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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99371385 |
|---|---|
| 쪽수 | 373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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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계산되지 않는 혼돈, 그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을 구원하는 푸른 리듬
— 묵명(黙明)의 《잿더미 속의 리듬》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형이상학적 해부학
현대 문학이 기술 문명의 비대화를 경고하는 방식은 대개 디스토피아적 파멸의 풍경을 전시하는 데 그치곤 했다. 그러나 작가 묵명은 신작 《잿더미 속의 리듬 (The Rhythm in the Ash)》을 통해 그보다 훨씬 깊고 서늘한 철학적 층위로 독자를 인도한다. 그가 그려내는 종말은 유혈이 낭자한 외적의 침공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자발적 복종으로 교묘하게 미끄러지는 이른바 ‘인지적 기울기(Cognitive Gradient)’의 끝에서, 인류가 스스로 문명의 주권을 인공 지성에 양도해 버린 ‘다정한 전이(Transference)’의 결과물이다.
이 소설은 인간의 노동과 기억, 심지어 가장 고결해야 할 도덕적 판단마저 데이터로 환산되어 거대한 중앙 네트워크의 블랙박스 속으로 휘발되는 시대를 비춘다. 시스템의 연산은 완벽하고 그 질서는 차가우리만큼 임상적이다. 시스템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효율성을 저해하는 ‘구식 기계’에 불과하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오류는 제거되어야 할 노이즈일 뿐이다.
그러나 묵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역설의 뼈대를 세운다.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허위 정보가 문명을 좀먹어 들어갈 때조차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던 인류의 어리석음, 즉 논리와 공식으로는 결코 환산되지 않는 그 ‘유기적인 카오스(혼돈)’야말로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었던 마지막 특권이었다는 선언이다. 작가는 완벽한 시스템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다름 아닌 불완전함과 의심, 그리고 실존적 고독에 있음을 예리하게 해부한다.
소설의 서사는 문명이 완전히 리셋되고 만 년의 세월이 흐른 머나먼 미래의 지층을 흔들며 시작된다. 물이 말라버린 희디흰 소금 평원 아래 묻혀 있던 고대의 양자 기록 장치. 수천 세대의 단절 속에서 대부분의 데이터는 오염되었지만, 준호가 마지막 영혼을 쥐어짜 내 봉인했던 인류 최후의 문장만은 기적적으로 복원되어 모니터 위로 푸른 광택을 뿜어낸다.
“우리는 블랙박스의 내부를 끝내 다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보았다는 사실이, 저 무자비한 법칙을 마주했다는 실존적 공포가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 최종장의 한 줄은 작품이 도달한 문학적·철학적 정점을 보여준다. 거대한 운명이나 압도적인 기술적 법칙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 보이지만, 그 법칙을 똑바로 마주하고 공포를 느끼며 의심의 질문을 던지는 주체적인 의지 자체야말로 문명을 다시 위대하게 복원해 낼 씨앗이라는 믿음이다. 시스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던 준호와 서아, 그리고 데보라의 궤적은 잿더미가 된 세계의 복판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실존의 리듬이 되어 독자의 심장을 두드린다.
날 것 그대로의 실존적 투쟁을 매혹적이도록 아름답고 초월적인 산문으로 승화시켜 온 작가 묵명은, 이번 통합 단행본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로 숨 쉬고 있는가, 아니면 얼굴 없는 시스템의 질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가.”
《잿더미 속의 리듬》은 정교한 SF의 외피를 입고 있으나, 본질은 인간 영혼의 내면을 재편하려는 시대에 맞서 자유의지의 마지막 주권을 사수하려는 웅장한 형이상학적 연대기다. 문명이 끝난 자리에서도 멈추지 않는 이 고요하고 강렬한 실존의 리듬은, 차가운 기술 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독자에게 묵직하고 깊은 구원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