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
나는 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 4
돌아오기 위한 이별 • 7
‘하해불사세류’(河海不辭細流)를 지나서 • 8
2부 한 사람의 춤이, 한 시대가 되기까지
1장 아주 사적인 고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17
사랑보다 먼저 배운 거절 19
엇갈린 마음, 열두 살의 잔상 24
다시 시작된 오해의 시간 26
처음으로 마음이 머문 사람 29
그 사람, M 32
말하지 않아도 닿는 것들 36
호의와 경계 사이에서 39
그 여름, 처음 만난 휴식 43
말없이 마음이 포개지던 때 47
오 분의 결정, 평생의 인연 51
남편, 나의 예술을 안아준 사람 55
생활이라는 낯선 무대 위에서 57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산 59
뉴욕, 세계의 눈으로 본 나 61
통하는 춤, 닿지 않는 언어 65
바다가 나를 부를 때 69
천국과 지옥 사이, 다시 춤으로 72
그를 만나, 비로소 시작된 내 춤 76
2장 세 번째 춤 인생, 다시 오르는 막 • 79
리을 무용단, 이름 안에 춤을 담다 81
이름이 실체가 된 첫 무대 84
붙잡지 않아도 이어지는 예술 87
이 땅의 들꽃으로 살아 89
국립의 문 앞, 주어진 스무날의 기적 92
국립이라는 엄중한 자리 96
1986년, 춤으로 세운 나라 98
유리도시, 아직 해야 할 말 102
무대는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편 105
고난 끝에 남은 것 107
지루함과 결단 사이에서 110
3장 운영이라는 예술, 춤의 영토를 넓히다 • 113
사람은 있었으나, 춤은 없었다 115
기본을 세우며 기다린 무대 118
눈물로 빚어낸 춤사위 121
박수가 멈추지 않았던 찰나의 영광 124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불 127
서울시립, 그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고 131
세계라는 거대한 문 앞에 서다 136
작품이 스스로 길을 내던 시절 139
시대의 얼굴을 춤에 새기는 일 143
꿈이 불러 세운 밤 146
까치와 소나무, 그리움이 무대가 될 때 151
조직을 움직이는 힘, 멈추지 않는 변화 155
스스로와 약속한 십 년의 세월 160
늦었다고 믿었을 때, 다시 열린 문 164
4장 멈추려 할 때마다 길은 열리고 • 167
다시 선 국립무용단, 운명 같은 부름 169
무대는 객석 아래, 피트에서 시작되었다 172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한 무대 위의 한 장면 176
〈코리아 판타지〉 탄생 178
세계가 먼저 알아본 춤, 〈코리아 판타지〉 183
춘향이 춤이 되었을 때 188
무대를 내려오자, 책이 나를 불렀다 192
조명이 꺼진 뒤, 시작된 더 뜨거운 시간 196
다시 쓴 제목, 다른 마음으로 빚은 마지막 200
길은 멈춘 곳에서 다시 이어졌다 203
새벽 다섯 시 기차, 깨어 있는 열정 206
APEC 정상회의의 전율과 〈춤, 춘향〉 209
다시 시작된 예술가의 숙명 212
5장 멈추지 않는 춤의 여정 • 217
재즈의 리듬을 올라탄 한국의 몸, 〈SOUL, 해바라기〉 219
음악과 춤이 서로에게 고개를 숙일 때 223
가슴에 묻은 세계화의 꿈 226
베르사유에서 울려 퍼진 고요한 북소리 229
멈추려던 자리에서 다시 불린 이름 232
6장 일흔의 봄, ‘신전통’을 선언하다 • 239
흥이 멎은 자리에서 돌아서다 241
‘신전통’이라는 이름을 처음 불러본 날 245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일, ‘신전통’의 선언 249
일흔의 몸으로 논에 서다 252
또, 하나 춘향을 묻다 255
리틀엔젤스 무용단 예술감독으로 258
아이들의 몸에서 피어난 춤 260
마침내 문을 연 ‘배정혜 춤 연구원’ 265
7장 무대는 정직하다–춤과 예술, 무대에서 길을 찾는 후배들에게 • 269
마음을 여는 것도 훈련이다 271
춤은 영혼의 몸짓, 기술은 그 영혼의 그릇 274
창작의 본질, 작은 몸짓에 담긴 거대한 사상 278
안무가의 계율, 살아 있는 정답을 찾아가는 고독한 설계 280
곰삭은 세월의 미학, 전통춤의 살아있는 숨결 286
남몰래 건네는 극치의 자연미, 한국춤의 정수 290
[글을 마치며]
다시, 춤으로 서고 싶다 • 294
[본문]
뒤돌아보니, 나는 아마도 남난(男難)이 많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추억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첫 기억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6·25 전쟁 통에 강원도 노고소로 피난을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을 혼자 마음에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으로서 사랑이라기보다는, 아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동경에 가까웠다. 멋진 어른을 향한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내 마음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p.19 중에서)
‘진흙과의 대화’는 듀엣으로 구성했다. 몸이 땅에 닿고, 밀리고,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근원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늘과의 대화’는 열두 명이 긴 줄을 들고나오는 군무로 풀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선, 끊어지지 않는 흐름, 그 끝에 서 있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이었다. 오은희 선생이 밤하늘을 향해 혼자 대화하며 우는 장면은, 말없이도 많은 것을 전달했다.
(p.85 중에서)
다시 연습실에 섰을 때, 나는 더 이상 기본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숨부터’ 맞춰보자고 했다. 그 말은 무용수들에게도,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처음 건네는 새로운 언어였다. 이곳에서 나는 이미 만들어진 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춤이 태어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했다. 민속이든 창작이든 결국 춤은 사람의 몸에서 시작되고, 몸은 정직하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믿어보기로 했다.
그날 이후 연습실의 공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침묵 대신 호흡이 들렸고, 정체되어 있던 시간에 활기가 생겼다.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라 버텨야 할 두려움이었다.
(pp.116-117 중에서)
“왜 이렇게 어깨가 돌덩이마냥 딱딱하노.”
그 투박한 사투리 한마디가 지난 한 달간 내가 삼켜야 했던 모든 갈증과 설명을 대신해 주었다. 대가들의 서슬 퍼런 꾸짖음 아래에서 단원들은 제 몸의 비명을 듣기 시작했다. 한국 춤은 잔재주가 섞인 손발이 아니라 묵직한 몸통에서 솟구친다는 것, 어깨와 엉덩이가 살아 숨 쉬어야 아름다운 선이 그려진다는 진실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그 뜨겁게 달궈진 토양 위에서 마침내 바기본을 심을 준비를 마쳤다. 국립무용단에서 여정은 단원들의 몸속에 질문을 던지고 다시 처음부터 그 몸을 묻는 의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p.171 중에서)
2006년 첫 출근부터, 내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우리 창작 무용을 세계 무대 한복판에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코리아 판타지〉, 〈춤, 춘향〉을 통해 춤의 가능성은 이미 확인했지만, 창작의 영역은 여전히 넘기 힘든 높은 벽이었다. 시립무용단 시절 〈떠도는 혼〉으로 세계 무대의 문턱까지 가보기도 했으나,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가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돌파구가 절실했다. 나는 그 열쇠가 바로 ‘음악’에 있다고 확신했다.
(p.219 중에서)
세계일보가 기록한 배정혜와 리틀엔젤스
1. [2018.11.23] 리틀엔젤스, 배정혜 예술감독의 ‘마법’으로 피어나다
주요 내용: “한국 무용계의 거장 배정혜 예술감독이 부임한 후 리틀엔젤스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설날 아침>에 대해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수작”이라 평했다.
(p.263 중에서)
2025년, ‘배정혜 춤 연구원’이 마침내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이름 아래 ‘배정혜 춤 메소드 보존회’, ‘리을무용단’, 그리고 내 춤의 뿌리인 ‘배명균 춤 보존회’가 세 기둥처럼 굳건히 자리 잡았다.
매주 목요일이면 50여 명의 후배들이 보존회 수업을 위해 모여든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제자들 앞에 서면 내 안의 현은 다시 팽팽하게 조여진다.
“내가 직접 서서 가르쳐야 춤의 맛이 살지요.”
늙은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도, 춤을 꾸짖고 다독이는 목소리만큼은 연습실 벽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p.265 중에서)
나는 믿는다. 오늘 내가 추는 이 ‘신전통’이 끊임없이 추어지고 다듬어지다 보면, 먼 훗날 누군가에게는 닿고 싶은 간절한 ‘전통’이 되리라는 것을.
“자꾸 추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전통이 되겠지.”
연습실 거울에 비친 백발의 나는 어느새 칠십 년 전 처음 춤을 시작했던 그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무대는 여전히 나를 부르고, 나는 그 부름에 답할 힘을 쥐어짜며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p.247 중에서)
돌아보니 평생을 무대와 더불어 살아왔다.
그 위에서 울고 웃었으며, 숱한 좌절 끝에 다시 일어섰다. 세상은 화려한 조명과 박수 소리를 기억하겠지만, 내게 더 선명히 남은 것은 그 뒤편에 머물던 침묵의 시간이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 불 꺼진 객석, 다음 동작을 찾지 못해 밤새도록 서성거리던 그 지독한 고독의 순간들 말이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춤은 내게 끊임없이 물었다. 왜 움직이는가,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 과연 이 길의 끝까지 갈 자격이 있는가. 그 물음에 답을 구하는 과정이 곧 내 인생이었으며, 유일한 공부였다.
나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도 새로운 동작 앞에서는 초보자가 된 듯 서툴고, 무대에 오를 때면 어김없이 긴장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떨림이 멈추는 날이야말로 나의 무대가 비정하게 막을 내리는 날임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형태는 바뀌고 몸은 예전 같지 않으나, 질문하는 마음만큼은 형형하게 살아 있다. 춤을 통해 배운 가장 큰 진실은 이것이다. 끝까지 남는 것은 찰나의 박수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뿐이라는 것.
부디 너무 서둘러 완성되려 애쓰지 마라.
흔들리고 넘어지는 그 모든 순간이 실은 생의 가장 아름다운 안무를 짜는 과정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조명이 꺼진 뒤의 고독을 사랑하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무대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대 뒤편에서, 혹은 삶의 곁에서 당신이 그려갈 찬란한 궤적을 언제까지나 응원하겠다.
나는 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내 안에 허기가 자리 잡은 것은 대학 입시를 두 해쯤 치르고 난 뒤부터였다. 바기본의 성과가 하나둘 나타나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분명 보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달라졌고, 결과는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육자가 아니다.’
어느 날, 아주 분명한 문장 하나가 내 안에서 떠올랐다.
‘지금 이건 내가 꿈꾸던 예술가의 삶이 아니야.’
내 춤이,
내 생각이,
내 예술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도망이 아니라, 확인을 위한 출발이었다.
돌아오기 위한 이별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박노희 본부장님께서 “배 선생은 지금 바다를 꿈꾸고 계시지요. 그런데 그 바다를 이루는 작은 샘물을 무시하고 과연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꾸짖음도, 만류도 아니었다.
걱정이었고, 애정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미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답을 꺼냈다.
“한국에서 이룰 수 없는 예술 세계를 위해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어요.”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떠남은 끝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과정인 것을.
‘하해불사세류’(河海不辭細流)를 지나서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박노희 본부장님이 내게 건넸던 말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하해불사세류’(河海不辭細流)에서 비롯된 문장이었다는 것을. ‘넓은 바다는 가는 물줄기를 사양하지 않기에 마침내 그 깊음을 이룬다’라는 말이었다.
그날, 나를 붙잡던 그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그 마음을 참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바다로 가야만 했다. 그 깊이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