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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36425425 |
|---|---|
| 쪽수 | 15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마음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니?”
상처마저 끌어안고 성장케 하는 목소리
김상희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마음의 상처가 자라는 풍경이다. “마음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니?”(「마음 오르기」)라는 물음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처럼 읽힌다. 시인에게 마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늙고 병들고 상처 입으며 자라는 존재이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짐승이 발목을 스치며 지나간다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안아버렸지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물을 건넸다 짐승은 빠르게 자랐다 이빨이 쑥쑥 나고 다리가 길어지고 맘마 맘마 엄마 엄마 발음할 줄 알게 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를 내고 이내 슬픔을 가지게 되고 (…) 나는 아주 먼 곳까지 걸었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짐승이 발목을 스치며 지나간다 나의 사랑스러운 짐승인가 내가 도려낸 바로 그 짐승인가
―「가장 먼 곳」 부분
내가 키우고 “내가 도려낸 바로 그 짐승”은 상처받은 마음 자체를 나타낸다. 그 마음이 자라는 시간을 함께한 자리에서 그것이 사랑인지 상실인지는 끝내 판가름 나지 않지만, 시인에게 있어 그것은 성장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성장이란 상처를 극복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해결의 무게를 지닌 채로도 계속 나아가는 일인 셈이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마음 오르기」)라는 고백과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도 의미가 있을 때”(「재탄생」)라는 구절은 각각 사랑과 상실이라는 상반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둘 다 정해지지 않은 채로 끌어안고 걸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시인이 말하는 성장이란 바로 그렇게, 사랑인지 상실인지 끝내 알 수 없는 채로도 계속되는 시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두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름을 놓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이름
김상희의 시선은 늘 세상의 중심보다는 “밟혀 죽을 것 같은 작은 것들”(「말하는 희망」)이 있는 가장자리를 향한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서글플 만큼 어린 소녀가 모퉁이를 돌아 달려오는” 풍경이 있고, “그저 지나갈 뿐”(「지구적인 면모」)인 무력한 존재들이 서 있다. 그는 그 모서리 너머로 사라지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하게 흘러가는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며 어디선가 외롭게 죽어가고 있을 “모르는 사람의 이름”(「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소식」)을 불러보고, “그의 이름을 몰라도 그를 애도할 수 있다”(「티백 위의 남자」)고 되뇌며 스스로 그 이름의 자리를 대신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 누군가의 자리를 지켜주는 일과, 이름으로 그를 어떤 틀 안에 가두는 일은 어쩌면 한끗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 위태로운 경계를 표제작 「두나」는 정면으로 파고든다.
인간이 되자, 인간이 되자, 두나에게 말하면 두나는 금세 투명해진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닦여버린다. 지워져버린다. (…) 내가 두나를 불러서 두나는 두나가 된 것인데 내가 두나를 부르지 않으면 두나는 두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나의 어깨를 붙잡는다. 새로운 종과 처음 닿는 것처럼 깜짝 놀라 두나를 본다. 나는 두나를 놓친다. 두나는 더 멀리 간다. 두나 없는 두나가 고개를 든다. 두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두나」 부분
화자는 청소 로봇인 두나에게 “인간이 되자, 인간이 되자” 말을 걸지만 두나는 인간에 가까워지기는커녕 투명해지고 지워질 뿐이다. “내가 두나를 불러서 두나는 두나가” 되었듯 이름을 준다는 것은 곧 존재를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어떤 틀 안에 붙들어두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화자가 끝내 두나를 놓치는 순간, “두나 없는 두나가 고개를” 들고 “두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화자와 두나를 이어주던 이름이 끊어지는 순간이자, 그 이름 위에 세워져 있던 관계와 세계가 함께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만이 아니다. 이름이 지워진 뒤에야 비로소 고개를 드는 “두나 없는 두나”처럼, 무너짐은 이름 너머의 존재가 처음으로 스스로 나타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채로도 자라나는 마음처럼, 누군가 지어준 이름과 역할을 벗어난 자리에서, 관계가 끊어지고 세계가 무너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짜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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