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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39232143 |
|---|---|
| 쪽수 | 128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내 시의 시작은 처음부터 그 여자다. 그 여자는 나의 중심에서 움직인다. 그 여자가 자라면서 경험하고 간직한 추억의 말 한마디, 그 여자가 말하고 싶거나 전하고 싶은 즐거운 듯 밝고 환한 눈빛, 명랑한 손길에서 나는 움직인다. 그 여자는 나의 아내다.
- ‘시작 노트’에서
내 눈이 천 개라도 전부 다 못 보았을
내 손은 천 개라도 만질 수 없는 것을
내 코가 숨 쉴 수 있는
향기로운 꽃잎들
- 시 「오늘의 꽃」에서
당신은 꽃잎처럼
가장 아름다울 때
반짝인다
- 시 「나의 선사시대 목록」에서
저만치 먼저 가닿는 마음, 사람과 자연을 함께 바라보다
“저만치 마음은 벌써 산방산에 오른다”(「나의 서귀포 목록」)고 시인은 노래한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그 마음을 따라 시선도 사람과 자연,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간다. 이석구 시인의 신작 시집 『저만치 마음은 벌써』는 자유로운 시의 호흡과 시조의 절제된 가락이 한 권 안에 어우러진 시집이다. 이 시집은 시와 시조 두 형식을 넘나들며 한 사람을 향한 마음에서 시작해 옛 그림과 산천, 병들어가는 지구로까지 시선을 넓혀간다. “내 시의 시작은 처음부터 그 여자다. 그 여자는 나의 중심에서 움직인다”고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밝힌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아내다.
아내의 고향으로 향하던 어느 여름밤, 하늘 가득 쏟아지던 별을 보며 시인은 「밤길」을 쓴다. “골짜기 흘러내린 물소리 들으면서 / 아내가 운전하며 이태 만에 친정 가네”(「밤길」)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은하수 아래 졸며 가는 밤길의 정취를 절제된 가락으로 그려낸다. 「동암에서 누에를 치다」에서는 아내의 유년, 할머니의 잠실에서 뽕잎을 주던 기억이 “빈집의 영혼이라는 / 첫잠 자는 아늑한 방”(「동암에서 누에를 치다」)으로 되살아난다. 시인에게 아내가 살아온 시간과 기억은 시가 시작되는 자리다.
이 사적인 서정은 옛 그림으로 확장된다. 이인상의 「설송도」를 바라보며 쓴 「고고」에서 “산다는 건 하염없이 쌓이는 눈발 같아”라고 노래하고, “눈발이 날릴수록 사방은 당신의 집”(「고고」)이라며 눈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에서 선비의 꼿꼿한 정신을 읽어낸다. 옛 그림은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시선은 다시 산천으로 향한다. 북한산의 얼어붙은 폭포 앞에서 “아무도 못 가본 길 폭포는 길을 안다”(「겨울 폭포에서」)고 노래하고, 금강 옛 나루터에서는 “물살을 뚫고 나온 갯버들 애기 버들”(「왕진나루」)과 돌아온 왜가리·수달·고라니를 통해 막혔던 강이 다시 흐르는 기쁨을 전한다. 정형의 틀을 지키면서도 행과 연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시조와 자유로운 시의 호흡이 이렇게 한 권 안에서 자연스레 교차한다. 반면 방조제로 에워싸인 간척지에서는 죽어간 큰고니를 발견하고 “고니의 울음소리를 너구리가 물고 간다”(「얼음 판화」)며 훼손된 생태계의 그늘을 바라본다.
시집의 후반부는 기후 위기라는 오늘의 현실로 이어진다. 「폭염주의보」는 열대야의 풍경으로 폭염을 그려내고, 「어느 생태학자의 수첩」은 비닐봉지를 미역인 줄 알고 뜯어 먹는 거북이의 모습으로 플라스틱 문명의 그늘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내 눈이 천 개라도 전부 다 못 보았을 / 내 손은 천 개라도 만질 수 없는 것을”(「오늘의 꽃」)이라며 다 헤아릴 수 없는 생명 앞에 겸허해지고, “당신은 꽃잎처럼 / 가장 아름다울 때 / 반짝인다”(「나의 선사시대 목록」)며 다시 생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서 출발한 시선은 그렇게 시와 시조의 가락을 오가며 더 넓은 생명의 세계로 나아간다. 아내의 기억을 귀 기울여 듣던 마음과 옛 그림 속 소나무를 바라보던 마음, 막힌 강과 죽어가는 새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시인의 말에 나오는 “꽃의 색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는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저만치 마음은 벌써』라는 제목처럼 시인의 마음은 늘 대상에게 저만치 먼저 가닿는다. 아내에게, 옛 그림 속 선비의 정신에게, 훼손되어가는 강과 산에게,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모든 생명에게. 시와 시조가 어우러진 이 시집은 가장 사적인 사랑에서 출발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자리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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