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책머리에 _ 5
들어가는 말 _ 19
제1권
제1장 1910년대 독립투쟁전략의 대전환
제1절 의병전쟁에서 비폭력 정치투쟁으로 41
1.1. 평화혁명으로서 3·1혁명 41
■ 『중화신보』, 3·1혁명을 “맨손혁명”으로 찬양하다 42
■ 박은식·이종일, ‘맨손혁명’이라는 표현을 수용하다 43
■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론과 3·1평화혁명 전략 46
1.2. 임병찬에게 내린 고종과 순종의 거의擧義밀지 47
■ 두 임금에게서 밀지를 받은 유일한 의병장 임병찬 48
■ 순종의 거의밀지 51
■ 순종의 황칙과 고종의 밀칙 59
1.3.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전략서 「관견」 62
■ 천하대세론과 시국론 62
■ 지피지기론: “거국합동擧國合動”의 투쟁개념 66
■ 천시론: 일본 정객들의 좌충우돌 시대 71
■ 이문제무以文制武·거국용동聳動의 비폭력 제승·정산론 72
■ ‘이문제무론’ 비방에 대한 비판 76
1.4. 관작 활용의 조직 대한독립의군부 78
■ 대한독립의군부 관제 78
■ 국권반환 투서와 태극기게양 작전 시행계획 82
■ 고종의 「관견」 비준과 대한독립의군부 인사편제 83
‐ 대한독립의군부 사령총장 임병찬 84
‐ 13인의 총대표와 14인의 각도 대표 86
1.5. 조직사업과 비폭력 정치투쟁의 개시 89
■ 대한독립의군부의 전국적 조직과 노출 89
■ 둔헌 자신의 개인적 비폭력 정치투쟁과 순국 91
제2절 「관견」의 영향과 3·1평화혁명 전략의 탄생 94
2.1. 대한독립의군부에 대한 이종일·손병희의 접촉과 지원 95
■ 임응철(임병찬의 아들)과 이종일의 접촉 96
■ 이종일의 독립의군부 재정지원과 손병희의 지지 99
■ 「관견」과 손병희의 전략적 구상의 합치 100
■ 독립의군부 와해에 대한 이종일·손병희의 공지共知 102
2.2. 「관견」의 확산과 3·1평화혁명 전략의 일관된 관철 104
■ 『고등경찰요사』에 기록된 「관견」의 전국적 살포 105
■ 대한독립의군부 총대표들의 3·1혁명 참여와 지도 107
■ 기타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원들의 3·1혁명 참여 115
제2장 3·1혁명과 거족적 평화투쟁
제1절 혁명 개념과 3·1혁명의 정명正名 125
1.1. 혁명의 개념정의 126
■ 대중적 혁명주체의 존재 127
■ 혁명성과로서의 국가창건과 신新정권 수립 128
‐ 국가창건의 경우 128
‐ 정치혁명과 신新정권 수립의 경우 131
1.2. 세계사 초유의 최대 민족혁명으로서 ‘3·1혁명’ 132
■ 3·1거사는 세계사 초유의 ‘전민족적’ 최대항쟁 134
‐ 시위 횟수 2300회, 참여자 202만 명 135
‐ 압도적 빈도의 만세구호 “대한독립 만세!” 139
‐ 제암리사건 등 집단학살사건들 144
‐ 전국적으로 혁명을 확산시킨 고종의 인산 148
‐ 대중 속에서 ‘건국’ 아이디어의 자연적 발생 153
■ ‘소프트파워 혁명’으로서 비무장·비폭력의 3·1혁명 158
‐ 끝까지 견지된 비폭력·비무장 평화투쟁 노선 158
‐ 정당방위 차원의 주먹다짐·투석·방화 행위 166
■ 대한민국의 건국과 임시정부의 수립 187
‐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19년 4월 11일! 188
‐ 미국의 건국절(독립기념일) 지정 사례 190
‐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노르웨이·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201
■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민족·민주·사회혁명 215
‐ 최남선의 후일담과 「독립선언서」의 혁명성 216
‐ 「독립선언서」의 결함과 혁명주체들의 실천적 보완 225
1.3. ‘3·1혁명’이냐, ‘3·1운동’이냐? 228
■ 임시정부와 해방공간에서 ‘3·1혁명’ 명칭의 통용 229
‐ 임시정부와 외국신문에서 통용된 명칭 ‘3·1혁명’ 229
‐ 3·1혁명을 ‘3·1운동’으로 격하한 즉각결전파와 급진좌파 244
■ ‘3·1혁명을 ‘3·1운동’으로 바꾼 제헌의회의 블랙코미디 250
‐ 행정연구위원회+유진오 공동 헌법초안 251
‐ 제헌의회의 헌법초안 제1·2독회 254
‐ 제3독회에서 ‘3·1혁명’을 ‘3·1운동’으로 변경 255
‐ “‘독립혁명’이란 말은 없다”는 이승만의 황당 논변 258
‐ 세계사에 즐비했던 독립혁명들 261
‐ ‘3·1혁명’을 기어코 삭제한 숨은 정치적 이유 265
■ 이제 ‘3·1혁명’으로의 정명正名이 필수적 270
‐ 정치사회적 움직임과 오늘날 학계의 통설 270
‐ 새천년, 새 시대의 정명 필요성 272
제2절 고종 독시毒弑와 3·1혁명의 발발 274
2.1. 고종의 독시와 ‘죽음의 거의밀지’ 279
■ 고종의 파리밀사 파견과 북경망명 계획 281
‐ 고종의 파리강화회의 특사파견 추진 282
‐ 고종의 북경망명 결단 295
■ 일제의 고종 독시 작전 301
‐ 1919년 1월 6일 민영돈 독살을 통한 독약 실험 302
‐ 1919년 1월 20일 밤 독약시해의 실행 304
‐ 빙반氷盤과 법의학적 사실 321
‐ 고종 독약시해에 대한 여러 증언과 기록들 326
‐ 최종적 확증결론: 청산가리에 의한 독시와 시해범들 338
2.2. 고종 독살과 대중적 혁명주체의 거족적 궐기 353
■ 독살 소식의 확산과 혁명동학革命動學의 형성 354
‐ 3·1혁명의 결정적 동인으로서 ‘고종의 독시’ 358
‐ 고종의 ‘계산된’ 순국과 ‘죽음의 거의밀지’ 370
‐ 고종의 순국과 순국을 각오한 혁명대중의 형성 374
‐ 머나먼 니콜스크에서도 비분의 태황제 추도회 397
■ ‘역사의 종언’으로서 ‘고종의 죽음’과 ‘혁명적 인산’ 399
‐ ‘반만년 역사의 종언’과 민족의 재탄생 399
‐ 민족 대이동과 인산인해의 ‘혁명적 인산’ 403
■ 3·1혁명기 순종의 ‘무언의 저항’ 410
‐ 순종의 처참한 심경과 왜식장례에 대한 반발 411
‐ 시위금지 명령을 내리라는 강요에 대한 거부 417
■ 유림의 친일화와 민족유림의 늑장소극笑劇 「파리장서」 418
‐ 3·1혁명에 반동한 전국의 친일 유생들 418
‐ 황도유학과 유약군주론에 빠진 유생들의 무복론無服論 420
‐ 곽종석의 늑장과 「한국유림독립청원서」(파리장서) 422
2.3. 3·1혁명에 대한 ‘결정적’ 외인外因도 있었나? 426
■ 1917년 10월 뉴욕의 약소민족동맹회의 429
■ 레닌의 민족해방 테제 431
‐ 1917년 11월 12일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 선언」 431
‐ 1918년 1월 3일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 432
■ 1918년 1월 8일 윌슨의 「14개항」과 민족자결주의 434
‐ 「14개항」 가운데 제5항의 의미 434
‐ 윌슨 자신에 의한 제5항 민족자결 원칙의 제거 436
‐ 한국인들에 의한 기만적 민족자결론의 역이용 437
‐ 민족자결 테제 확산을 막으려는 일제의 보도관제 440
■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외부요인들 447
‐ 고종독살 소식과 독립선언 현장의 통곡소리 455
‐ 분노와 통곡에 묻힌 외부요인 459
‐ 「2·8선언」의 문제점과 역사적 무지 463
‐ 「2·8선언」은 결코 3·1혁명의 ‘자극제’가 아니었다 465
‐ 「2·8선언」 그 후 470
■ 만주 대한독립의군부의 「대한독립선언」(1919. 3. 11.) 472
‐ 재만 대한독립의군부의 결성 473
‐ 재만 대한독립의군부의 「대한독립선언서」 475
‐ ‘무오독립선언’ 명칭은 오류 476
‐ 「대한독립선언서」의 내용분석 484
‐ 3·1혁명의 ‘결정적’ 동력에 대한 최종 확인 489
2.4. 3·1평화혁명의 국제적 파장 494
■ 서방세계의 국제적 관심과 우호적 여론의 형성 495
‐ 3·1혁명에 대한 세계언론의 전반적 보도추이 496
‐ 서양 신문매체들의 동조적 보도 505
‐ 국제여론전에서 3·1혁명의 완승과 미국의회 518
■ 중국의 5·4운동에 대한 3·1혁명의 영향 523
‐ 3·1혁명과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운동 523
‐ 3·1혁명과 중국의 5·4운동 526
■ 인도의 사탸그라하운동에 대한 3·1혁명의 영향 536
‐ 남아공에서 간디의 사탸그라하 운동 538
‐ 3·1혁명에 대한 인도 신문들의 경쟁적 보도 541
‐ 3·1혁명에 대한 간디의 야릇한 침묵과 네루의 찬양 568
‐ 롤라트 사탸그라하 운동의 실패와 ‘소금 행진’ 574
‐ 간디의 비폭력은 ‘허울’, 무력을 통한 인도의 독립 581
제2권
제3장 대한민국의 건국과 임시정부의 수립
제1절 헌법제정과 대한민국의 건국 593
1.1. 3·1혁명 전후 공화제 국가개념의 등장 593
■ 3·1혁명 과정에서 건국 이야기와 건국방안들 593
‐ 민중 속의 독립국가 발상 594
‐ 손병희의 민주국가 건국구상 596
■ 신한혁명당과 「대동단결선언」의 신한국 구상 599
‐ 신한혁명당의 입헌군주제 ‘신한국’ 건립시도 599
‐ 「대동단결선언」의 ‘신한국 건국’ 제창 604
‐ 「대동단결선언」의 암약暗弱군주론 611
1.2. 대한민국 국호의 제정 624
■ ‘민국’ 개념의 250여 년 장구한 전사前史 624
‐ 영·정조와 순조의 민국이념과 ‘민국’의 용례 630
‐ 고종시대 ‘국민국가’로서의 민국 개념의 정착 640
‐ 공맹의 민유방본론과 백성자치론 651
‐ 민유방본론의 직해直解와 민본주의적 민국사상 655
‐ ‘민국’ 국체와 ‘평민국가’로서의 ‘국민국가’ 683
‐ 민국과 국민형성: ‘민’에서 ‘국민’으로 695
■ ‘대한민국’이라 불린 대한제국 701
‐ 고종의 구본신참론과 국호 ‘대한’의 제정 704
‐ 1899년 아펜젤러의 『독립신문』, ‘대한민국’ 첫 사용 722
‐ 1903년 정부의 태환증권에서 ‘대한민국’ 국호 사용 723
‐ 1907·1909년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민국’ 등장 725
‐ 1909년 『대동공보』에서 ‘대한민국’ 국호 사용 727
‐ 1909년 정치·사회단체에서 ‘대한민국 만세’ 삼창 729
‐ 대한제국기 ‘대한민국’ 국호의 대중화의 역사적 의미 733
‐ 대한제국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은 쓰이지 않았다 737
‐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일왕의 칙령 740
■ 1910년대 ‘대한大韓’ 또는 ‘신한新韓’의 빈번한 사용 749
‐ 국호 ‘신한’과 ‘신대한’ 750
‐ 3·1혁명과 그 이후의 국호 ‘대한大韓’ 752
■ 표결을 통한 ‘대한민국’ 국호의 결정 754
‐ 대한민국 국호의 진짜 발의자 조소앙 755
‐ ‘대한’을 둘러싼 ‘대한세대’와 ‘일제세대’의 대립 763
‐ 국호 ‘대한’의 계승과 항일의 의미 777
‐ ‘민국’에 관한 논란 여지의 임기응변적 차단 783
■ 민족분단에까지 이르는 ‘대한’과 ‘조선’의 대결사 788
1.3. 헌법의 제정과 대한민국의 건국 791
■ 3·1혁명 열기 속에서 건국·정부수립 방안들 792
‐ 조소앙의 임시헌장 초안 792
‐ 신한민국 임시정부안 796
‐ 조선민국 임시정부안 810
‐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안 818
‐ 한성정부안 826
■ 4월 11일 임시헌장 제정과 대한민국의 건국 843
‐ 정부 수립이냐 정당 창당이냐 843
‐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정 844
‐ 아시아 최초의 완전한 남녀평등 조항 848
‐ 제8조 ‘구황실 우대’와 복벽파를 위한 고려 849
‐ 복벽파와 공화파의 동족상잔(1919-1924) 856
‐ 국무총리제의 확정과 정부각료 선임 866
‐ 신채호가 문제 삼은 이승만 위임통치론의 실체 879
‐ 4월 11일은 건국일이고 정부수립일 892
■ 9월 11일 임시헌법과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 895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창기 혼란과 표류 896
‐ 안창호의 통합 임시정부 추진 899
‐ 임시헌법의 제정과 통합 임시정부의 탄생 909
‐ 이동휘와 이승만의 상해 도착과 취임 928
제2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933
2.1. 국제법상 국가승인과 정부승인의 효과 933
■ 법적(de jure) 승인과 사실상의(de facto) 승인 934
■ 법적 승인의 소급 효과 938
2.2. 세계 각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939
■ 소련, 최초의 임정 승인에서 승인 견제로 939
■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의 한국임정 승인 954
■ 중화민국: ‘법적 승인’에서 ‘사실상의 승인’으로 960
■ 미국, 불승인 정책에서 ‘사실상의 승인’으로 995
■ 프랑스 망명정부의 ‘사실상의 승인’과 외교실책 1021
■ 여언餘言과 소결 1047
맺음말 _ 1054
[부록1] ‘옥파(묵암)비망록 위작설’에 대한 비판 _ 1065
[사료1] <대동단결선언〉 _ 1075들어가는 말 19
[사료2] <2·8독립선언서〉 _ 1083
[사료3] <기미독립선언서〉 _ 1089
[사료4] <대한독립선언서〉 _ 1093
[사료5] <신한민국임시정부안〉 _ 1097
[사료6] <조선민국임시정부안〉 _ 1099
[사료7] <한성임시정부안〉 _ 1106
[사료8] <신채호의 이승만위임통치론 성토문〉 _ 1112
[참고문헌] _ 1115
[찾아보기] _ 1141
[본 문]
3·1혁명은 평화적 맨손혁명 전략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며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만세시위의 고조된 열기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 직후부터 3·1혁명의 평화적 맨손투쟁 전략을 계승하려는 독립운동세력과, 이 맨손투쟁 전략을 일제의 민중학살에 무방비로 당한 ‘비겁한’ 또는 ‘유약한’ 투쟁전략으로 비판하고, 또 초기 임정과 이승만의 독립외교론도 배격하고 신민회의 독립전쟁론도 ‘준비론’을 배제하면서 화급하게 무력투쟁에 나서기를 부르짖는 독립운동세력으로 분화·분열이 일어났다.
(pp.37-38 중에서)
‐ 정당방위 차원의 주먹다짐·투석·방화 행위
물론 3·1혁명이 장기화되면서 일제의 잔혹한 학살에 맞서 민중들이 ‘자위自衛’를 위해 격렬하게, 그러나 비무장 수준에서 저항한 사례들도 있었다. 초기 평화시위가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유혈이 낭자하게 되어가자 일부 지역에서는 맨주먹의 주먹다짐, 전통적 민속놀이인 ‘석전石戰’이나 농기구 등으로 왜경과 왜군의 무력진압에 맞서고 왜경파출소·헌병분소·관공서를 방화하기도 했다.
(p.166 중에서)
그런데 중국이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갔다가 1916년 6월 다시 공화국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북경 사람들이 옆 나라에서 망명 온 황제를 좋게 대할 것 같지 않은 불확실성이 돌출되었다. 그러자 고종망명 논의는 망명계획이 무모하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조남익은 태황제의 유폐된 처지, 독살당할 위험에 노정된 상태, 영친왕이 일본여인과 혼인하면 황통의 단절 등을 들며 고종이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하고, 북경으로 갔다가 여의치 않으면 상해나 홍콩으로 이어移御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이회영도 거들었다. 그간 국내인들이 많이 변질되어 해외로 망명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금지원도 하지 않는 판국인데도 “태황제의 명이다”라고 하면 돈을 내놓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고종의 여전한 절대적 권위를 확인하고 “만약 황제께서 망명하신다면 독립운동의 불길이 엄청나게 일어날 겁니다”고 피력했다. 이로써 망명계획에 대한 불안감은 해소되었다.
(p.299 중에서)
조선 후기에도 영조나 정조의 인산 때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은 실록 등에 등장하지만 당시 한양의 상주常住 인구와 유동 인구의 규모를 고려할 때, 1919년 당시 서울 인구의 몇 배에 달하는 수십만 명(당시 추산 약 50-60만 명)이 한꺼번에 몰린 것은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1659년 효종의 인산 때는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 수많은 백성이 모여 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800년 정조의 인산 때는 정조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이 각별했기에 당시 한양의 모든 백성이 거리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인산 때는 주로 한양 및 인근 경기 지역 거주자에 국한되었고, 고종 때처럼 전국 차원의 인구 대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pp.404-405 중에서)
‐ 3·1혁명의 ‘결정적’ 동력에 대한 최종 확인
최종적으로, 「2·8독립선언서」의 기초든, 「3·1독립선언서」의 기초든, 「대한독립선언서」의 기초든 외인의 영향보다 결정적인 동인은 고종의 독살이었고, 민중의 목숨 건 항쟁을 부른 고종의 순국으로 통곡 속에서 끝나는 과거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고종의 순국이 불러일으킨 “민중의 비무장 맨주먹 순국투지”는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로 끝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비장한 최후 문장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 민중은 고종의 순국을 따라 자기들도 맨손·맨주먹으로 싸우다가 순국하려고 생각했고, 순국을 각오한 이런 고귀한 충군애국 투지와 담대한 자기희생 의지는 3·1혁명이 계속되는 10-11월까지도 변함없었다. 전형적 친일매국노 윤치호조차도 1919년 5월 31일 일기에서 민중의 순국의지와 침착함에 감탄했다.
(pp.489-490 중에서)
■ 인도의 사탸그라하운동에 대한 3·1혁명의 영향
인도에는 3·1혁명이 발발하기 전 간디가 창안한 무저항·불복종의 저항운동으로 ‘사탸그라하(Satyagraha)운동’이 있었다. ‘사탸그라하’는 불변적 진리를 견결히 잡는 것, 즉 진리 파지把持, 진리 견지, 진리 고수의 의미를 가진 간디의 조어인데, 영어로 “passive resistance”로 번역되어 알려졌다. 그러나 간디는 이 영역을 못마땅해 했다. 정신적 강력함을 뜻하는 이 말이 무력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탸그라하’는 여럿이서 불변적 진리를 고수하듯 자기들의 참된 주장을 몸으로 견디며 내세우고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비폭력·불복종으로 저항하는 것을 뜻했다. 간디는 사탸그라하전략을 10만 안팎의 인구집단에 적용하여 실제로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p.53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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