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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66688454 |
|---|---|
| 쪽수 | 296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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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아름답게 쓰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얼마나 잔혹한지 끝까지 쓴다
『환상청』의 첫 문턱에서 독자는 곧바로 질문을 받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지키는 일인가, 아니면 끝내 내 안에 넣어 없애는 일인가. 〈손〉의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한 입까지” 자신을 먹어달라고 청하고, 〈온실에서 얼어 죽은 남자〉의 나무는 정원사의 시체를 뿌리로 끌어안아 꽃을 피운다. 애무는 살해로, 돌봄은 포식으로, 사랑은 소멸로 미끄러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장면들은 추악함보다 아름다움에 가깝다.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소설집의 출발점이다.
차일린은 기괴한 사건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몸을 하나의 사유 공간으로 삼아 사랑과 폭력, 쾌락과 고통, 보호와 통제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먹고, 핥고, 듣고, 그리고, 휘감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인물의 욕망은 설명이 아니라 감각으로 드러난다. 독자는 인물의 욕망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몸으로 통과하게 된다.
표제작 〈환상청〉은 이 소설집의 미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청력을 잃은 피아니스트에게 ‘듣는다’는 것은 귀의 기능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의지다. 소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수록 “너를 듣고 싶어”라는 욕망은 더 날카로워지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그 자체야”라는 문장에 닿는다. 결핍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욕망은 비로소 자기 형태를 얻는다.
이때 환상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오히려 현실의 압력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레즈비언 섹스와 부동산의 상관관계〉에서 두 여성에게 사랑을 나눌 방은 곧 주거권이고, 반지하와 전세 사기, 셰어하우스와 공동명의는 성적 자유의 조건이 된다. 〈셋의 의미〉의 중년 여성은 결혼과 모성, 남편의 ‘개방성’ 뒤에 숨어 있던 욕망의 성별 격차를 깨닫고 “내가 하고 싶을 때”를 선언한다. 섹슈얼리티는 사적인 취향이 아니라 돈과 집, 노동과 가족이 얽힌 사회적 현실이다.
그 사회적 몸은 역사로도 확장된다. 〈회색 바다〉에서는 바다에 버린 밀항자들의 시체가 몇 번이고 마을로 돌아오고, 〈옥과 해골〉의 식민지 조선인은 ‘자유’를 ‘지유’라고 발음하며 가난과 제국이 빼앗은 삶을 폭발적인 독백으로 토해낸다. 〈물감을 먹는 화가〉에서는 부검실에서 마주한 백서른여덟 명의 죽음이 살아 있는 연인의 몸 위에 되살아난다. 개인의 상처와 역사적 폭력은 다른 층위가 아니라 같은 몸에 겹쳐 쓰인다.
그래서 『환상청』은 ‘퀴어’, ‘고딕’, ‘환상’ 같은 장르의 명칭으로만 묶기 어렵다. 작가 자신이 대부분의 작품을 순문학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밝히듯, 이 책이 겨누는 것은 사건의 기이함보다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과 문장의 밀도다. 장르문학이 넓힌 자유를 빌려 순문학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던 개인의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문장은 촉감과 냄새, 색과 소리를 집요하게 불러낸다. 차가운 손, 썩는 몸의 열기, 회색 바다와 연분홍 진달래, 푸른 옥과 하얀 해골, 들리지 않는 음악과 피부의 진동. 감각은 장식이 아니라 기억과 욕망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이 감각의 과잉 때문에 죽음은 생생해지고, 현실은 환상보다 더 낯설어진다.
작가가 상상하는 독자는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를 주문하고 아니 에르노를 한꺼번에 빌려 읽는 사람들이다. 『환상청』 역시 그런 독자에게 가 닿는 책이다. 욕망을 도덕적으로 해명하지도, 상처를 다정하게 봉합하지도 않는다. 대신 “왜 이런 욕망을 품는가”보다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욕망을 빼고도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욕망을 해명하지 않는다. 독자가 자기 욕망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