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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24706251 |
|---|---|
| 쪽수 | 23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국내소설
AI추천 이유
더이상 안식처가 아닌 생존의 최전선
공간이 말하는 계급과 소외
“불법의 공간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긴긴 회의가 이어졌고 마침내 우리는 무모하지만 철제계단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랑데부에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건물에서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벽의 일부가 조금씩 무너지는데도 이곳은 건축물 안정등급 C를 받았다.”(「어느 로프공」)
작가는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의 결핍, 상처, 소외라는 현실적 어려움을 드러낸다. 집은 더이상 따스한 안식처가 아니다. 치열한 생존의 최전선이자 계급적 소외를 증명하는 서글픈 상징이 되었다. 「어느 로프공」에서 불법 건물 5층에 터를 잡은 극빈층 인물들은 합법 공간의 주민들에게 ‘윗것’, ‘저것’이라 불리며 멸시당한다.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은 사치일 뿐 아니라 오직 불안과 고립, 차별만을 감내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공간적 소외는 「너의 집이 좋아」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대출을 받아 경기도 외곽의 신축 빌라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지만 정작 주변은 온통 불 꺼진 빈집투성이다. 유령 도시 같은 곳에서 1년째 홀로 버티는 주인공에게 주거 불안과 외로움, 이웃과의 단절을 고스란히 투영하며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렇다면 합법과 풍요의 공간에 진입한 이들은 이러한 불안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울까. 「누가 잠을 자고 누가 깨어 있는가」는 그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 고급 아파트 ‘더 퍼스트 프레스티지 테라스’ 311동 2002호라는 지극히 합법적이고 선망받는 공간에서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주인공의 삶은 역설적이다. 타인의 풍요를 대리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는 계급적 차별과 경제적 결핍,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열등감은 공간의 합법성 유무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상과 내면을 침범하고 트라우마를 재생산하는 시선
그리고 윤리적 부채
“빌려갔으면 제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했으면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이것은 소설인가」)
주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묻는 남자」의 수영이다. 수영이 그토록 잊고 싶어했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촉발한 것은 옆집 남자의 “미림여고 나오지 않으셨나요?”라는 질문이다. 평범한 이 질문은 수영에게 불법 동영상과 연결된 불안과 공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런 불안과 공포는 “한 개의 문장 부호와 열두 개의 글자가 불 꺼진 조명등과 냉장고 손잡이와 개수대에 쌓아놓은 설거짓거리 같은 데로 파고들” 만큼 가장 편안해야 할 집 안 구석구석까지 침투할 뿐 아니라 “발코니 방충망에 잠을 잃은 매미들이 옆집 남자의 눈알처럼 다닥다닥 붙어 여자를 지켜보”듯 수영을 더욱더 고립시킨다. 이처럼 일상 공간마저 잠식한 시선은 수영을 더욱더 소외시키며,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존재론적 불안을 각인시킨다.
여기 주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피해를 입은 또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이것은 소설인가」의 나미다. 하지만 관철 역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다. 대학 동기인 두 사람은 10년간 소식이 끊긴 채 지냈지만 나미가 자신의 블로그에 과거에 겪은 사건과 주변 인물들을 저격하는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다시 연락한다. 나미는 관철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시절 빌려갔던 책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에 관철은 과거 자신의 무책임함을 반성하고 나미에게 사과한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전성욱은 이렇게 평한다. “나미의 귀환이란 바로 그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윤리적 추궁이라고 할 수 있다. 빌려갔으면 돌려주어야 하고, 잘못했으면 용서를 구하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 소설이란 바로 그 상식적인 윤리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타인의 시선이 개인에게 주는 폭력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 시선 아래 묻혀 있던 과거의 책임과 상식적인 윤리 의식을 묻는다.
상처를 통한 관계의 변화,
삶을 새로 일으키는 힘
“엄마도 힘들었겠죠. 그래요. 난 엄마를 이해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감기로 몸이 아팠을 때 엄마한테 날 좀 안아주면 안 되냐고 물었거든요. 우리 엄마가 그때 뭐라 한 줄 알아요? 동희야, 네가 널 안아. 엄마도 너무 힘들어. 엄마는 내 부탁을 매번 거절했어요. 나는 거절 속에서 성장했어요.”(「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
작가는 집이라는 실존적 문제와 더불어 관계의 상처, 주변의 시선, 상실감 등으로 인해 삶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그린다.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의 주인공 동희는 아버지의 외도로 파탄 난 가정, 어머니와의 관계, 거절 속에서 성장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타인과 세상에 깊은 불신을 품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관계를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자기방어적 태도를 취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조금씩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해나간다. 「긁지 마, 제인」의 제인 역시 가족의 해체, 모녀간의 갈등, 실패로 끝난 사랑, 사회적 고립이라는 복합적인 결핍에서 깊은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이 심리적 상처는 피부병이라는 신체 증상으로 발현되어 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이런 제인에게 에어컨은 극심한 피부병의 고통을 견디며 일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생존 도구다. 그러나 제인은 에어컨 실외기를 떨어뜨린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전성욱이 “이 모녀를 사로잡고 있던 해묵은 상처를 떨쳐 보내고, 그들의 미래를 애틋한 희망으로 축복하는 것 같다”고 평한 바와 같이 이는 제인이 자신을 갉아먹던 과거의 상처와 결핍을 툭툭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인물들의 아픔을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주거 불안정이 삶을 어떻게 흔드는지, 해체된 가족과 깨진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고립시키는지를 보여주며 현대사회의 상처 입고 결핍된 관계의 불안정성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해부한다. 삶의 막바지에 내몰린 이들이 서로의 결핍을 보듬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되찾아야 할 ‘윤리적 관계’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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