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순한 정결의 시간 / 8
1-16 / 12
바람의 먼지 속을 지나온 시간 / 211
작가의 말 / 215
[본 문]
그와 3년을 만났다. 희정은 그라면 앞으로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을 거라 굳게 여겼다. 둘은 함께 할 미래를 꿈꾸었고 구체화했다. 그 속에는 희정이 책임질 어머니와 동생들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는 희정의 가족으로 함께 하며 남아있는 가계 빚이며 동생들의 학과 과정을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희정의 가족만이 아닌 상대의 가족을 같은 선에 놓을 땐 사정이 달랐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실제로 구축할 결혼은 현실이었다. 구름 위를 거니는 일방의 환상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처음부터 희정이 성에 차지 않았고 어려운 집안 형편도 마땅치 않았다. 아들이 그런 형편을 돌보려는 것에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왜 남의 가족까지 책임지냐며 완강했다. 제 자식 낳아 키우기도 버거울 판에 처가 뒷바라지까지 하자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했다.
그는 부모의 생각을 돌리려 무진 노력했지만 완강한 반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부모가 승낙해 주지 않아 희정이 주눅 들 것에 많이 미안해했다. 희정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한다는 것에 더 미안했다. 그러지 않으려면 방법은 있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였다. 그의 부모가 원하는 대로 가족을 모른 척하면 간단했다.
밤 11시가 넘었다. 거실에서 남자가 치킨과 맥주를 다 먹었는지 꺼억! 트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식탁 의자를 찌익, 끌며 일어나는 기척도 났다. 방에서 전전긍긍하던 희정은 이제 가겠구나 싶어 내심 반가워 거실로 나왔다. 그러나 남자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버렸다. “어허, 좋다! 배부르겠다, 에어컨 틀어서 시원하겠다 장땡일세!” 떠들며 지저분한 옷자락을 훌떡 걷어 올려 불룩한 뱃구레를 툭툭, 두드렸다. 다리 한쪽을 다른 무릎에 올려놓고 발가락을 까딱이며 계속 떠들어댔다.
“8년 전에 망할 여편네가 이혼을 요구하는 거야. 열 받아서 된통 패줬지. 그랬더니 일곱 살 된 아들놈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린 거야. 개 같은 년! 그때 생각하면 치가 떨려. 마누라 년 하는 일이 뭐야? 하늘 같은 서방 공경하며 깍듯이 수발드는 건데 씨발년이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인지. 결국 이혼했는데…… 그 후 대장암에 걸려서 내가 혼자 앓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다고. 지금은 완치 판정받았어. 멀쩡해. 근데 불편한 게 있어.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거야. 창자를 반이나 잘라냈더니 먹기만 하면 그대로 똥을 싸는 거지. 아까도 봤지? 그래서 그런 거야. 킬킬킬.”
그러나 한 여자의 남편이고 어린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그들을 책임지고 부양할 주체였다. 맞닥뜨린 현실이 비통했어도 죽은 후 남겨질 가족을 걱정하며 안쓰러워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게 덮친 나락과 분노와 좌절만을 앞세웠다. 애먼 가족에게 모진 화풀이의 폭력을 터뜨리며 한 생을 이기로만 살다가 비참하게 마감했다.
그렇듯 희정이 아버지에게 갖는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이생에서 아버지의 처지는 안쓰러웠으나 가족에게 가한 폭압은 명백히 원망스러웠다. 두 감정은 내내 심정을 복잡하게 했고 내면에서 혼자만의 깊은 갈등의 분쟁을 수시로 일으켰다. 그때의 아버지가 떠오르면 머리를 휘휘 내저어 떨쳐내지만 악착같이 매달렸다. 육친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한 어린아이가 가졌던 충격은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으로 오랜 세월 들러붙었다.
그날 아버지의 밥상을 좀 더 좋은 반찬으로 차려주었다면 때리려고 움직이지 않았을 테고 쓰러지지도 않았을걸. 쓰러질 때라도 제대로 잡아줄걸. 죽어가는 걸 보고 있지만 말고 주변에 빨리 도움을 청할걸. 하다못해 숨이 멈추면서 고통스러워 허옇게 까뒤집은 눈이라도 제대로 쓸어 줄걸. 무엇보다 모로 쓰러져 구부러진 다리를 곧게 펴 주고 낀 팔이라도 빼 줄 걸. 핏자국과 누런 콧물 같던 죽음의 분비물이라도 깨끗이 닦아줄걸. 검은 동굴처럼 음험한 죽음을 물고 있던 입이라도 제대로 다물게 해줄걸. 검붉은 핏덩이를 입에 물고서 딱딱한 바닥에 쓰러졌던 몸을 좀 더 편하게 눕혀줄걸.
그러지 못했던 회한은 내면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죽어가는 과정을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극심한 죄책감으로 머물렀다. 당연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갚아야 할 끈덕진 부채감으로 각인되었다. 그 인식은 누구도 알지 못할 희정 스스로 짓누르는 오랜 세월의 무거움이었다.
희정은 처음 정현을 만났을 때 단번에 끓어오르는 열정을 채워 넣진 않았다. 결혼을 무척이나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자리에 나갔고 예비 사윗감을 흡족해하는 것에 결정했다. 몇 개월을 만나면서 꼭 그 이유만은 아닌, 저런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환경에서 충분히 정을 건네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결혼해선 세상의 제도와 관습 안에서 내 배우자인 내 편이라는 소속감을 지녔다. 그것이 희정 나름의 배우자에게 건네는 정이고 사랑이라는 명분이었다. 그러는 동안 결혼의 공동영역을 나눈다는 특별한 관계로 자리매김하며 애틋한 정이 생겼다. 그랬기에 정현이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 가겠다면 한 번쯤의 실수로 치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어머니는 희정의 결혼을 가장 바랐고 정현을 또 다른 아들로 여기며 미더워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딸이 늦게나마 배우자를 만나 사랑하며 사랑받고 산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픔을 얹는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현이 처한 상황은 그에 해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정현이 절박하게 향한 대상은 남성이었다. 그 사실은 나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과 남성인 이분법 성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연인을 향한 무조건인 밀도가 위험했다. 행실이 알려지면 세상의 질타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양가 부모나 형제들에게 아들이, 사위가, 형제가 성소수자이며 결혼 중에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사실은 충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당연히 이해를 바랄 수 없을 테고, 자칫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될 수 있었다.
정현을 그리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희정이 입을 닫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후 정현이 연인과 동성 친구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게끔 두 사람이 수위를 적절히만 조절한다면 문제 될 건 아니었다. 설사 피치 못해 그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해도…… 적어도 결혼생활 중에 아내를 버리고 남자에게 빠졌다는 혹독한 질시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도 속 시끄러운 속내를 알지 못하게 희정이 마무리하는 결정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거기엔 아내라는 작자가 얼마나 변변치 않으면 배우자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빠졌으며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끌고 가냐는 말을 듣는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걸치고 있는 것들이 죄다 발가벗겨진 알몸뚱이로, 번화한 대로에 팽개쳐져 조롱거리가 되고 손가락질받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조용히 덮는 것만이 희정이 그나마 알량하게 거둘 수 있는 자존심이었다.
집안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요했다. 혹시 남자가 돌아올까 불안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의 자취는 전혀 없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맨살에 닿는 모슬린 이불의 까슬한 부드러움이 좋다. 희정은 남자가 없었던 얼마 전처럼 이불자락을 휘감아 팔다리를 한껏 늘여 느긋하니 기지개를 켰다. 침대를 내려와선 밤새 자느라 흐트러진 잠자리를 말끔히 정리했다.
거실로 나왔다. 남자가 없는 거실 바닥은 깔린 이불이나 잡동사니 없이 깔끔했다. 창에 밤새 드리웠던 커튼을 젖혔다. 밝은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해 실내로 들어찼다. 아파트 단지 건너 대로에는 일찍 출근하는 자동차들이 열을 지어 지나갔다. 이웃집들에서 식사를 준비하느라 입맛 당기는 반찬 냄새와 하루를 시작하는 기척들이 퍼져 나왔다.
정수기에서 받은 따뜻한 물 한 잔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휴대전화기를 열어 음악을 틀자 잔잔한 선율이 흘렀다. 오랜만에 요가 매트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십여 분간 했다. 약간의 달뜬 호흡과 기분 좋을 정도의 촉촉한 땀이 배어났다. 스트레칭 후에는 적당히 따뜻한 온도의 물로 가볍게 샤워했다.
주방으로 왔다. 냉장고에서 달걀, 우유, 당근, 브로콜리를 꺼냈다. 당근을 가늘게 채 썰어 볶아 두었다. 그릇에 달걀과 우유를 넣고 젓가락으로 휘저어 푼 다음 약간의 소금과 설탕을 섞었다. 브로콜리를 잘라둔 후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물이 끓을 동안 커피 원두를 갈아서 드립퍼에 내렸다. 집안에 은은한 향이 찼다. 물이 끓자 잘라놓은 브로콜리를 데쳐 체에 건져두었다. 불 위에 올린 팬에 버터를 두르고 식빵 두 장을 대각선으로 잘라 풀어놓은 달걀물에 적셔 프렌치로 구웠다. 접시에 데친 브로콜리 한 줌과 볶은 당근과 토스트를 담았다. 머그잔에 커피를 따랐다.
음식물이 담긴 접시와 커피를 들고 창가로 와서 거실 바닥에 앉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는 살랑이는 감각이 좋다. 커피를 입술에 대자 쌉쌀한 향이 콧속에 들어찼다. 한 모금 마시자 따끈한 부드러움이 식도를 타고 내렸다. 뱃속이 따뜻해지며 말랑한 쿠션에 누운 듯 한동안 잃었던 부드러움이 감쌌다.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고소한 버터 향과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 가득 찼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곳곳에 끝나가는 늦여름의 아침햇살이 환하게 흩뿌렸다. 남자가 침입하기 전처럼 평화로운 아침이다. 당연했던 예전의 행위들을 마음 편히 여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게 행복하면서도, 지금의 아침 정경이 혹여 기시감은 아닐까 문득 불안해져 집안을 휘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비로소 얼마 전의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걸 되새겼다. 어떤 간극이 삐끗, 어긋나며 잡스러운 불순물이 잠시 섞여 들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주말이다. 모든 여름의 자취가 거의 없어졌다는 게 확연했다. 남자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번 정 할머니 말로는 사경을 헤매며 오늘, 내일 한다는데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죽었을까, 희정은 생각했다. 애초부터 상관없는 사람인데 굳이 근황까지 알 이유는 없다면서도 전혀 모르쇠만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간 아버지가 자주 남자에게 얹혔다. 남자가 명을 다했다면 지난날 아버지처럼 생의 마지막을 고통으로 뒤엉키지 않았기를 바랐다. 더불어 오래도록 무겁게 얹혀있던 이행해야 할 무언가에 대한 자책감의 무게가 훨씬 덜어지며 그럭저럭 마무리했다는 가벼운 마음마저 들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