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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72071196 |
|---|---|
| 쪽수 | 144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시의 언어가 타성에 젖어들 때, 시인은 고요한 정적 속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2006년 월간 『문학도시』로 등단한 이후, 오랜 시간 생활 현장의 묵직한 무게를 견디며 침묵을 지켜온 김루안 시인이 첫 시집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자유 흰토끼 그리고 청개구리』(달아실 刊)를 세상에 내놓았다. 달아실시선 120번으로 나왔다.
이 시집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온 침묵의 껍질을 깨고 나와, 시인의 세계로 다시 노를 저어 나가겠다는 절박하고도 강렬한 존재론적 선언이다.
잔혹한 동화, 안심을 유예하는 미완의 우화
김루안의 시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독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표지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흰토끼, 청개구리, 고양이, 소녀, 회전목마, 유리병 같은 기호들은 본래 동화적이고 따스한 세계를 환기하는 상징들이다. 그러나 김루안 시인의 손끝에서 이 표지들은 독자를 안심시키는 안전장치가 되기를 거부한다. 시인은 환상과 우화의 형식을 빌려오되, 완결된 결말이 주는 평온함을 단호히 유예한다.
시집 속, 시인의 말을 그대로 빌려와 이번 시집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이런 거다.
“어둠은 소녀의 천적이에요/ 어둠의 독방에 앉아 흰토끼를 그린다면/ 마침내 당신과 소녀와 고양이의 장르가 완성된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는 깨어진 유리의 파편처럼 서늘하다. 늙지 않는 소녀와 소멸의 감각, 그리고 유폐된 공간 속에서 피어나는 상흔들은 잔혹극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띤다. 시인은 과거의 아픔이나 상처를 통속적인 감상주의로 다독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파편들을 직면하고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상처 자체를 존재의 근원이자 새로운 감각의 출구로 전환한다.
과거를 폐기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절박한 언어
이 시집이 주는 가장 커다란 미학적 미덕은 언어의 ‘젊음’과 ‘절박함’에 있다. 침묵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시인의 시선은 둔감해지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고 민감하게 제련되었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의 흐름은 자아의 분리와 충돌(1부)에서 시작하여, 소멸과 미완의 폐허를 거쳐(2부),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교차하는 고독의 사유(3부)를 지나, 마침내 방임과 자유라는 미궁 속 고백(4부)으로 이어진다.
조동범 시인이 해설에서 짚어냈듯, 김루안의 시는 과거의 유물에 연연하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시인은 안주할 수 있는 익숙한 서정의 틀을 끊임없이 폐기하며,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의 지평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한다. 그 속도감과 비약 속에서 피어나는 것은 여린 감수성이 아니라, 존재의 미궁을 뚫고 나가려는 젊고 사나운 야성이다.
시의 바다를 향한 자유로운 항해
제목에 등장하는 ‘자유’, ‘흰토끼’, ‘청개구리’는 시인이 향하고자 하는 궁극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순수(흰토끼)와 청개구리 같은 튀는 반항심,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자유’의 상태는 어둠의 독방에서 시를 개척해낸 시인의 결기와 닿아 있다.
시집을 책임편집한 박제영 시인은 이렇게 단언한다.
김루안의 시는 우화를 흉내 내지만 결코 우화로 완결되지 않는다. 동화적 표지들—흰토끼, 청개구리, 고양이, 소녀, 회전목마, 유리병—이 시집 곳곳에 흩뿌려져 있지만, 그것들은 독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안심을 유예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시인의 말에서 이미 그는 스스로 예고한다. “쓰이지 못한 우화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이 시집은 바로 그 미완의 우화, 즉 완결되기를 거부한 채 남아 있는 이야기의 파편들을 모은 목록에 가깝다.
비극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만이 비로소 평온한 아침을 물고 오는 하얀 새를 맞이할 수 있는 법이다. 김루안 시인의 이번 시집은 오랜 정적을 깨고 시의 바다로 다시 노를 저어 나가는 굳건한 서명이자, 읽는 이의 가슴에 오랫동안 서늘한 별빛을 박아 넣는 아름다운 잔혹극이다. 모루유리 창가에 앉아 빛을 향해 줄기를 늘리는 수국처럼, 그의 시가 오랫동안 수많은 외로운 고양이들과 소녀들의 방을 환하게 비추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자유 흰토끼 그리고 청개구리』는 침묵 끝에 피어난 한 송이 서늘한 불꽃이다. 읽는 이의 가슴에 오랫동안 감각의 파문을 일으키는 이 잔혹하고 아름다운 우화집은, 긴 정적을 깨고 시단의 표면 위로 가장 강렬하게 부상한 올 한 해의 소중한 수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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