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01 방향 상실의 시대와 혼돈
오랜 기간 블록체인과 관련한 규제는 명확한 나침반이 없는 상태로 표류해 왔다. 투기적 자본이 만들어낸 가상자산 시장의 거대한 변동성이 전 세계 경제에 무시 못 할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정작 시장 참여자와 정책 당국자들은 이 기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혁신이라는 명분 아래 현상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으며, 규제에 있어서는 당장에 터져 나온 문제에 대처하기에도 바빴다. 그러한 와중에 블록체인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기술적 정의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금융산업에 '왜' 굳이 블록체인이 필요한가에 대한 철학적 합의는 부재했던 것이다.
'탈중앙화'라는 매혹적인 내러티브는 2022년의 고금리 기조와 테라-루나, FTX 사태, 그리고 이어진 2025년 10월의 대규모 디파이 청산 위기를 통해 냉혹한 검증의 도마 위에 올랐고, 시장은 결국 "규제 없는 금융의 지속이 불가능하다"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비트코인 ETF의 승인과 주요국 정부의 전향적 태도로 유동성이 다시 가상자산 시장에 유입되기는 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가상자산 시장이 더 이상 '규제 밖의 섬'으로 남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가상자산 시장은 탈중앙화의 규제되지 않은 야생의 상태를 벗어나, '금융규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투자자 보호와 시스템 안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02 블록체인과 금융의 통합과 재발견
이와 같은 진통과 혼란 속에서, 시장은 조용하지만 거대한 지각 변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막연한 탈중앙화의 구호가 걷힌 자리에는 블록체인의 제도화와 '기존 금융과 디파이의 통합(DeFi and TradFi Integration)'이라는 실질적인 시장 수용의 흐름이 펼쳐졌다.
스테이블코인과 RWA(현실자산토큰)의 부상은 블록체인이 단순한 투기 수단에 그치지 않고, 실제 금융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에 따라 업계는 이제 규제와 싸우는 대신, 규제라는 환경 안에서 작동 가능한 블록체인 인프라를 상용화하며 해당 기술의 진정한 쓰임새를 찾아가고 있다.
결국 이러한 통합 과정의 최전선에 바로 토큰증권이 있는 것이다. 증권의 영역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현행의 중앙화 서버보다 느리고 비용도 더 높은 블록체인을 굳이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금융산업의 해묵은 과제인 이해상충의 해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막대한 인력과 감시 시스템을 통해 유지해 온 금융산업의 신뢰 구조를, 기술적 무결성을 통해 자동화하는 것이 바로 블록체인이 금융에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라 할 수 있다. 비록 속도가 조금 느릴지라도, 기술적 구조를 통해 대리인 비용을 제거하고 기존의 신뢰 비용을 혁신할 수 있다면, 블록체인 도입의 당위성은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03 저서 제1권의 한계와 새로운 질문들
지난 2024년 8월 말 출간된 공저자의 '블록체인과 증권' 제1권(Part 1~7)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토큰증권(Security Token)'이라는 낯선 존재를 우리 법체계 안으로 호출하는 작업이었다. 자본시장법상 증권의 정의를 세우고, 이것이 단순한 가상자산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법적 성격' 규명에 역량을 집중했다.
하지만 '토큰증권은 곧 증권이다'라는 선언만으로는 시장에서 블록체인의 혁신이 작동하지 않는다. 때문에 동 혁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토큰증권의 권리가 명확히 전자화되어야 하고, 거래는 효율적인 시장 구조 위에서 체결되어야 하며, 결제는 기술적 무결성을 담보해야만 한다. 우리는 제1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그러나 향후 제도의 성패를 가르게 될, 다음과 같은 더욱 무거운 질문들을 마주하고 있다.
"비정형적 신종 권리는 어떤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하는가?", "블록체인 위에 기존의 인프라 구조를 그대로 얹는 것이 타당한가?", "증권은 토큰화되었는데, 대금(결제)은 왜 여전히 레거시 은행망에 머무는가?", "나아가 이 모든 복잡한 금융 로직을 오차와 조작 없이 실행해 낼, 블록체인의 물리적 연산 엔진(EVM; Ethereum Virtual Machine)과 스마트 컨트랙트는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금융인프라의 발행, 결제, 청산 프로세스가 자동으로 실행되도록 스마트 컨트랙트로 대체할 수 있는가?"
공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풀어내기 위해 본서(제2권)를 기획하게 되었다. 만약 제1권이 토큰증권 제도 '입문서'에 해당한다면, 제2권은 토큰증권을 작동시키는 '설계도'이자 발행 및 유통 인프라에 대한 '비판적 제언'이다.
04 토큰증권 생태계의 핵심과제와 그에 대한 실질적 구현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법적 정의를 넘어 구체적인 시장과 권리를 규명한다.
'블록체인과 증권' 제1권이 토큰증권의 이해, 증권성 판단, 증권의 법적 장부와 토큰증권의 관계 등에 집중했다면, 본서(제2권)는 '투자계약증권' 등 신종 권리가 어떤 방식으로 외형화되는지(Part 8), 그리고 비정형 증권의 유통을 위해서는 기존 경쟁매매가 아닌 '다자간 상대매매' 기반의 장외 시장 구조가 필수적인 이유(Part 9)에 대해 다룬다.
둘째, 기술 혁신을 저해하는 기형적 인프라 구조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현재 논의되는 '2-Tier(전자등록기관과 계좌관리기관)' 구조는 블록체인의 장점인 효율성을 훼손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본서는 블록체인 본연의 '1-Tier' 장부 구조를 제안하고(Part 10),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EVM과 스마트 컨트랙트라는 기술적 실체와 거버넌스 엔지니어링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다(Part 12).
셋째, 반쪽짜리 혁신을 넘어 결제의 완결성을 추구한다.
만일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는 증권의 결제만 이루어지고, 대금의 결제는 기존의 망에서 이루어진다면 진정한 혁신이라 할 수 없다. 본서는 이에 대해 스테이블코인과 CBDC를 활용한 '아토믹 스왑(Atomic Swap)'을 통해 증권과 대금이 동시에 교환되는 토큰증권 결제 혁신의 청사진을 그려본다(Part 11).
넷째, 프로그래머빌리티(Programmability)의 실체를 추적한다.
1-Tier 장부나 자동화된 결제 혁신이 현실의 금융인프라 위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려면, 관련한 업무처리를 오차 없이 실행할 수 있는 물리적 엔진이 필수적이다. 본서는 단순한 장부의 기능을 넘어서는 EVM(이더리움 가상 머신)의 결정론적 실행 구조와 스마트 컨트랙트를 심층 해부하며, 이 기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금융의 복잡한 로직을 오작동 없이 처리하는지를 규명한다(Part 12).
05 퍼블릭 블록체인과 미래를 향한 시선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이더리움과 같은 공개형 블록체인 위에서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의 산업 동향이나 디파이(DeFi) 연계, 제도화 수준 등이 여전히 불확실성에 놓여 있는 만큼, 본서에서 퍼블릭 블록체인 생태계의 전면적인 도입까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다.
따라서 본서는 우선 현재 진행 중인 '한국형 허가형 토큰증권 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조속한 기간 내에 토큰증권 제도의 현실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부분에 연구를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향후 퍼블릭 블록체인으로의 확장과 글로벌 금융 통합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제언은 일단 우리 자본시장이 앞으로 풀어가야 할 다음 단계의 과제로 남겨둔다.
자본시장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단 두 권의 책으로 완전히 정리하기에는 미처 다루지 못하는 쟁점들이 있어서 공저자들로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의 혁신 방안 등 본서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후속 논의들은, 향후 기회가 닿는 대로 독자 여러분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연구를 이어갈 것을 약속드린다.
우리들은 지금 '투기의 파도'를 넘어 '신뢰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역사적인 과도기를 맞고 있다. 이 책이 단순히 블록체인과 증권이 상호 작용하는 관계를 다룬 해설서에 그치지 않고, 전통 시스템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금융의 골격을 세워가는 길을 보여주는 가치 있는 기록이 되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바쁜 와중에도 원고를 세심히 살피며 날카로운 식견으로 원고의 완성도를 높여주신 전자증권법의 권위자 박임출 감수자님과, 본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낌없는 추천의 글을 보내주신 동료 실무자 및 학계와 업계 전문가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