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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58162238 |
|---|---|
| 쪽수 | 116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양장 |
- 소설/에세이/시 > 수필
AI추천 이유

“몇백 년 전까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빵을 씹듯 천천히, 공원을 걷듯 느리게
민낯의 나를 마주한 서른 번의 새벽
2019년 첫 소설 『무너진 다리』를 발표한 후로, 작가는 오랫동안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의 개수를 셋으로 헤아려왔다. 글을 쓰고 각종 행사와 협업을 해내는 소설가의 가면, 십 년 넘게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치매에 걸린 엄마 그리고 타지에 출장을 나가 있는 아빠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자식의 가면, 마지막으로 온전한 나로 존재해야 하는 가면. 그중 소설가와 딸로서의 나를 최우선으로 살아가며 “나로서의 삶”은 최하위를 넘어 아예 삭제된 정체성이 되었다. 직업인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만으로 ‘나’는 다 설명된다고, 그러니 내가 나로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그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된 것은 “새벽 네시의 삶”이 시작되면서였다.
자정 무렵에 쓰러지듯 잠들어도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그 시간은, 밤도 아침도 아닌 “누구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고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고독한 적막의 시간이다. 그때야 민낯의 텅 비어버린 ‘나’를 알아버린 작가는 그 시간에 대해, 그 시간의 괴로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그 시간에 대해, 새벽 네시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루 중 온전히 나로만 존재해야 하는 시간에 대해. 그 괴로움에 대해. -17쪽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떠나게 된 독일이지만, 그곳에서 한 달을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산미 있는 독일 빵을 드넓은 공원에 앉아 아주 느리게, 시간에 쫓기지 않고 씹고 싶어서. 그렇게 도착한 뮌헨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런던의 하이드파크보다도 넓다는 영국정원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원들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만만히 보고 이런 건 익숙하다는 자신감으로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성된 녹지가 아니라 자연우림 속에 겨우 길만 뚫어놓은 듯한 그 공원은 달리고 달려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헤드폰 배터리가 꺼진 어느 날, 처음으로 노래 없이 그 공원을 걷게 된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자신을 아는 사람도 없는 도시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된 작가는 그제야 풀 소리와 새소리, 물소리 사이에 섞여드는 “내 안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게 된다. 벤치에 앉아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운 자신의 손과 다리를 내려다보며, 이곳에서 자신은 소설가도 딸도 아닌 “그냥 사람”이라는 시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서른 번의 날 동안 곱씹는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퍼지는 딱딱한 독일 빵처럼, “민낯의 나”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느슨하고도 개운한 자유로 다가왔다.
소설가도, 딸도 아닌 ‘한 명’ 혹은 ‘한 개’가 되어 이곳에 있는 나를 느낀다.
나는 나를 볼 수 없어서 느낀다. 저들이 저기에 있듯이 이곳에 있는 나를.-70쪽
매일 한다는 건,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작가가 서서히 가면의 무게를 벗어내기 시작한 그 공원의 끝자락, 그물이 다 해진 골대에 매일같이 공을 던지는 소녀가 있다. 실패해도 땀 닦을 틈 없이 다시 공을 잡는 소녀는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할 때 신경 하나하나가 쏠려 일그러지는 얼굴, 원고를 쓰다 문득 거울로 마주치는 자신의 얼굴과 닮은 표정이다.
그리고 문득 그 소녀에게서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문장 하나를 되찾는다. “나는 몸 쓰는 걸 좋아한다.” 여덟 살 때, 일등을 못할 것 같아 아예 출전을 포기해버렸던 리듬체조 대회 이후, 늘 몸의 증명을 요구받는 것 같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바로 그 문장이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어떠한 수식어 없이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믿음. 작가는 그것이 이방인으로 머물기에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섞이기에도 애매했던 한 달이라는 시간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 애매함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만 잘하면 되는, 나만 행복하면 되는” 일인 팀을 경험한 거라고.
한 달이라는 기한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작가는 같은 레지던스에 머물던 기타리스트의 네 살배기 딸 은제와 놀이터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 반짝이는 순간을 마주하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수많은 시간이 몸에 새겨져 지금의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쓰는 가면을 함께 만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자 가면은 더이상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실컷 봤으니 이제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러 가기로 다시 결심한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민낯의 나를, 그렇게 오래도록 내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다. 더는 한국의 새벽 네시도 두렵지 않다.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곧장 한국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간다.-108쪽
손으로 물들인 수채화로 만나는
우리 각자의 새벽 네시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는 화려한 관광도시가 아니라 무심하고 퉁명스러운 뮌헨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쓰인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동시에 직업인도 딸도 엄마도 아닌 그 어떤 역할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 “나”를 오래도록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응원이기도 하다. 이주향 작가의 그림은 이 새벽 네시의 시간과 공원의 공기 그리고 매일 같은 자리에서 공을 던지던 소녀의 얼굴을 섬세하게 붙잡아 보여주며, 독자를 자신만의 ‘새벽 네시’의 시간으로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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