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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91124949009 |
|---|---|
| 쪽수 | 320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역사 >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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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태 위기를 먼저 사유한 미셸 세르의 문제작
“세계와의 전쟁을 멈출 새로운 계약이 필요하다”
계약은 인간만의 것인가
근대 정치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물으며 ‘사회계약’을 발명했다. 인간은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법을 세우며 정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셸 세르는 이 위대한 계약에 결정적인 누락이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들끼리 계약을 맺는 동안 정작 그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는 계약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법적 주체가 되었지만 땅과 강, 바다와 대기, 동식물은 인간이 마음껏 소유하고 사용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남았다. 사회계약은 인간의 권리를 확장했지만, 그 문을 닫는 순간 거대한 세계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1990년 처음 출간된 『자연계약』은 바로 이 오래된 계약을 다시 쓰자는 급진적인 제안이다. 한때 일부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던 법적 주체의 지위가 마침내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어 왔다면, 이제 그 역사를 인간 너머로 밀고 나가야 한다. 세르는 자연을 인간과 대등한 계약의 상대이자 법적 주체의 지위로 끌어올리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새로운 권리와 의무를 설정하자고 주장한다. 인간들끼리만 맺은 사회계약 이후, 이제 세계와 맺는 ‘자연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호소보다 훨씬 근본적인 요구이다.
인간의 전쟁 뒤에서 시작된 세계의 반격
『자연계약』은 고야의 그림 〈모래 위의 결투〉에서 시작한다. 두 남자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서로를 쓰러뜨리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서 있는 땅은 진흙 펄이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두 사람은 함께 더 깊이 가라앉는다. 당사자들은 오직 누가 이길 것인가에 몰두하지만, 그림 밖의 관람자는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가. 세르는 이 장면에서 인류의 역사를 읽는다. 전쟁과 경쟁, 지배와 소유에 몰두해 온 인간은 서로의 적만 바라보느라 자신들이 함께 빠져들고 있는 세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에 행사하는 힘이 전 지구적 규모에 이르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우리가 대상으로 취급해 온 세계가 이제 인간의 행위에 전체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후와 바다, 땅과 대기는 더 이상 인간 역사의 고요한 배경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변화시킨 세계에 의해 다시 변화되는 존재가 되었다. 세르에게 기후 위기는 그래서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벌여 온 오래된 전쟁이 마침내 인간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사건이다. 지배와 소유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승리는 패배가 되고, 인간은 자신이 의존하는 세계와 함께 몰락한다. 역사는 뜨겁게 불타올랐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아래 가라앉고 있는 땅을 보지 못했다.
지배와 소유에서 권리와 공생으로
세르가 요구하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회귀가 아니다. 문제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어떤 새로운 법적 관계를 세울 것인가’이다. 근대의 사회계약은 인간들 사이의 평등을 인정했지만 자연을 권리 없는 대상으로 남겨 두었고, 근대 과학은 세계를 인식하고 지배할 대상으로 만들었다. 세르는 이 두 역사를 하나의 문제로 묶는다. 과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강력해졌는데도 법과 정치는 여전히 인간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만을 조정하고 있다면, 인간의 힘과 세계의 힘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세워져야 하는가. 그가 자연계약을 단순한 생태적 약속이 아니라 사회계약과 과학적 계약을 동시에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계약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그 전환을 압축하는 말이 ‘기생’에서 ‘공생’으로의 이동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무한한 숙주처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숙주를 죽이는 기생자는 결국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의 지배가 전 지구적 규모로 확대된 오늘날, 지배는 도리어 인간을 위협하는 힘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자연계약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선의를 요구하는 계약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서로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법과 정치가 인정하는 계약이다. 세르가 말하는 자연계약은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성립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다시 법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역사의 갈림길에는 이제 두 개의 길만 남는다. 죽음이냐 아니면 공생이냐.
세계와 함께, 세계 안에서, 세계에 의해, 세계를 위해
세르는 계약을 하나의 ‘끈’으로 사유한다. 끈은 인간과 인간을 묶지만 인간과 사물도 연결하며, 지식과 힘, 법과 세계를 함께 얽는다. 과학과 기술이 전 지구적 규모로 발전한 오늘날, 인류와 지구는 이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국지적인 행동이 지구 전체를 변화시키고, 변화한 지구는 다시 인간의 삶을 바꾼다. 우리는 지구를 소유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구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세계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세계가 인간의 정치와 법을 다시 쓰도록 요구한다. 『자연계약』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끈’은 그래서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 어느 쪽도 홀로 존재할 수 없게 된 시대의 존재 조건이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990년이었다. 당시에는 자연에게 법적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자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르는 훗날 다시 쓴 서문에서 자신이 제안했던 법적 해결책이 여러 나라의 입법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며, 한 세대 전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생각이 이제 실천 가능한 것이 된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오늘날 『자연계약』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오래된 생태철학의 고전을 되돌아보는 일이 아니다.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의 붕괴 앞에서 인간의 정치와 법, 과학과 철학의 토대 자체를 다시 묻는 일이다. 세계를 인간의 ‘환경’으로 둘러 세웠던 오래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계가 서로에게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 세계와 함께, 세계 안에서, 세계에 의해, 세계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오래전 도착한 세르의 경고에 이제는 답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