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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3933268 |
|---|---|
| 쪽수 | 294쪽 |
| 크기 | B6(127mm X 188mm, 사륙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문학 > 작가론/작품론
AI추천 이유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바꿨을 뿐!
신분과 성별에 따라 문자 접근이 갈렸던 시대는 끝났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구조는 여전히 작동한다. 과거에 라틴어 교사와 값비싼 종이가 계급을 갈랐다면, 오늘날에는 이른 나이부터 쌓인 독서량과 값비싼 사교육,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술 훈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실제로 한 조사는 대치동 아이들의 문해력과 독해력이 다른 학군의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라틴어를 익힐 시간과 돈이 있던 사람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사교육과 문화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들이 더 정교한 문장을 갖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그 장벽이 신분과 성별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지금은 ‘노력’과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는 것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더 많은 책과 언어, 더 많은 훈련 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고, 그 바깥에서 출발하는 아이가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은 여전히 문장 속에 숨어 있다. 오늘의 문해력 격차는 결국 근대 이전 문자 권력의 재판(再版)이다. 『표준어 바깥에서』의 저자가 2,500년 전 이솝부터 다시 불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솝과 사포, 디킨스가 겪어낸 ‘자격 없음’의 자리가 오늘의 문해력 격차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즉 이 책은 옛 작가들의 뒷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누구에게는 쓸 자격을 허락하고 누구에게는 허락하지 않는지를 되묻기 위한 장치다. 2,500년의 시차를 두고도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는 사실이야말로 ‘표준어 바깥에서’ 태어난 이 문장들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할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열일곱 개의 대답
이 책이 내놓는 답은 거창하지 않지만 분명하다. 자격이 없다고 믿었던 자리에서도 쓰는 행위 자체가 그 자리를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예로 팔려 다니며 말을 잃었던 이솝은 동물의 입을 빌려 우화를 남겼는데 그것들은 2,500년 뒤에도 읽히고 있다. 사포는 남성의 언어 안에 갇혀 있던 여성의 욕망을 최초로 시로 옮겼다.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하던 열두 살 소년은 그 경험을 잊지 않고 『올리버 트위스트』로 되살려 찰스 디킨스라는 빛나는 별이 되었다. 안데르센은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동화를 썼다. 정비공으로 청년기를 보낸 주제 사라마구는 쉰여덟이 되어서야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다섯 아이를 키우며 청소노동을 하던 스웨덴의 마이아 에켈뢰브는 양동이를 내려놓은 밤마다 일기를 썼고, 그 일기는 훗날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머슴의 딸로 태어나 후처의 자식으로 자란 강경애는 여공과 소작농의 삶을 처음으로 문학 안에 들여놓았다. 제임스 볼드윈은 가장 사적인 상처, 흑인이자 소수자로서 겪은 차별을 문장으로 옮겨 세계인이 읽는 언어로 만들었다. 이들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쓰기가 결국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나아가 삶을 바꾸었다. 『표준어 바깥에서』가 지금 다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당신도 쓸 수 있는가.
『표준어 바깥에서』 이렇게 읽자
이 책은 시대순으로 배열된 4부, 17편의 작가론으로 구성된다. 〈1부 노예와 여성의 첫 목소리〉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노예 출신 작가 이솝과 테렌티우스, 그리고 여성 최초로 욕망을 노래한 시인 사포를 다룬다. 문자 권력이라는 범주에 도전장을 내민 최초의 작가들인 셈이다. 이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고통받았는지, 노예라는 신분, 여성이라는 성별 그 자체가 어떻게 저자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는지를 눈여겨보면 좋다. 〈2부 근대 문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서는 세르반테스, 안데르센, 디킨스, 트웨인 등 흔히 ‘모험소설가’, ‘동화작가’로만 소개되었으나 실은 당대 가장 진보적이었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이 왜 그런 온화한 이름 뒤에 가려졌는지, 그 이미지가 정작 무엇을 지워버렸는지를 되짚어 읽는 재미가 있다. 〈3부 일하는 몸, 말하는 주체가 되다〉는 노동과 계급의 언어로 20세기 문학을 다시 쓴 이들을 소개한다. 네루다, 사라마구, 귄터 발라프, 제라르 모디랫, 어빈 웰시가 바로 그들인데, 이 가운데는 발라프나 모디랫처럼 대중에게 생소한 작가도 있다. 관전 포인트는 이들이 노동을 소재가 아니라 몸으로 통과했다는 데 있다. 발라프는 직접 이주노동자로 위장해 잠입했고, 사라마구는 쉰여덟까지 정비공으로 일하며 자신의 문장을 벼렸다. 〈4부 겹겹의 억압을 넘어서〉는 이 책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계급과 젠더, 인종과 식민의 억압이 겹친 자리에서 태어난 문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마이아 에켈뢰브, 라오서, 강경애, 마야 안젤루, 제임스 볼드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억압이 한 사람의 몸 위에 두 겹, 세 겹으로 쌓일 때 무엇을 빼앗기는지, 어떻게 해서 그것을 다시 찾아가는지 따라가며 읽어보자. “글은 여전히 ‘먹고살 만한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도 강하다. 그러나 이 책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독하게 가난하게 태어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라는 저자의 한마디가 이 책에 실린 17인의 삶과 문학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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