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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69815529 |
|---|---|
| 쪽수 | 240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사회학
AI추천 이유

자본주의로 성공한 나라의 이상한 지표들
한국은 20세기 자본주의의 최우등생이었다.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가 독립 후 반세기 만에 OECD에 가입했고, 그 사이 6·25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졌던 국토에는 공장과 도시가 세워지고 도로가 깔렸다. 이 성공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고, 그 성취감이 시민의 삶에 짙게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모두 덮어버렸다. 고통은 사라진 게 아니라 성장의 성적표 뒤로 숨어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로봇, 우주항공 같은 최첨단 산업을 기반으로 아예 자본주의 세계의 맨 앞줄에 설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성적표 뒤에 감춰놓은 숫자들이 어딘가 이상하다. 2025년 한국인의 연간 노동시간은 1833시간으로 OECD 평균 1736시간을 훌쩍 넘는다. 공동체 유지의 근간인 사회복지 지출은 GDP 대비 14.4퍼센트로 OECD 평균 23퍼센트에 한참 못 미친다. 임시직 노동자 비율은 26.9퍼센트로 OECD 평균 11.2퍼센트의 2.4배에 달하고,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70퍼센트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발생한다. 성장은 계속되는데 그 성장이 보통의 삶으로 흘러가지 않는 구간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자본』의 독일어판 정본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강신준은 새 책에서 이 숫자들을 ‘야만’이라는 단어로 묶는다. 야만과 그 대척인 문명에 대한 그의 정의는 무척 간단하다. 야만은 오늘만 살고 문명은 내일까지 계산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사람을 셈에 넣는 순간 양보와 타협의 자리가 생긴다. 반면 그것을 넣지 않았을 때 남는 것은 각자도생과 적대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 한국사회는 야만인지 문명인지, 나 아닌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계산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서울 강북의 아파트 소유자가 잠 못 드는 이유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복잡한 개념을 우리가 매일 말하고 듣는 일상의 언어로 옮겨놓았다. 지은이는 은퇴 후 시골에 내려가 장을 담갔다가 구더기가 생겨 된장 한 단지를 통째로 버린 이야기, 결혼식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음악과 송년 음악회에서 들리는 베토벤의 음악 이야기, 영화 〈박하사탕〉의 영호가 철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장면 등을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에 대입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생겼더군요. 이렇게 한 번 실패했으니 이제 장 담그기를 그만두고 장독을 없애버려야 할까요? 아뇨, 그럴 수 없습니다. 내일도 음식을 해 먹기 위해 장을 새로 담그고 이번에는 뚜껑을 더욱 철저히 밀봉해야지요. … 마르크스는 문제를 없애는 게 아니라 그걸 고쳐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얘기합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은 그것의 문명적 요소에 결합해 있습니다. 구더기(야만) 때문에 장(문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_「4장. 자본주의의 묵시록: 마르크스의 『자본』」, 83~84쪽
가난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보다 서울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부자지만, 강북의 아파트 소유자는 강남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낀다는 예로 가난의 상대성을 부각시킨다.
자본주의에서 부는 곧 노동시간이고, 그래서 가난도 노동시간의 격차로 환원된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인데 어째서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노동시간을, 즉 부를 소유하게 될까? 2025년 말 보도된 이재용 회장의 1년간 주식 가치 증가액 11조 3260억 원을 2026년 최저임금으로 환산하면 약 11억 3000만 시간어치에 달한다. 다시 말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12만 년 넘게 일해야 저만큼을 벌 수 있다. ‘이재용만큼 벌게 해줄 테니 최저임금을 받으며 영생을 살겠느냐’고 한다면, 아마 신도 거절할 것이다. 이 무자비한 부의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답은 하나뿐이다. 마르크스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노동시간이다.
우리는 수수께끼의 정체가 노동하는 사람의 노동력이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수께끼의 해답은 두 사람의 관계였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교환이라는 구조에서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적입니다.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판매만 하는 사람과 구매만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대립적이고 배타적이며 적대적입니다. 노동빈곤은 이 구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_「4장. 자본주의의 묵시록: 마르크스의 『자본』」, 77~78쪽
자본주의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의 출발점으로 삼은 상품은 나에게 필요한 것(1)이면서 동시에 남과 교환할 수 있는 것(1+1)이었다. 이 겹침이 자본주의를 봉건제와 갈라놓은 문명의 표식이었고, 동시에 이 겹침에서 소유를 독점하려는 야만이 자라기 시작했다.
연주에 실패했어도 악보를 버리지 않는 이유
한국의 시민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마르크스라는 이름 앞에서 멈칫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이론과 실천은 한국전쟁의 역사와 연결되고, 그의 실패를 증명한 1990년대 소련 및 동구권의 대붕괴가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강신준은 이 의심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룬다. 이 대목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을 고전음악에 비유한다. 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해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음색과 감정이 악보 바깥으로 표출된다. 이처럼 매번의 연주가 새로운 곡으로 태어나지만, 그 바탕에는 애초에 작곡가가 직접 만들어놓은 단 하나의 악보가 있다. 이것이 교본과 실천의 관계이며, 마르크스를 폐기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소련의 실패는 실천의 실패지 교본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실패를 이유로 교본 자체를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연주에 실패했다고 악보를 찢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오히려 실패를 딛고 새로운 실천을 구성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 과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_「1장. 야만이 온다」, 28쪽
이 구분 위에서 저자는 제2인터내셔널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볼셰비키, 제3세계, 냉전기 서방까지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마르크스의 교본 실천 사례를 검토한다. 무엇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 되짚되 변호하지는 않는다. 볼셰비키가 마르크스의 교본에서 벗어난 것은 설계도를 몰라서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며, 의지로만 구성된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소련이 실천했던 마르크스의 방법이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교본을 바탕으로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설계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주5일제와 하루 8시간 노동, 오늘의 기본을 누가 만들었을까
실패한 실천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마르크스의 유산들을, 그러나 그 기원을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1919년 창설된 국제노동기구가 헌장 제1호로 결의한 ‘8시간 노동일’이다. 1900년 이전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하루 12~13시간 노동이 당연했다. 지금 우리가 13시간이 아니라 8시간만 일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방법을 실천한 결과이다. 무엇보다 타인을 위한 노동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노동시간의 감소는 여가시간의 증대로 이어지고, 그 여가시간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부가 증가한다. 그 사회가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보여준 자유의 나라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한국의 시민과 노동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마르크스는 이념의 문제이기 전에 이미 우리의 노동과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단지 그것을 꺼내어 쓰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는 “마르크스는 우리의 현재”라고 말한다.
4·19에서 응원봉 집회까지, 우리는 문명의 문을 계속 찾았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비상구는 왼쪽에 있었다
한국사회는 야만의 벽을 허무는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4·19 혁명, 6월 항쟁,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와 윤석열 탄핵 응원봉 집회까지. 그런데 그 시도의 끝에는 늘 폭력이 되돌아왔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저자는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렛대가 없었다고 답한다. 19세기 유럽의 실패한 혁명들을 분석해 마르크스가 찾아낸 방법, ‘혁명의 과학’이 부재했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 저작은 1910년 식민지 편입 이래 1987년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금서였다. 해방 직후와 4·19 직후에 잠깐 숨 쉴 틈이 주어졌을 뿐이다. 어렵사리 해금된 1987년으로부터 불과 2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었다. 이로 인해 마르크스는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혔다. 1997년 IMF 경제위기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도 한국에서는 마르크스를 불러내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좌파도 노동자 정당도 구축하지 못했고,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에 그치며, 그나마도 기업별로 쪼개져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반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아주 당연하지만 현실에는 부재하는 일들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과제는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다음의 네 가지다. 마르크스의 문헌을 제대로 갖추는 일(MEGA 한국어판 출판), 실천의 주체를 바로 세우는 일(초기업 단위의 산업별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 구축), 주체들이 공유할 강령을 작성하는 일, 그리고 이 모두를 오래 지탱할 시민정치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혁명은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를 필요로 한다”는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유언처럼, 제도를 바꾸려면 그 제도를 바꿀 사람이 계속 필요하다. 또한 2026년 현재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사업장에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이 잘 보여주듯이,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낼 여유시간을 누가 가질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만든 교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노동시간의 소유만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는 이 책의 제목으로 도착한다. 다시 광장이 불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야만의 벽에 가로막힌 채로 광장에 갇혀 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마르크스가 남긴 설계도를 펼쳐 밖으로 나갈 문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비상구는 왼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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