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_신화를 넘어 기록 속의 이순신을 만나다
01 인터넷을 달군 이순신 어록의 진실
이순신은 가난한 역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은 14년 동안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전전했을까?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제독이 되었을까?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02 이순신의 전승 신화와 전선戰船에 대한 오해
이순신의 전승 신화 ‘23전 23승’의 진실은?
이순신은 늘 열세한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몇 척이 활약했을까?
거북선과 판옥선은 당파(충돌공격)를 했을까?
판옥선은 제자리에서 배를 돌려 포를 쏘는 게 가능했을까?
03 한산해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산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어디일까?
한산해전은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될까?
한산해전에서 패한 와키자카의 ‘해초 연명설’은 사실일까?
한산해전에서 패한 일본군 전사자는 9,000명이다?
04 명량해전의 지정학적 분석과 역사적 사실
이순신이 명량(울돌목)을 결전지로 선택한 이유는?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싸운 장소와 진형은?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에서 철쇄를 사용했을까?
05 이순신과 선조, 애증 관계의 진실
백의종군은 병사로 강등되는 벌일까?
이순신은 선조의 부산 진격 명령에 항명했을까?
정탁의 신구차가 이순신을 살렸을까?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 선조를 향한 충성심은 변했을까?
06 인간 이순신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순신은 재수 끝에 늦은 나이로 무과에 합격했다?
이순신은 상사인 도체찰사 이원익과 사돈지간이었을까?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순신은 2명이다?
07 이순신 사후 전해지는 이야기에 대한 진실
도고 제독의 이순신 장군 찬양 발언은 사실일까?
‘충무’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이 유일할까?
이순신 초상화, 어떤 것이 진짜일까?
에필로그_이순신 정론을 찾아서 떠난 여정
참고문헌
[본 문]
현재 확인되는 실록과 관련 사료 어디에서도 이백록이 ‘역적으로 몰락하여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순신은 몰락한 역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인터넷 어록의 첫 문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말도 현재까지 『충무공행록』, 『이충무공전서』, 『선조수정실록』 등 주요 사료 어디에서도 “가난 때문에 외가에서 성장하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01 인터넷을 달군 이순신 어록의 진실 (17p)
이순신의 노량해전 전사와 관련해서는 오래전부터 ‘자살설’과 ‘은둔설’ 같은 여러 이야기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순신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순신은 전쟁 중 수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은 뒤 백의종군해야 했다. 이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조선 수군이 사실상 붕괴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삶 때문에 후대에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운명을 걱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타났다.
- 01 인터넷을 달군 이순신 어록의 진실 (42p)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은 과연 몇 번일까? 초기 이순신 연구자들은 이를 어떻게 분류했을까?
먼저 임진왜란 당시 육상 및 해상에서 벌어진 전체 전투 상황을 시간순으로 자세하게 기록한 『임진전란사』를 참고해 보자. 이 책에서는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을 18회로 분류하였다. 여기에는 왜교성 전투도 포함되어 있는데, 육지에서는 조·명연합군이,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이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해군사관학교에서 오랫동안 이순신을 연구한 조성도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순신이 직접 지휘한 해전을 15회로 정리하였다. 칠천량해전은 원균이 지휘한 해전이므로 여기에서 제외하였다.
- 02 이순신의 전승 신화와 전선에 대한 오해 (54p)
드라마와 영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한산해전의 현장 기록은 생각했던 것보다 짧다. ‘선봉 5~6척을 들여보내 적을 유인했고, 일본 함대가 넓은 바다로 나오자 학익진을 펼쳐 각종 화포를 집중 발사하여 적을 무찔렀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장계에는 학익진을 어떻게 펼쳤는지,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전투 장소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은 ‘넓은 바다 가운데에 이르자’ 정도이다.
그렇다면 장계에 언급된 ‘넓은 바다 가운데’는 어디를 가리킬까? 한산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일본 측 기록과 후대 조선의 기록에 나타난 추격 거리를 참고하여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 03 한산해전에 대한 오해와 진실 (110p)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겼다. 이날 『난중일기』에 기록된 ‘조수를 따라 이동했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 수군의 함대 이동에서 조류를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울돌목처럼 물살이 거센 해협에서는 판옥선의 노만으로 강한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자신이 이동하려는 방향으로 흐르는 때를 기다렸다가 그 흐름을 이용하여 함대를 이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04 명량해전의 지정학적 분석과 역사적 사실 (145p)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형벌의 근거가 된 『대명률』에서 조선시대 형벌은 크게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의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이를 오형五刑이라고 한다. 태형과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매를 때리는 형벌이다. 도형은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하게 하는 형벌이며, 유형은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을 먼 지역으로 보내 생활하게 하는 형벌이다. 마지막으로 사형은 죄인의 목숨을 빼앗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이 다섯 가지 형벌 어디에도 백의종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백의종군은 『경국대전』이나 『대명률』에 규정된 법정 형벌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이나 국경의 위기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운용한 군사적 조치였다.
- 05 이순신과 선조, 애증 관계의 진실 (187p)
이순신의 무과 급제 교지를 보면 그는 병과 제4인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급제자는 동점자 때문에 1명이 늘어난 29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순신은 전체 12등이었다. 아주 뛰어난 성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낮은 성적도 아닌 중간 정도의 순위였다.
이순신의 급제 순위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의 등위가 기격구와 보격구 성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급제자 29명 가운데 이순신처럼 개인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4명뿐이었고, 나머지 25명은 내금위內禁衛 등에서 근무하던 현직 군관이었다.
- 06 인간 이순신에 대한 오해와 진실 (232p)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회자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日·朝·中三國人民 連帶の歷史と理論』이 그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저자는 그 이야기의 출처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석영달과 김준배 교수는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넬슨-이순신 비교 발언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하였다. 연구자들은 도고의 이름으로 생전에 간행된 『勝て兜の緖を締めよ』(1931), 『愛國讀本』(1932), 『國民敎訓東鄕元帥の言葉』(1933) 등의 저술과 어록집, 사후 발간된 『東鄕元帥直話集』(1935)을 살펴보았다. 또한 도고 신사에 소장된 『1904-1905년 연합함대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일기』와 영문 일기까지 검토했지만 이순신과 관련된 내용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 07 이순신 사후 전해지는 이야기에 대한 진실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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