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01 한국의 부름과 독립을 위한 여정, 1886~1919년
◦ 편역자 서문 005 | ◦ 헐버트의 생애 010
◦ 연보 016 | ◦ 저자 서문 025
1부 한국과의 첫 만남
1장 한국으로의 첫 항해: 1886년 5월
2장 일본에서 한국으로: 안개 속의 항해
3장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1886년 7월
4장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갈등
5장 서울에서의 첫 여름: 1886년
6장 육영공원, 첫 세례, 한국 고대사 연구
7장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 연구
8장 일본 내륙 여행: 1887년 여름
9장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10장 결혼을 위해 캐나다를 거쳐 미국 방문: 1887년
2부 격동의 세계와 한국의 위기
11장 뉴욕의 결혼식과 평양 탄광 조사: 1889~1890년
12장 아시아 여행 기록: 1891년 12월~1892년
13장 성지와 유럽 여행: 1892~1893년
14장 감리교 선교사로서 서울 귀환: 1893년 10월
15장 한국의 야생동물과 민속놀이
16장 청일전쟁: 1894~1895년
17장 일본의 왕비 시해: 1895년 10월 8일
18장 을미사변의 결과: 1895년
19장 선교사들의 고종 호위: 1895년 10~11월
20장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1896년 2월~1897년 2월
3부 제국주의의 올가미와 고종 황제 밀사의 길
21장 개혁의 여명: 《독립신문》, 독립협회, 사범학교: 1896~1898년
22장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창간: 1901년
23장 독립협회의 좌절과 시베리아 횡단 여행: 1903년
24장 러시아 풍경과 《타임스Times》 특파원 위촉: 1903년
25장 러일전쟁과 파괴된 동양 평화: 1904년
26장 고종 황제의 밀사로 워싱턴행: 1905년
27장 백악관의 배신과 외교의 내막: 1905년
28장 을사늑약과 한국인을 위한 투쟁: 1905년
29장 헤이그 특사 지원과 최후의 외교 원정: 1907~1909년
30장 한일병합과 파리 강화회의: 1910~1919년
31장 국제연맹의 명암과 새 국제 질서의 모색: 1919~1932년
02 일제의 무단 통치와 정의를 위한 제언: 1853~1932년
1부 일제의 부상과 한국의 수난
1장 미국과 일본의 첫 조우: 1853~1854년
2장 일본의 급격한 변모 뒤에 숨은 비밀: 1854~1877년
3장 새로운 일본의 탄생과 야망
4장 정한론의 서막
5장 미국의 작은 전쟁, 신미양요: 1871년
6장 ‘은둔국’의 개방과 갑신정변: 1876~1884년
7장 왕비 시해의 전말: 1895년
8장 대한제국 수립과 영일동맹의 지정학: 1896~1902년
9장 러일전쟁, 극동 패권의 지각 변동: 1904~1905년
10장 을사늑약과 ‘보호정치’의 시작: 1905년
11장 통감부의 주권 침탈 심화: 1906~1907년
12장 헤이그 특사와 고종 황제의 양위: 1907년
2부 무단 통치의 실상과 독립의 외침
13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시련
14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저항
15장 한일병합: 주권 찬탈의 현장: 1910년
16장 105인 사건, 날조된 총독 살해 음모: 1911년
17장 무단 통치와 헌병 경찰 제도: 1912~1919년
18장 일본의 산둥반도 점령: 1914~1919년
19장 마지막 외교적 호소: 1919년
20장 3·1 독립 만세 운동: 1919~1920년
21장 미국에 알려진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1919~1920년
22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연합국 배신: 1916~1920년
3부 국제 정세의 변화와 평화를 위한 제언
23장 워싱턴 군축회의와 광주 학생의거: 1921~1931년
24장 만주사변과 극동 위기의 해결책: 1931~1932년
25장 일본의 중국 침략: 1914~1916년
26장 만주국 수립과 무너진 국제연맹의 권위: 1917~1932년
27장 도덕적 국제주의: 세계 평화를 위한 대안
28장 결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의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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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수도 서울까지는 26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겨우 말 한 마리가 지날 만한 좁은 오솔길뿐이었다. 장마철은 코앞이었고 수은주는 화씨 90도(섭씨 약 32도)를 오르내렸다.…길모어 부인은 인력거를 타고, 우리 남자들은 안장도 없는 조랑말을 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곧장 서울로 향했다.(60쪽)
학생 한 명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왕은 우리의 조언 없이 직접 성적을 결정했다. 성적은 ‘우수’, ‘양호’, ‘보통’, ‘불합격’의 네 단계였다. 놀랍게도 매번 왕은 학생이 보여 준 실력에 딱 맞는 점수를 주었다.(97쪽)
왕은 즉시 모든 외국인 거주자를 초대하여 궁궐 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다.…호수 안 작은 섬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왕과 측근들은 그곳에서 손님들이 벌이는 기묘한 동작을 지켜보았다.(117쪽)
내가 감리회 선교부 산하의 출판소를 맡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이를 기쁘게 수락했으며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한국이 보유한 놀라운 알파벳(한글)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무처럼 보였다.(199쪽)
문관파가 실패했으므로 군부 파벌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그 도구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 버릴 인물이었다.…일본 정부가 이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역사적 분석이나 심리적 이론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미우라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를 감히 독단으로 저질렀을 리도 없다. 자신의 정부가 처벌 면제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232쪽)
“…새벽녘 일행은 광화문을 통해 궁궐에 진입하여 즉시 내전으로 향했다. 이러한 입증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중 누군가가 실제로 계획된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모든 피고인은 석방한다.”…이 기록에는 어느 한국인도 왕비를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털끝만큼도 없는 반면, 일본 공사는 구체적으로 시해를 명령했다.(238쪽)
왕비의 침실 문 앞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서 있었다.…그들은 그를 베어 버렸고 그의 몸을 넘어 왕비의 방으로 뛰어들었다.…왕비는 처소의 한 방에서 구석으로 몰렸고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희생자 곁에는 자객들뿐이었기에 누가 치명상을 입혔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모든 정황은 일본인이 범인임을 가리킨다.(242쪽)
미우라는 자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번 소요가 궁궐 수비대와 국왕에게 불만을 토로하려던 일본식 훈련대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임명한 한국 군부대신으로부터, 미우라의 공모설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받아 내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 대신은 임무를 너무 완벽하게 수행한 나머지, 그 운명의 밤에 궁궐 안에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진술했다.(246쪽)
수일 동안 국왕은 어느 미국 시민의 집에서 비밀리에 궁궐로 들여온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국왕은 미국공사관에 전령을 보내 세 명의 미국인이 매일 밤 궁궐에 들어와 자신의 곁방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전투를 위한 호위병으로서가 아니라, 적들의 음모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장애물로서 말이다.(250쪽)
서재필 의사와 같은 인물들의 활동은 여전히 용인되었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들은 그들의 유익한 조언에 짜증을 냈다. 이는 우체국이 《독립신문》의 배송을 거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러시아인들은 서재필 의사에게 만약 그가 이 분야에서 은퇴한다면 두둑한 보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298쪽)
나는 (《코리아 리뷰》 사설에서) 일본이 한국의 자연스러운 친구이며 일본 내 문관파의 양식이 무관파의 무자비함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야마가타보다는 이토 히로부미를 더 신뢰했다. 물론 불안의 여지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며, 나의 미국 친구들로부터 일본을 옹호하는 내 입장이 지지받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를 한 번 이상 받았다.(300쪽)
(1905년)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일본을 변호할 수 없는 때가 왔다. 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안락을 누리거나, 아니면 한국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급증하는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 인민의 친구라는 자부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적의 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내가 머물러 있을 중간 지대는 없었다.(338쪽)
1905년 가을, 일본이 먼저 보호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을 흡수하는 과정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의 침략이 거기서 멈출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히 불가능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국의 왕(고종)이 집권자로서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강요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의무감에 따라 국가를 정치적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이 닿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국제법상 일본과 대등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에 변함없이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분명히 했다.(340쪽)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체결 당사국 중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그 위험을 알게 된 다른 쪽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 ‘거중 조정good offices’을 행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340쪽)
그것은 정부의 교육직 사임과 재임용의 희망 없이 선택한 직업을 영구히 중단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의 사악한 수법을 폭로했기에 그들에게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었고, 만약 그들이 나라를 장악한다면 어차피 그곳에서 나의 미래는 없었다. 반면, 나는 워싱턴에 왕이 자신의 인민과 왕조에 충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기록 하나를 더 남길 수 있었다. 따라서 결정은 쉬웠다.(343쪽)
왕은 내각에 일을 맡기고 안방으로 물러났다. 그들 중 외부대신을 포함한 일부는 자신들도 죽을 운명이라 믿고 더 이상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국 (을사보호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정확한 추산에 따르면 서명은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이내에 이루어졌다.(346쪽)
한국 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대통령의 손에 직접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통령이 편지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원한다면 국무부에 전달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려 시도했으나 그들은 지금 당장 그 문제를 처리하기에는 너무 바쁘다고 답변했다.(347쪽)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는지 항상 후회한다. “장관님, 누구도 일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우리의 조약이 쓰인 종잇값만큼의 가치도 없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문제 사이의 선택이라면, 나는 차라리 문제를 택하겠습니다.”(348쪽)
나는 한국을 방문하는 모든 저명한 미국인에게 인민들을 약탈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토 후작의 친구인 한 미국인 교수에게, 한국인들이 최소한 심리를 요청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일본인들 에게 기피 인물이 아니었던 한 미국인 주교에게 찾아가, 그가 저명한 지도자로 있는 교단에 속한 기독교인 한국인들이 당한 심각한 부당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으나 그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365쪽)
나는 헤이그로 달려가 평화회의에서 발언권을 얻고자 파견된 한국 대표단을 만났다. 그곳에서 스테드William. T. Stead를 만났고, 그는 나에게 그 도시의 평화 클럽에서 연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말로 보아 고통받는 한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374쪽)
상하이의 독일은행에 예치된 개인 자산의 잔액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한국 국왕이 비공식적으로 그 은행의 수표와 함께, 국왕 본인의 개인적 청구에 의해서만 돈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서가 담긴 친필 서신을 내게 보내 왔다.…국왕은 일본인들이 그 돈을 가로챌까 두려워했고, 내가 그 돈을 인출해 미국 은행에 자신의 명의로 예치해 주기를 원했다.(378쪽)
이제 (1919년 3‧1운동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적 정점에 다다른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Right’가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무력Might’이 지배할 것인지에 관한 숙명적인 투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634쪽)
일본의 어떤 정파도 군국주의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 군국주의가 없다면 일본은 4류 국가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무력을 과시해야만 아시아 대륙의 일부라도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만,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증오를 샀기에, 군국주의 지배력이 약화하는 순간 대륙의 모든 점유지에서 쫓겨날 것이다.(675쪽)
주목해야 할 점은 1929년 11월에 시작되어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놀라운 학생운동이다. 그것은 애국심의 분출이었으며 너무 뚜렷하고 보편적이어서, 이 나라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해 가고 있느냐는 질문에 단번에 마침표를 찍었다.…이 운동은 한국인들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세계의 존중을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겁쟁이 집단이라는 일본의 파렴치한 선전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폭로한다.(714쪽)
최초의 ‘국제연맹’은 바벨탑이었다. 그 사건의 물리적 기록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는 국제주의의 철학을 담고 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국제연맹을 결성할 천성적인 능력이 더 컸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 국가가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국제연맹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결핍, 즉 이기주의에 지배당했다.(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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