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에서는 무엇도 인간의 울음을 듣지 못한다
인간 근원에 있는 슬픔에 관한 우주적 고찰
고대 시인들은 “모든 것이 슬프다”고 썼다. 그런데 이 슬픔은 인간의 감정이 세상에 투영된 것일까? 아니면 세상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슬픔이 존재할까? 이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슬플까? 어쩌면 지구라는 행성이 ‘사물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슬픔과 고통, 우울(멜랑콜리)을 우주적 관점에서 살펴본 과학철학 에세이이자 인문비평서 《슬픈 행성》(원제: Sad Planets)이 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산업자본주의 확산과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한 인간소외, 기후변화, 전 세계적 팬데믹 등 현대 인류가 느끼는 위협을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이 책은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지구를 망쳐왔는지를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논조로 설파하며, 우주 한구석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와 그 한계에 대해 말한다. 또한 인간 근원의 슬픔을 다룬 문학, 그림, 영화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우주/지구가 인간 고유의 우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결함이 아닌, 존재의 필연으로서의 비애와 멜랑콜리
“슬픔은 슬픔 그 너머로 가기 위한 길이다”
책은 화성 탐사로봇 오퍼튜니티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물론 감성적으로 편집된 것이기는 하지만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라는 오퍼튜니티의 마지막 메시지가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했다. 여기서 저자들은 의문을 느낀다. 사람들이 오퍼튜니티의 최후에서 느낀 슬픔과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오퍼튜니티는 분명 인간이 아니고, 인류 과학기술의 희망찬 발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걸까? 무생물에도 감정이 있다고 여기는 ‘감상적 허위성(pathetic fallacy)’의 한 사례일까? 물론 저자들은 인간만이 슬픔을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가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에 의문을 품기 수백만 년 전부터 나무는 쓰러져 왔다. 옆에 있는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에 다른 나무들이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도대체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14쪽)
《슬픈 행성》에서 저자들은 사람들이 최후를 앞둔 탐사로봇을 보고 느낀 슬픔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저자들이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 ‘슬픔’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불안, 고뇌, 분노와 형제자매인 동시에, 이것들의 힘과 열정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 남는 것 역시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근본적인 조건, 혹은 선천적인 것에 가깝다. 슬픔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가슴 아픈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심지어는 슬픔 자체가 주는 위로마저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불가피한 사실에 대한 더 깊고 보편적인 이해”(이상 23쪽)다. 그런 면에서 슬픔은 시의적절한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기록과 작품에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투영해 왔다. 지구에 고립된 최후의 인간이나 우주 공간을 표류하는 인류를 그린 수많은 SF 문학부터, 각각 다른 방식으로 멜랑콜리를 그려낸 영화들(〈멜랑콜리아〉, 〈구멍〉 등), 행성 토성이 상징하는 우울과 광기가 깃들어 있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권태와 허무로 가득한 이상(李箱)의 작품까지, 저자들은 지역과 장르를 넘나들며 인류 근원에 있는 부정적 정서를 담은 예술작품을 두루 탐구한다.
하지만 행복에 가치를 부여하고 슬픔을 비롯한 감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에서 깊은 우울감이나 비애, 절망, 침울함, 애도 같은 정서를 드러내는 일은 금기에 가깝다.
물론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부정적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 세상이 비애로 채워진 크고 정교한 무대가 되어갈수록 전문가와 친구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싸우고 슬픔을 극복하고 내면의 기쁨을 다시 발견하라고 더 강하게 요구한다. 마치 행복이 우리의 초기 설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태어날 때 울부짖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591쪽)
저자들은 이렇듯 사회의 소통 체계가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열심히 퍼뜨리는 와중에는 그런 강박을 벗어던지고 슬픔을 수용하는 태도가 오히려 해방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 감정의 디폴트값은 슬픔이다.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슬픔은 슬픔 그 너머로 가기 위한 길”(579쪽)이라는 저자들의 말처럼, 인간 근원의 슬픔을 이해해야 그 밖의 고통받는 존재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류의 멸종은 누가 애도할 것인가?
그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
인류는 행성과 우주에 대해 지금처럼 많이 알았던 적이 없지만, 고향 행성인 지구로부터 지금만큼 소외되었다고 느낀 적도 없다. 이 책이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위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등장한 ‘기후 불안(climate anxiety)’, ‘생태 애도(eco-grief)’, ‘솔라스탤지어(solastalgia)’ 같은 용어들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을 뿐인 이 행성을 마주하는 순간에 느끼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행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 비탄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행성적 슬픔이라는 이 기묘한 느낌 자체가, 애초에 이 행성이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지표인 걸까? 이러한 사색의 배경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동시에 불가피한, 인간 멸종이라는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 멸종은 머나먼 미래의 일일까? 아니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현실일까? 우리는 한 종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인간 멸종 뒤에 남아 우리를 애도해 줄 존재는 누구, 혹은 무엇일까?(6~7쪽)
광범위한 주제를 넘나드는 사유 끝에 저자들은 비애란 내부의 감정과 외부의 정서의 간극에서 생기는 것, 즉 지구를 의인화하고 대상화하는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그러든 말든 관심 없는 지구의 간극에서 비롯된다고 결론 내린다. 쉽게 말해서, 인류가 멸망해도 지구는 남아있다. 그리고 인간 존재가 기본적으로 슬픈 건, 인간이 ‘어떤 종이든 탄생부터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각이 인간에게 비애와 허무를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사회적 차원의 재난은 그렇잖아도 짧은 인간의 수명을 더 짧게 만들고, 지동설 이래 지금까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과학적 증거 역시 계속 발견되고 있다. 즉, 지구는 인류만의 것이 아니다. ‘초(超)바다 이론’에 따르면 인류는 바다가 육상을 점령하기 위해 진화시킨, 물의 속성을 지닌 운반체일 뿐이다. “우리 존재는 ‘눈물’이라는 비효율적인 물질을 연료로 태우며 바다를 은하수까지 실어 나르는 자율추진식 운반체에 불과할 수도 있다.”(134쪽)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또한 인간만을 위해 설계된 순수하고 중립적인 기체가 아니며,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 낸 배설물이다. “우리의 허파는 언제나 누군가가 ‘이미 사용한’ 산소로 채워지고 있으며, 그 산소는 이전 생명체들이 내쉰 숨결 덕분에 존재”(430쪽)한다.
600페이지가 훨씬 넘도록 우주 차원에서의 하찮은 인간 존재와 그에 따른 비애 및 허무의 정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메시지가 그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피치노가 멜랑콜리를 “스스로를 성찰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고뇌의 기분이며, 인간의 자기인식이 가진 한계를 무력하게 반추하게 되는 상태”(78쪽)라고 설명한 것처럼, 슬픔의 정서는 인류에게 지구를 상대로 한 착취를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기후변화, 환경 파괴, 인간소외, 우주적 고독과 관련된 우울한 정서를 탐구하는 책 《슬픈 행성》은 ‘우주에서는 무엇도 인간의 울음을 듣지 못한다’는 진실에 대한 슬픈 이해이자, 그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다.
우주에서는 무엇도 인간의 울음을 듣지 못한다
인간 근원에 있는 슬픔에 관한 우주적 고찰
고대 시인들은 “모든 것이 슬프다”고 썼다. 그런데 이 슬픔은 인간의 감정이 세상에 투영된 것일까? 아니면 세상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슬픔이 존재할까? 이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슬플까? 어쩌면 지구라는 행성이 ‘사물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슬픔과 고통, 우울(멜랑콜리)을 우주적 관점에서 살펴본 과학철학 에세이이자 인문비평서 《슬픈 행성》(원제: Sad Planets)이 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산업자본주의 확산과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한 인간소외, 기후변화, 전 세계적 팬데믹 등 현대 인류가 느끼는 위협을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이 책은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지구를 망쳐왔는지를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논조로 설파하며, 우주 한구석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와 그 한계에 대해 말한다. 또한 인간 근원의 슬픔을 다룬 문학, 그림, 영화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우주/지구가 인간 고유의 우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결함이 아닌, 존재의 필연으로서의 비애와 멜랑콜리
“슬픔은 슬픔 그 너머로 가기 위한 길이다”
책은 화성 탐사로봇 오퍼튜니티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물론 감성적으로 편집된 것이기는 하지만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라는 오퍼튜니티의 마지막 메시지가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했다. 여기서 저자들은 의문을 느낀다. 사람들이 오퍼튜니티의 최후에서 느낀 슬픔과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오퍼튜니티는 분명 인간이 아니고, 인류 과학기술의 희망찬 발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걸까? 무생물에도 감정이 있다고 여기는 ‘감상적 허위성(pathetic fallacy)’의 한 사례일까? 물론 저자들은 인간만이 슬픔을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가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에 의문을 품기 수백만 년 전부터 나무는 쓰러져 왔다. 옆에 있는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에 다른 나무들이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도대체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14쪽)
《슬픈 행성》에서 저자들은 사람들이 최후를 앞둔 탐사로봇을 보고 느낀 슬픔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저자들이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 ‘슬픔’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불안, 고뇌, 분노와 형제자매인 동시에, 이것들의 힘과 열정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 남는 것 역시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근본적인 조건, 혹은 선천적인 것에 가깝다. 슬픔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가슴 아픈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심지어는 슬픔 자체가 주는 위로마저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불가피한 사실에 대한 더 깊고 보편적인 이해”(이상 23쪽)다. 그런 면에서 슬픔은 시의적절한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기록과 작품에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투영해 왔다. 지구에 고립된 최후의 인간이나 우주 공간을 표류하는 인류를 그린 수많은 SF 문학부터, 각각 다른 방식으로 멜랑콜리를 그려낸 영화들(〈멜랑콜리아〉, 〈구멍〉 등), 행성 토성이 상징하는 우울과 광기가 깃들어 있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권태와 허무로 가득한 이상(李箱)의 작품까지, 저자들은 지역과 장르를 넘나들며 인류 근원에 있는 부정적 정서를 담은 예술작품을 두루 탐구한다.
하지만 행복에 가치를 부여하고 슬픔을 비롯한 감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에서 깊은 우울감이나 비애, 절망, 침울함, 애도 같은 정서를 드러내는 일은 금기에 가깝다.
물론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부정적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 세상이 비애로 채워진 크고 정교한 무대가 되어갈수록 전문가와 친구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싸우고 슬픔을 극복하고 내면의 기쁨을 다시 발견하라고 더 강하게 요구한다. 마치 행복이 우리의 초기 설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태어날 때 울부짖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591쪽)
저자들은 이렇듯 사회의 소통 체계가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열심히 퍼뜨리는 와중에는 그런 강박을 벗어던지고 슬픔을 수용하는 태도가 오히려 해방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 감정의 디폴트값은 슬픔이다.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슬픔은 슬픔 그 너머로 가기 위한 길”(579쪽)이라는 저자들의 말처럼, 인간 근원의 슬픔을 이해해야 그 밖의 고통받는 존재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류의 멸종은 누가 애도할 것인가?
그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
인류는 행성과 우주에 대해 지금처럼 많이 알았던 적이 없지만, 고향 행성인 지구로부터 지금만큼 소외되었다고 느낀 적도 없다. 이 책이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위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등장한 ‘기후 불안(climate anxiety)’, ‘생태 애도(eco-grief)’, ‘솔라스탤지어(solastalgia)’ 같은 용어들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을 뿐인 이 행성을 마주하는 순간에 느끼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행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 비탄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행성적 슬픔이라는 이 기묘한 느낌 자체가, 애초에 이 행성이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지표인 걸까? 이러한 사색의 배경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동시에 불가피한, 인간 멸종이라는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 멸종은 머나먼 미래의 일일까? 아니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현실일까? 우리는 한 종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인간 멸종 뒤에 남아 우리를 애도해 줄 존재는 누구, 혹은 무엇일까?(6~7쪽)
광범위한 주제를 넘나드는 사유 끝에 저자들은 비애란 내부의 감정과 외부의 정서의 간극에서 생기는 것, 즉 지구를 의인화하고 대상화하는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그러든 말든 관심 없는 지구의 간극에서 비롯된다고 결론 내린다. 쉽게 말해서, 인류가 멸망해도 지구는 남아있다. 그리고 인간 존재가 기본적으로 슬픈 건, 인간이 ‘어떤 종이든 탄생부터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각이 인간에게 비애와 허무를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사회적 차원의 재난은 그렇잖아도 짧은 인간의 수명을 더 짧게 만들고, 지동설 이래 지금까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과학적 증거 역시 계속 발견되고 있다. 즉, 지구는 인류만의 것이 아니다. ‘초(超)바다 이론’에 따르면 인류는 바다가 육상을 점령하기 위해 진화시킨, 물의 속성을 지닌 운반체일 뿐이다. “우리 존재는 ‘눈물’이라는 비효율적인 물질을 연료로 태우며 바다를 은하수까지 실어 나르는 자율추진식 운반체에 불과할 수도 있다.”(134쪽)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또한 인간만을 위해 설계된 순수하고 중립적인 기체가 아니며,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 낸 배설물이다. “우리의 허파는 언제나 누군가가 ‘이미 사용한’ 산소로 채워지고 있으며, 그 산소는 이전 생명체들이 내쉰 숨결 덕분에 존재”(430쪽)한다.
600페이지가 훨씬 넘도록 우주 차원에서의 하찮은 인간 존재와 그에 따른 비애 및 허무의 정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메시지가 그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피치노가 멜랑콜리를 “스스로를 성찰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고뇌의 기분이며, 인간의 자기인식이 가진 한계를 무력하게 반추하게 되는 상태”(78쪽)라고 설명한 것처럼, 슬픔의 정서는 인류에게 지구를 상대로 한 착취를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기후변화, 환경 파괴, 인간소외, 우주적 고독과 관련된 우울한 정서를 탐구하는 책 《슬픈 행성》은 ‘우주에서는 무엇도 인간의 울음을 듣지 못한다’는 진실에 대한 슬픈 이해이자, 그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