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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88998243487 |
|---|---|
| 쪽수 | 224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반양장 |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역사 >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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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진 교과서 위를 아이들이 뛰어간다
그 발자국이 바로, 아이들이 삶에 긋는 밑줄이다
“내가 오답이라고 치부했던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일상 이면에는, 서툰 생존 본능과 그들만의 치열한 사회학이 숨어 있었다. 내일도 교실 문을 열며 예측 불가능한 아이들 앞에서 수없이 길을 잃을지 모르지만, 성급한 밑줄로 아이들의 세상을 닫아버리고 싶지 않다. 교실에는 여전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_‘들어가며’에서
“선생님, 지금 몇 쪽이에요?”
같은 질문을 하루 열 번 받고서야, 나는 그게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칠판에 쪽수를 적어 놓아도 지금 어디냐는 질문이 곳곳에서 올라온다. 방금 말해 준 걸 묻고 또 묻는다.
쓸모없는 질문은 없다고 한다. 어떻게든 질문을 끄집어내려고 선생님들은 “뭐라도 괜찮아, 창피해하지 마”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애를 써서 올라온 게 이 질문이다. 학습 태도 불량이라고, 집중력 부족이라고 한참이나 아이들 탓을 했다.
그러다 문득, 가르치는 사회 교과서의 한 개념이 떠올랐다. 겉으로 드러난 기능 아래 숨어 있는, 또 다른 기능. 쪽수를 묻는 그 질문 안에는 “조금 쉬어가요”라는 딴청이, “저도 이제 좀 해 볼게요”라는 서툰 신호가 들어 있는 건 아니었을까? 지식을 전하는 데 급한 나머지 아이들의 눈동자를, 교실의 공기를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받는다. “오, 그래. 이제 좀 해 보려고?”
이 책은 이렇게, 다 안다고 여겼던 것들 앞에서 한 번 더 멈추는 데서 시작한다. 판단을 한 박자 미루고, 그 틈에 무엇이 있는지 오래 들여다본다.
식판 위에서는 성적표가 힘을 쓰지 못한다
같은 식판을 받아도,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드러낸다
급식실은 겉보기에 평등하다. 일등도 꼴찌도 같은 1식 3찬을 받는다.
그런데 마라탕이 특식으로 나온 날, 몇몇 아이가 국물을 휘휘 젓더니 큰 소리로 말한다. “이거 마라탕 아니에요, 그냥 매운 국인데요?”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미련 없이 잔반통으로 간다. 밖에서 파는 진짜 맛을 안다는 그 태도는, 급식에 만족하는 친구들과 자신을 갈라놓는 조용한 과시다. 자라면서 몸에 밴 취향과 태도가 그 순간 식판 위로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그것을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여기까지라면 급식실 이야기는 그냥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아이가 이기는 곳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책은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것을 본다. 오랜 세월 초등학교 조리실에서 일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눅눅한 튀김과 식은 국에 투덜거리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함께 꺼내 놓는다. 그리고 급식실을 다시 바라본다. 가장 시끄럽게 웃던 아이도, 가장 까다롭게 불평하던 아이도 아니다. 말없이 식판을 비우고 조용히 일어나는 아이. 밥 한 끼의 무게를 아는 그 아이가, 어쩌면 이 교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볼펜 하나 때문에 아이는 교무실 문을 두드린다
싸우고 화해할 상대가, 집에는 없다
“선생님, ○○이가 제 볼펜 허락도 없이 썼어요.” “선생님, 쟤가 저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쉬는 시간마다 쪼르르 달려와 친구를 일러바치는 아이들. 작은 갈등 앞에서 어쩔 줄 몰라 곧바로 어른을 찾는다.
이 아이들에게 부족한 건 인성이 아니다. 싸우고 화해해 본 경험이다. 형제자매는 태어나 처음 만나는 타인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자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먹겠다고 멱살잡이를 하고, 아껴둔 음료수를 빼앗기면 끝까지 쫓아가 응징하면서 배운다. 내 욕심만 부리면 관계가 깨진다는 것, 싸운 뒤에도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려면 슬그머니 화해의 손짓을 건네야 한다는 것.
그런데 지금 교실에는 서른 명 중 형제가 셋 이상인 집은 손에 꼽는다. 적잖은 아이들이 외동이다. 집에서 부딪혀 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교실은 생애 처음으로 남과 몸을 부대끼는 곳이다.
그래서 씩씩대며 찾아온 아이에게 곧바로 판결을 내려 주지 않는다. 대신 넌지시 되묻는다. “그래서, 너는 쟤한테 뭐라고 했는데?” 그 물음에 답하려면 아이는 처음으로 상대의 입장에 서 봐야 한다.
“폰 내자, 진짜 세상은 밖에 있다”
그 말이 목구멍에 걸린 날이 있었다
폰을 두고 어른들은 늘 두 편으로 갈린다. 뺏어야 한다는 쪽과 어차피 못 막는다는 쪽. 학교도 집도 매일 이 논쟁을 되풀이한다. 규칙을 정하고, 어기면 다시 조이고, 조이면 아이들은 또 빠져나갈 틈을 찾는다. 이 소모전에서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아침마다 휴대전화를 걷는 교실도 다르지 않다. 한번은 여섯 명이 단체로 안 내고 버티다 걸렸다. 자기들끼리 대화방에서 미리 짜고, 빈 케이스만 태연히 내밀며 시치미를 뗐다. 화가 나기보다 헛웃음이 났다. 신체의 일부 같은 기계를 뺏기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으니까.
그러다 부반장 승호가 스마트폰으로 직접 편집한 학급 영상을 보여줬다. 유튜브로 독학했다는 컷 편집과 선곡에 입이 벌어졌다. 춤을 좋아하는 예서는 틱톡에 영상을 올려 해외 팔로워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건 쾌락에 빠진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 아침마다 하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승호가 만든 영상 속 세상은 가짜일까. 예서가 연결된 넓은 세계는 가짜일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어른의 낡은 잣대보다 훨씬 애매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다음 날 아침, 또 휴대전화를 걷는다. 다만 그 이유는 전날과 같지 않다.
아이들을 관찰한 기록, 자신을 들여다본 고백
선생님도 학생이었고, 아이들도 그렇게 어른이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무대에서 내려와 곁에서 보고 받아 적는다. 명품 패딩 안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은 아이를 보고도 모른 척, 함께 놀이기구를 탄다. 오늘 대판 싸운 두 아이가 며칠 후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을, 판정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그런데 그 시선은 번번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아이를 나무라다 말고, 짜장면 앞에서 기가 죽었던 중학교 3학년의 자신을 떠올리고, 졸업식 날 아버지에게 오지 말라고 말했던 기억을 꺼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아이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재어 보다가, 학생을 지켜본 기록에 어느새 자기 고백을 나란히 적는다.
선생님은 교과서의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그으라고 말한다. 시험에 나오니까. 그러나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 정작 굵은 밑줄은 아이들이 직접 자기 삶에 긋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오늘도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교과서가 미처 담지 못한 문장들을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