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누르는 혐오의 무게,
씨앗 같은 생존의 입자들
오드리는 “사랑과 저항을 동시에 할 수 없다면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36쪽
생존 입자 하나. 흑인 소녀는 “책”을 읽었다
“나는 한 사람을 한 편의 시로 만들어버리는 괴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고 일기에 썼던 오드리 로드. 서인도제도에서 뉴욕 할렘으로 이주해온 흑인 이민자 가정을 압박했던 고용 및 주거 차별이라는 외적인 인종주의에 더해, 자매 중 피부가 가장 검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유독 벌을 많이 받으며 내면화된 인종주의라는 벽에도 부딪쳐야 했던 흑인 소녀. 겹겹의 혐오 속에서 소녀는 책을 붙들고 살아남았다.
동네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의 흑인 여성 사서 오거스타 베이커에게 빌린 262쪽짜리 『머더 구스: 전래 동요』를 일부 외우기까지 하며 소중히 했던 어린 소녀, 아버지가 헌책방 주인들과 함께 경매에 참가해 더미째 사 나른 책들 속에서 미스터리, SF, 범죄소설, 프랑스어 기하학 책, 낭만시 선집, 14개 주에서 금서로 지정된 선정적인 역사 로맨스 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던 책벌레.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1950)를 읽으며 “SF 팬”으로서 자신의 첫 산문을 잡지에 싣고, 시 모임 “낙인찍힌 사람들”의 친구들과 강령회를 열어 존 키츠, 퍼시 셸리, 로드 바이런 등 죽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불러내던 문학 소녀.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멈춘 생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채 계속 자라야 했던 극도의 고통” 속에서 책은 죽음과 고통의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생존 입자 둘. 소녀는 어른이 되어 “분노”했다
걔네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오드리는 매일 아침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거기에서 발견한 폭력 사건들을 낭독했다. 그리고 보도되지 않은 내용에 더 주목했다. 지역 뉴스를 다루는 지면 깊이 묻힌 흑인 여성과 소녀 들에게 일어난 기사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오드리는 그 공포들로 인해 악몽을 꾸었고, 오드리의 손을 통해 그 공포는 시가 되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61쪽
1973년, 열 살 흑인 소년 클리퍼드 글로버가 새아버지와 고물상에 가다 “인상착의가 같았다”는 이유로 백인 경찰에게 살해당했다(백인 경찰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1976년, 아버지가 임신시킨 두 명의 10대 여성이 위탁 가정에서 지내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다. 1979년, 석 달 동안 보스턴에서 열세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그중 열두 명이 흑인 여성이었다)….
시를 낭독하던 소녀는 어른이 되어 뉴스의 폭력 사건을 낭독하게 된다. 그리고 “뉴스 보도의 지배적 서사를 수정하는 수단”으로 자기 시를 이해하며 시를 쓴다. 「힘」을, 「사슬」을, 「필요: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위한 합창곡」을…. 그렇게 “문학 소녀”는 “전사 시인”이 되었다. 밤낮으로 접하는 숱한 죽음(들) 속에서 시와 책을 무기 삼아 살아남은 소녀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저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생존이라는 약속』 288쪽
“흑인 레즈비언” 오드리 로드는 존제이칼리지 영어과 최초 흑인 교수로 첫 번째 흑인학 수업과 여성학 수업을 개설했다. 오드리의 작업이 흑인성을 중심에 둔다는 이유로 그 타당성을 의심하는 백인 동료들, 동성애 혐오 때문에 오드리가 흑인 연구 교육과정을 함께 만들려고 해도 의심하는 흑인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 교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지속되는 부정의를 알아차리는 공명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했다.
생존 입자 셋. 어머니가 되어, 자매들과 주고받았다
때때로 엘리자베스나 조너선이 운동장이나 동네에서 인종주의나 괴롭힘을 겪어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상처를 안고 집에 돌아오면 오드리는 책장으로 달려가 고등학교 시절 자기를 버티게 해준 시를 읽어주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41쪽
오드리 로드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남편과 이혼한 후 20년간 함께한 동반자 프랜시스 클레이턴 박사와 두 자녀를 공동 양육하면서 “격주로 가족회의를 열었고”, “아이들의 꿈과 아이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아이들이 묘사한 꿈의 내용은 통찰의 씨앗이 되어 오드리의 글쓰기에서 자라났다.” “오드리는 물과 햇빛만큼이나 필수적이라 느꼈던 것들, 즉 시와 언어의 구조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몇 년 후 오드리는 에이드리언 리치와 대화하며, 어느 날 휴게실에서 사물함을 열었을 때 새 전기빗이 떨어졌던 순간의 굴욕적인 기분에 대해 설명했다. 동료들은 오드리가 머리를 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빗을 사서 넣었다. 오드리에게 이 일은 자기표현에 대한 공격이자, 자매애와 연대를 기대했던 흑인 여성들로부터,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로부터 거절당한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198쪽
1977년, 현대언어학회 회의에서 한 여성이 일어나 도전적으로 발언했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문학 평론가입니다. 이런 존재로 살고 또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오드리 로드는 바버라의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소설 『자미: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를 썼다. “자전신화(Biomythography)”라는 실험적인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오드리는 “그녀의 가장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제너비브가 그랬듯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흑인 여성들의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오드리는 소설의 초고를 바버라에게 보내 편집을 부탁했고, 바버라는 한 줄씩 꼼꼼히 살폈다. 1990년, 두 사람은 바버라의 집 거실에서 다른 유색인 여성들과 함께 “키친테이블: 유색인 여성 출판사”를 공동 설립했다.
1982년 하반기,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일어난 때에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가 공개적으로 자신 시온주의자라 주장하자, 리치의 친구이자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준 조던이 즉각 입장을 표명했다. “에이드리언에게, 나는 공개적으로 답한다. 당신이 명백하게 보여준 페미니즘의 정의는 지구를 멸망의 위협으로 밀어넣는 백인 남성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우리’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 리치와 조던 둘 모두와 절친했던 오드리 로드는 조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충돌했던 조던과 리치는 정작 관계를 회복했음에도) 조던과 죽을 때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자미(Zami)”는 오드리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레나딘제도 캐러쿠 섬의 언어로, “연인이자 친구인 여성들”을 뜻한다. “당신의 공동체는 당신이 만드는 거예요”라는 자신의 말처럼 오드리는 전화로, 편지로, 글로, 책으로 자미=자매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나는 내 진짜 엄마가 되어줄 흑인 여성들을 찾고 또 찾아왔다”고 일기에 썼던 오드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자매들을 북돋웠다. 오드리 로드 연구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전문가인 저자 검스는 오드리 로드와 자매들의 관계를 줌인-줌아웃하며 오드리의 영향력이 어떻게 개인적인 범위에서 전 지구적인 범위로 뿌리를 뻗어갔는지, 역동적으로 증언한다.
1993년, 세상을 떠난 오드리 로드의 생일을 기념하며 준은 이런 헌사를 썼다. “우리의 삶은 여러 지점에서, 우리가 선택한 투쟁 경로가 그렇듯 서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혐오에 맞서고 모든 편협함을 섬멸하기 위해 공동 전투를 펼쳤기에 우리의 연결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생존이라는 약속』 424쪽
허리케인, 화산, 돌바닥을 지나… 영원한 빛이 된 오드리 로드의 삶
“알렉시스 폴린 검스의 이 책은, 오드리 로드와의 유비성을 환기하는 물질적이고 생태적인 요소들의 속성을 연결해준다. 오드리 로드라는 나무의 가지와 뿌리가 어떻게 지구 위에서 뻗어가고, 어떻게 외부와 얽혀 있는지 상상하게 한다.” -『생존이라는 약속』 674쪽, 추천사(윤은성 시인)
열다섯에 쓴 시에서 “낮이 오기까지 몇 개의 밤이 필요할까?”라고 질문했던, 어둠을 두려워하던 소녀는 변화무쌍하며 혼란한 바람의 여신 오야의 딸로 자라나 허리케인처럼,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삶으로 끌어들였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 최고의 노력, 희망, 그리고 욕망 들이 하나로 모여들고 있다.” 1992년 초, 오드리는 자신의 유해를 여덟 개의 묶음으로 나눠 의식을 치르며 지구 곳곳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대서양과 카리브해가 만나는 세인트크로이의 지하 동굴, 하와이의 성스러운 화산 지대 두 곳, 오드리가 좋아했던 독일의 크루메랑케 호수…. 세인트크로이에서 오드리의 재는 상자 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유골이 담긴 함을 테이프로 봉했는데도 다시 열렸고, 세 번이나 다시 닫았는데 계속 다시 열렸어요.”
『생존이라는 약속』에서 저자 검스는 오드리 로드의 삶의 입자들을 씨줄 삼고 그 삶을 둘러싼 물질적, 생태적 조건들을 날줄 삼아 생존을 위한 한 장의 지도를 짜나간다. 오드리 아버지 고향 섬 가장자리의 바베이도스 부가체와 해양 석유 시추 문제. 해바라기의 속성과 동반자 프랜시스와의 관계. 아버지를 표류시킨 1898년 윈드워드제도 허리케인과 오드리가 직접 겪은 1989년의 허리케인 휴고,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오드리가 공장에서 들이마신 사염화탄소와 쉰여덟 살에 오드리를 죽게 한 간암. 양자물리학의 대형 입자가속기와 선조들의 노예무역. 방사선 암 치료를 위한 작은 입자가속기와 아파르트헤이트….
과거와 현재,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조망하게 하는 이러한 양자적 연결이야말로 암을 가리켜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우리 각자의 조각”이라 말했던 오드리 로드의 삶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것을, 책을 읽어가며 깊이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연결이 이해되며 믿어지는 순간, 오드리 로드는 죽음을 넘어 끝없는 사후 삶을 시작한다.
2026년, 한국의 우리에게로 오드리 로드의 삶이 날아들었다.
“이 책을 생존 안내서로 읽기를. 이 책을 변화하는 생태계와 당신의, 또 우리 공동체의 관계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오드리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연결 지점으로 읽기를 바란다. 이 책을 당신이 원하는 순서대로 읽어도 좋다. 개인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에서 이 책이 당신에게 가닿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장들을 모든 방향에서 합창해 오는 시의 모음처럼 읽기를. 각각의 단어를 화산을 탄생시키고 대륙을 가른 그 사랑, 오드리의 맹렬한 사랑을 당신에게 가닿게 하는 하나의 기회로 이해하기를.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존이라는 약속』 29쪽
내리누르는 혐오의 무게,
씨앗 같은 생존의 입자들
오드리는 “사랑과 저항을 동시에 할 수 없다면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36쪽
생존 입자 하나. 흑인 소녀는 “책”을 읽었다
“나는 한 사람을 한 편의 시로 만들어버리는 괴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고 일기에 썼던 오드리 로드. 서인도제도에서 뉴욕 할렘으로 이주해온 흑인 이민자 가정을 압박했던 고용 및 주거 차별이라는 외적인 인종주의에 더해, 자매 중 피부가 가장 검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유독 벌을 많이 받으며 내면화된 인종주의라는 벽에도 부딪쳐야 했던 흑인 소녀. 겹겹의 혐오 속에서 소녀는 책을 붙들고 살아남았다.
동네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의 흑인 여성 사서 오거스타 베이커에게 빌린 262쪽짜리 『머더 구스: 전래 동요』를 일부 외우기까지 하며 소중히 했던 어린 소녀, 아버지가 헌책방 주인들과 함께 경매에 참가해 더미째 사 나른 책들 속에서 미스터리, SF, 범죄소설, 프랑스어 기하학 책, 낭만시 선집, 14개 주에서 금서로 지정된 선정적인 역사 로맨스 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던 책벌레.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1950)를 읽으며 “SF 팬”으로서 자신의 첫 산문을 잡지에 싣고, 시 모임 “낙인찍힌 사람들”의 친구들과 강령회를 열어 존 키츠, 퍼시 셸리, 로드 바이런 등 죽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불러내던 문학 소녀.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멈춘 생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채 계속 자라야 했던 극도의 고통” 속에서 책은 죽음과 고통의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생존 입자 둘. 소녀는 어른이 되어 “분노”했다
걔네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오드리는 매일 아침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거기에서 발견한 폭력 사건들을 낭독했다. 그리고 보도되지 않은 내용에 더 주목했다. 지역 뉴스를 다루는 지면 깊이 묻힌 흑인 여성과 소녀 들에게 일어난 기사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오드리는 그 공포들로 인해 악몽을 꾸었고, 오드리의 손을 통해 그 공포는 시가 되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61쪽
1973년, 열 살 흑인 소년 클리퍼드 글로버가 새아버지와 고물상에 가다 “인상착의가 같았다”는 이유로 백인 경찰에게 살해당했다(백인 경찰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1976년, 아버지가 임신시킨 두 명의 10대 여성이 위탁 가정에서 지내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다. 1979년, 석 달 동안 보스턴에서 열세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그중 열두 명이 흑인 여성이었다)….
시를 낭독하던 소녀는 어른이 되어 뉴스의 폭력 사건을 낭독하게 된다. 그리고 “뉴스 보도의 지배적 서사를 수정하는 수단”으로 자기 시를 이해하며 시를 쓴다. 「힘」을, 「사슬」을, 「필요: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위한 합창곡」을…. 그렇게 “문학 소녀”는 “전사 시인”이 되었다. 밤낮으로 접하는 숱한 죽음(들) 속에서 시와 책을 무기 삼아 살아남은 소녀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저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생존이라는 약속』 288쪽
“흑인 레즈비언” 오드리 로드는 존제이칼리지 영어과 최초 흑인 교수로 첫 번째 흑인학 수업과 여성학 수업을 개설했다. 오드리의 작업이 흑인성을 중심에 둔다는 이유로 그 타당성을 의심하는 백인 동료들, 동성애 혐오 때문에 오드리가 흑인 연구 교육과정을 함께 만들려고 해도 의심하는 흑인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 교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지속되는 부정의를 알아차리는 공명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했다.
생존 입자 셋. 어머니가 되어, 자매들과 주고받았다
때때로 엘리자베스나 조너선이 운동장이나 동네에서 인종주의나 괴롭힘을 겪어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상처를 안고 집에 돌아오면 오드리는 책장으로 달려가 고등학교 시절 자기를 버티게 해준 시를 읽어주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241쪽
오드리 로드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남편과 이혼한 후 20년간 함께한 동반자 프랜시스 클레이턴 박사와 두 자녀를 공동 양육하면서 “격주로 가족회의를 열었고”, “아이들의 꿈과 아이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아이들이 묘사한 꿈의 내용은 통찰의 씨앗이 되어 오드리의 글쓰기에서 자라났다.” “오드리는 물과 햇빛만큼이나 필수적이라 느꼈던 것들, 즉 시와 언어의 구조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몇 년 후 오드리는 에이드리언 리치와 대화하며, 어느 날 휴게실에서 사물함을 열었을 때 새 전기빗이 떨어졌던 순간의 굴욕적인 기분에 대해 설명했다. 동료들은 오드리가 머리를 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빗을 사서 넣었다. 오드리에게 이 일은 자기표현에 대한 공격이자, 자매애와 연대를 기대했던 흑인 여성들로부터,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로부터 거절당한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생존이라는 약속』 198쪽
1977년, 현대언어학회 회의에서 한 여성이 일어나 도전적으로 발언했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문학 평론가입니다. 이런 존재로 살고 또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오드리 로드는 바버라의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소설 『자미: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를 썼다. “자전신화(Biomythography)”라는 실험적인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오드리는 “그녀의 가장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제너비브가 그랬듯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흑인 여성들의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오드리는 소설의 초고를 바버라에게 보내 편집을 부탁했고, 바버라는 한 줄씩 꼼꼼히 살폈다. 1990년, 두 사람은 바버라의 집 거실에서 다른 유색인 여성들과 함께 “키친테이블: 유색인 여성 출판사”를 공동 설립했다.
1982년 하반기,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일어난 때에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가 공개적으로 자신 시온주의자라 주장하자, 리치의 친구이자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준 조던이 즉각 입장을 표명했다. “에이드리언에게, 나는 공개적으로 답한다. 당신이 명백하게 보여준 페미니즘의 정의는 지구를 멸망의 위협으로 밀어넣는 백인 남성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우리’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 리치와 조던 둘 모두와 절친했던 오드리 로드는 조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충돌했던 조던과 리치는 정작 관계를 회복했음에도) 조던과 죽을 때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자미(Zami)”는 오드리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레나딘제도 캐러쿠 섬의 언어로, “연인이자 친구인 여성들”을 뜻한다. “당신의 공동체는 당신이 만드는 거예요”라는 자신의 말처럼 오드리는 전화로, 편지로, 글로, 책으로 자미=자매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나는 내 진짜 엄마가 되어줄 흑인 여성들을 찾고 또 찾아왔다”고 일기에 썼던 오드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자매들을 북돋웠다. 오드리 로드 연구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전문가인 저자 검스는 오드리 로드와 자매들의 관계를 줌인-줌아웃하며 오드리의 영향력이 어떻게 개인적인 범위에서 전 지구적인 범위로 뿌리를 뻗어갔는지, 역동적으로 증언한다.
1993년, 세상을 떠난 오드리 로드의 생일을 기념하며 준은 이런 헌사를 썼다. “우리의 삶은 여러 지점에서, 우리가 선택한 투쟁 경로가 그렇듯 서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혐오에 맞서고 모든 편협함을 섬멸하기 위해 공동 전투를 펼쳤기에 우리의 연결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생존이라는 약속』 424쪽
허리케인, 화산, 돌바닥을 지나… 영원한 빛이 된 오드리 로드의 삶
“알렉시스 폴린 검스의 이 책은, 오드리 로드와의 유비성을 환기하는 물질적이고 생태적인 요소들의 속성을 연결해준다. 오드리 로드라는 나무의 가지와 뿌리가 어떻게 지구 위에서 뻗어가고, 어떻게 외부와 얽혀 있는지 상상하게 한다.” -『생존이라는 약속』 674쪽, 추천사(윤은성 시인)
열다섯에 쓴 시에서 “낮이 오기까지 몇 개의 밤이 필요할까?”라고 질문했던, 어둠을 두려워하던 소녀는 변화무쌍하며 혼란한 바람의 여신 오야의 딸로 자라나 허리케인처럼,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삶으로 끌어들였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 최고의 노력, 희망, 그리고 욕망 들이 하나로 모여들고 있다.” 1992년 초, 오드리는 자신의 유해를 여덟 개의 묶음으로 나눠 의식을 치르며 지구 곳곳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대서양과 카리브해가 만나는 세인트크로이의 지하 동굴, 하와이의 성스러운 화산 지대 두 곳, 오드리가 좋아했던 독일의 크루메랑케 호수…. 세인트크로이에서 오드리의 재는 상자 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유골이 담긴 함을 테이프로 봉했는데도 다시 열렸고, 세 번이나 다시 닫았는데 계속 다시 열렸어요.”
『생존이라는 약속』에서 저자 검스는 오드리 로드의 삶의 입자들을 씨줄 삼고 그 삶을 둘러싼 물질적, 생태적 조건들을 날줄 삼아 생존을 위한 한 장의 지도를 짜나간다. 오드리 아버지 고향 섬 가장자리의 바베이도스 부가체와 해양 석유 시추 문제. 해바라기의 속성과 동반자 프랜시스와의 관계. 아버지를 표류시킨 1898년 윈드워드제도 허리케인과 오드리가 직접 겪은 1989년의 허리케인 휴고,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오드리가 공장에서 들이마신 사염화탄소와 쉰여덟 살에 오드리를 죽게 한 간암. 양자물리학의 대형 입자가속기와 선조들의 노예무역. 방사선 암 치료를 위한 작은 입자가속기와 아파르트헤이트….
과거와 현재,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조망하게 하는 이러한 양자적 연결이야말로 암을 가리켜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우리 각자의 조각”이라 말했던 오드리 로드의 삶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것을, 책을 읽어가며 깊이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연결이 이해되며 믿어지는 순간, 오드리 로드는 죽음을 넘어 끝없는 사후 삶을 시작한다.
2026년, 한국의 우리에게로 오드리 로드의 삶이 날아들었다.
“이 책을 생존 안내서로 읽기를. 이 책을 변화하는 생태계와 당신의, 또 우리 공동체의 관계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오드리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연결 지점으로 읽기를 바란다. 이 책을 당신이 원하는 순서대로 읽어도 좋다. 개인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에서 이 책이 당신에게 가닿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장들을 모든 방향에서 합창해 오는 시의 모음처럼 읽기를. 각각의 단어를 화산을 탄생시키고 대륙을 가른 그 사랑, 오드리의 맹렬한 사랑을 당신에게 가닿게 하는 하나의 기회로 이해하기를.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존이라는 약속』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