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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24095638 |
|---|---|
| 쪽수 | 11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AI추천 이유
삶의 원석에서 언어의 보석을 캐내며,
존재의 깊이를 밝히는 시적 여정
1. 사소한 것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시적 감각
이선중 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평범한 사물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사소한」에서 시인은 솔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을 바라본다.
솔잎 끝 못 견딘 이슬
속절없이 추락한다
지축이 흔들리자
칠월에도 낙엽이다
저 한 잎 구르는 진동
사소한 게 아니었다
달의 힘 소환하는
지구의 벅찬 숨결
먼 항로 달려온 파도에
온종일 메밀꽃 핀다
첫새벽 눈 뜬 자만이
알 수 있는 이 역사
- 「사소한」 전문
제목은 ‘사소한’이지만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슬 한 방울과 낙엽 한 잎의 작은 움직임은 지축과 달, 파도와 메밀꽃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질서 속에 놓인다. 작은 움직임 하나가 또 다른 움직임을 낳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인식이다. 이선중 시인은 바로 그 미세한 연결의 순간을 포착한다.
2. 생명과 욕망, 초월 사이의 긴장을 응시하다
이선중 시인은 생명을 지닌 존재들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깃든 원초적인 욕망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를 함께 탐색한다.
「밤꽃」은 이러한 긴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수천 개 바늘로 봉인한 원초의 문
아카시아 꽃내 스친 후 속절없이 열리다
파계의 신음이 스며든 야릇하고 비릿한
바람에 흔들릴 땐 눅진한 야생의 숨결
달빛을 녹인 물결에 숨탄것들 거칠다
한 생을 거세한 달도 더운 밤에 젖는다
- 「밤꽃」 전문
밤꽃은 단순한 여름의 풍경이 아니다. 시인에게 밤꽃의 짙고 비릿한 향기는 생명체 안에 잠재된 원초적 욕망을 상징한다. ‘봉인’하고 억누르려는 의지와 끝내 열리고 마는 욕망이 팽팽하게 맞선다.
‘파계’와 ‘달’, ‘거세’ 등의 시어는 욕망과 초월의 대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욕망을 넘어서는 세계를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선중 시인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모순을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바라본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욕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일은 곧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3. 상처 입은 존재를 향한 연민과 공생의 미학
이선중 시인의 시 세계를 이끄는 또 하나의 중요한 힘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존재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다. 「꼬리 없는 고양이를 보았다」에서 시인은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고양이를 바라본다.
결핍을 훈장으로 뒷골목의 더 뒷자리
빈자릴 핥아대는 그림자도 기울어
죄 없이 죄를 가진 몸 달빛 아래 홀로 서다
덧나있는 옹이처럼 엇나간 신의 설계
어미와 통정한 세상 바람 향해 묻는다
너에게 주홍글씨를 새긴 자가 누구냐
* 근친상간의 결과라는 주장이 있음
- 「꼬리 없는 고양이*를 보았다」 전문
꼬리가 없다는 육체적 결핍은 고양이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게 만든다. 그러나 시인이 문제 삼는 것은 고양이의 결핍 자체가 아니라 그 결핍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죄 없이 죄를 가진 몸”이라는 표현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낙인과 편견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비극이 응축되어 있다. 시인은 소외된 고양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름을 어떻게 배제와 차별의 근거로 만들어왔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시선은 사람 사는 세상의 풍경으로도 이어진다. 「단장면 구천리」에서 시인은 쇠락해가는 산골 마을의 풍경에 오래 머문다.
할매 마당 옥수수는 당신처럼 키가 작고
들깨 터는 아낙네는 마음마저 비우는 듯
가게엔 먼지 쓴 통조림
작년처럼 앉아있다
온종일 누에같은 은근한 손길들이
대추를 붉게 굽고 떨감에 노을이 익는
골짜기 주름치마에 산새가 시를 쓴다
- 「단장면 구천리」 전문
사람들이 떠나간 마을, 먼지를 뒤집어쓴 채 팔리지 않는 통조림, 작은 옥수수와 들깨를 터는 아낙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도시의 화려함과 반대편에 놓인 풍경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단순히 쇠락과 소멸의 공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추와 떨감, 노을과 산새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 안에 남아 있는 삶의 온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선중 시인의 연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공생의 미학으로 확장된다.
4. 한 편의 시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
『아주 오래된 이정표』에서 ‘길’은 단순한 이동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찾고, 자신의 시를 찾아가는 창작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선중 시인이 시를 찾아가는 과정은 구도자가 수행하는 모습을 닮아 있다.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자신을 단속하면서 정한 곳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쉽게 타협하지 않고 뜻을 지키는 그 모습은 길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스를 줄 모르면 새는 새가 아니다
날개 펴고 날아도 여전히 그 자리면
한 가닥 실오리에 묶인
한갓 연에 불과할 뿐
나무가 땅속 깊이 가지 닮은 뿌리 내리듯
발아래 한 줄기도 돌아보니 길인데
지난날 광장과 골목을
서성이길 얼마인가
폭풍이 가지 쳐내듯 우듬지를 비울 시간
네게로 가는 길을 더듬더듬 나선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
길이 길을 열어준다
- 「길」 전문
하늘을 난다는 외형은 같지만 새는 스스로 날고 연은 실에 묶여 있다. 이 대비는 관습과 상투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찾으려는 시인의 창작관을 보여준다.
집에서도 노숙하는 발밑은 콘크리트
뿌리를 드러낸 채 온밤을 서성인다
유리벽, 완고한 철창 뚫고
구원의 빛을 갈구한다
수태를 잊은 난임이 가랑이를 벌린다
찰나 유성, 서러운 벌레, 오래전 잊은 사람 …
누구든 씨 한 톨 떨군다면
사랑하리라 더없이
손길 없어 메마른 시간 시혼詩魂은 버짐투성이
열매를 맺기나 할까 순산할 수 있을까
사막에 지팡이 꽂으리라
푸른 잎새 돋을 때까지
- 「시인」 전문
시인은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는다. 쉽게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걷고 묻고 기다리는 것이다. 「시인」에서는 이러한 창작의 과정을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 비유한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오랜 고통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막에서도 지팡이를 꽂고 푸른 잎새를 기다리겠다는 다짐. 그것은 결국 시를 향한 믿음이며, 자기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구도자의 자세다.
박진임 문학평론가는 이선중의 시 세계를 두고 “외부 현실의 모티프들을 씨줄로 삼고 암시와 비약으로 가득한 내면의 세계를 날줄로 삼아 베를 짜듯 텍스트를 엮어간다”고 평가한다. 현실과 상상력, 구체적인 사물과 철학적 사유가 서로 얽히면서 그의 시조는 섬세하면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결을 갖게 된다.
그의 시는 오래된 한과 영탄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현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상상력으로 사물과 세계를 다시 바라본다. 사소한 것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상처 입은 존재에서 존엄을 발견하며, 사회의 균열에서 공생과 화해의 가능성을 찾는다.
『아주 오래된 이정표』는 그렇게 지나온 삶의 흔적을 딛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시인의 기록이다. 오래된 길 위에 놓인 이정표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길이 단지 과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길까지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의 채석장에서 캐낸 원석을 언어의 보석으로 다듬어온 이선중 시인. 『아주 오래된 이정표』는 그가 걸어온 길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현대 시조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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