 ‘나쁜 생쥐’라는 또 다른 범주도 있었다. 그들은 해롭게 취급된다. 형광등이 켜진 기다란 복도를 따라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이따금 사람들 눈에 띄는 존재다. 이들 생쥐는 청결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즉 방들 간의 교차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이다. 이 작은 무법자들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 속의 인간동물학
대다수 사람은 동물이나 자연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부엌에 개미가 들끓어도 절대 죽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물과 연결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인간이 다른 종들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역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즉 그들은 가상의 기차가 한 사람의 노인을 향해 달리게 할 것인지, 아니면 멸종 위기에 놓인 한 무리의 침팬지를 향해 달리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소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가죽 신발은 신는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선적이다. 우리 안의 ‘야수’는 양념을 듬뿍 뿌려 천천히 구워낸 돼지고기 안심 바비큐의 황홀한 맛을 음미한다. 그런가 하면 송아지 고기를 먹지 않고, 행복한 암탉이 낳은 로컬 달걀을 구입하며, 공장식 육계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으리라 믿고 싶어 ‘놓아 기른’ 닭에 기꺼이 돈을 더 지불한다.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저자는 이 책에서 묘사한 명백한 도덕적 불일치 탓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라면서도 고기를 먹는다고 멋쩍게 털어놓는 사람들, 수탉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투계꾼들, 품종을 개량하겠다는 욕망 때문에 유전적 결함을 지닌 개를 대물림해서 만들어내는 순종견 애호가들, 자신이 구조한 수많은 동물을 실제로는 열악한 환경에 방치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호더들. 그러나 저자는 이제 이런 모순이 예외나 위선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그것은 피할 수 없으며, 바로 우리가 인간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동물, 혐오하는 동물, 먹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 행동,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맺는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